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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66화 (66/380)

인조, 명군이 되다 66화

야심한 시각, 즉조당에 손님이 있었다.

좌의정 박홍구.

그는 국문이 있은 뒤 의정부에서 오간 대화를 밝혔다.

고자질을 좋아하는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말해주어서 고맙습니다. 한데, 내게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원익을 엿 먹이려고?

자신이 얼마나 충성하는지 증명하기 위해?

좌의정인 박홍구가 더 오를 수 있는 계단은 현재 이원익이 지내는 영의정 자리밖에 없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신하된 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역임해 보기를 원한다.

환국 때는 목숨도 입지도 모두 위태로웠던 박홍구지만, 어느 쪽도 비교적 안정된 지금이라면 딴생각이 들 수도 있지.

‘하지만 이원익이 고작 뒤에서 몇 마디 했다고 쳐낼 거라 생각했다면 실망인데.’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였나.

“전하.”

“말씀하세요.”

“신은 영의정의 우려가 틀리지 않은 줄로 아옵니다.”

의외의 발언이었다.

예상과는 정반대라 저의를 짐작하지 못하고 침묵하니, 박홍구가 슬쩍 고개 들었다.

“반정 이래 아조가 신속하게 혼란을 수습하고 종사를 다시 반석에 올린 것은 전하께옵서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나라와 백성을 다스린 덕이옵니다.”

그런가?

“좌의정께서는 내가 때로는 도의적으로 옳지 못한 방법을 쓴다는 것도 아실 텐데요.”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건 가벼운 알이 아니므로, 때로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정도가 아닌 방편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용하지 않는 한에야 어찌 부득불 도의상 옳지 못하다 하여 배격할 수 있겠사옵니까?”

박홍구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을 이어나갔다.

“전하께서는 이미 때때로 동원한 방편의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또 지양하시니, 비록 도리를 항구적으로 준수하지는 못하셨겠으나 도의를 잃으신 것은 아니옵니다.”

“어째, 내게 듣기 좋은 말씀만 해주십니다.”

“용상의 주인이 도의를 상실했던 시대가 그리 먼 과거가 아니므로 이렇게 말씀 올리는 것입니다. 신이 무위도식하여 세월만 먹고서 오늘날처럼 늙어버렸으니, 폐주의 때가 아직도 눈앞에 선연합니다.”

세월 이야기는 왜 하나 싶었는데 박홍구가 곧장 덧붙였다.

“다른 노신들도 그렇지 않겠사옵니까?”

이원익과 마찬가지로 폐주가 변해가던 모습이 눈에 선명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폐주는 매우 특이한 경우에요. 실책과 행보를 살펴보면 그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일반적인 선악과는 거리가 멀지요. 선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악한보다야 심병을 앓던 환자에 더 가깝지 않습니까.”

나와의 비교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폐주는 즉위하기 전만 해도 성군의 자질을 보였사옵니다. 많은 사람이 기대했던 이유지요. 하오나, 치세가 길어지면서 폐주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사옵니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성군이시옵니다. 다만 지금은, 무고한 백성들이 살육되어 평정이 흔들리고 계실 뿐이옵니다.”

의문이 피어오르는 진단이었다. 이괄과 그의 아들을 이용할 때도 이 같은 우려는 드러내지 않았던 박홍구다. 더군다나 그는 나와 달리 이괄이 예비 역적이라는 확신도 없었잖은가.

그때와 최근 일 사이 차이점은 있다. 이괄을 제거하고 이전을 이용한 것은 음지에서 이루어졌지만, 모문룡에게 천륜을 어기도록 유도한 것은 대신들 앞에서 행해졌으니까.

어쩌면 그것을 두고 나의 분별력이 어그러진 것이라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뭐든지 처음만 어렵다고, 내가 이 같은 행동을 점차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지는 않는가 우려할 법도 했다.

“아무리 큰 바다라도 파도는 치게 마련이옵니다. 하나, 아무리 크게 번진 물이라도 다시 바다로 돌아가지요. 전하께서도 그리하셔야 하옵니다. 폐주를 동정하시되 그의 행보까지는 동정하지는 마시옵소서.”

걱정이 과해서 그렇지…….

“좌상께서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어요.”

너는 원래 이렇지 않고 착한 사람이야, 하고 세뇌라도 당하는 기분이다.

“성총을 어지럽혔다면 송구할 뿐이옵니다. 하나, 전하의 성심을 걱정하는 진심만은 알아주소서.”

어쩌면 이건 이원익과 박홍구의 사악한 계략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당신은 착한 사람이라며, 귀가 딱지가 앉도록 만들어 질려서라도 사람을 개심시키는 거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조참의에게 내린 지시를 거두지는 않을 거예요. 참의의 제안에 응한 건 단순히 모문룡을 벌주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신뢰도를 손상시켜, 본국에서 제멋대로 떠들 모문룡의 주둥이를 조금이라도 덜 시끄럽게 만들려는 거지.

“예.”

박홍구는 절을 올리고서 물러났다.

드르르르…….

그리고 방문 너머가 조용해졌을 즈음, 긴장을 풀고서 탄식했다.

“참나.”

가도 평정을 앞두고서 폭급한 모습을 보인 게 신하들 뇌리에 너무 깊이 박힌 모양이다.

하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가도의 정벌을 논의할 수 있겠는가. 박홍구 말마따나 임진년마저 엊그제 같을 노신들에게 명국과의 분쟁은 자멸처럼 여겨질 텐데.

그래서 모문룡이 먼저 공격했다는 데도 전전긍긍하며 소극적인 방법만 제안하지 않았던가. 무거운 엉덩이를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힘을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힘을 너무 많이 준 걸까.

‘한 번씩 기 모아서 터뜨리는 게 효과는 좋은데 이런 부작용이 생기는군.’

그래도 광해군과 비교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

‘한동안 착하게 살아야겠군…….’

* * *

아무리 착한 사람이어도 놓치지 못하는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불구경이고 다른 하나는 싸움 구경이다.

나는 다시 한번 신하들과 함께 의금부에 모였다.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죄인은 모문룡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로, 백성을 해친 도적은 물에 빠뜨려 죽이고 있소.”

김류의 말에 모문룡과 그의 수하들이 안색을 굳혔다. 도적들을 수장한 건 반정 직후의 사건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지만 사례는 사례지. 아무튼,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대들은 명나라에서 관작을 받은 몸들이지. 양국의 우호를 위해서라도 살생을 남발하는 건 지양하기로 했소.”

통역이 전해지자 모문룡과 그의 수하들이 필사적으로 긍정했다.

“그러나 만세의 법을 세워두고 대국의 신하라 적용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폐단을 끼치겠소?”

“…….”

“전하께서는 이 사람의 절충안을 받아들여 그대들 중 한쪽만 죽이기로 하였소이다.”

이에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섰다.

동강진에서 보급을 담당했던 경중명이라는 자였다.

“한쪽이라면, 무엇이 기준이란 말이오?”

맡은 직책이 있었던 만큼 머리는 잘 돌아가는 자였다.

이에 김류는 모문룡과 그의 수하들에게로 나아가 팔을 들었다. 마치 그 팔로 무리를 양분할 듯했지만, 김류는 모문룡만을 앞으로 밀어냈다.

“이게 무슨 기준이요!”

“기준은 목숨의 무게요. 이 정도면 공정하게 나눈 것 같소만?”

경중명은 외떨어진 모문룡과 이죽이는 김류를 번갈아 보더니 숨을 삼켰다.

“수장은 어느 쪽이 될지, 총병께서 선택하시오.”

“……!”

“저들은 그대의 수하들이니, 생사여탈은 수괴인 당신이 정하는 게 맞지 않겠소?”

김류의 말에 모문룡과 반대편에 선 자들이 일제히 불만과 항의를 쏟아냈다.

“나는 더 이상 저자에게 충성하지 않소!”

“그렇소!”

“목숨만은 살려주시오, 목숨만!”

고성이 오가는 와중 엉뚱한 곳에다 애걸하는 사람도 있었다.

안 돼.

안 바꿔줘.

김류가 잔뜩 긴장한 모문룡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에게 선택권을 맡기는 게 옳겠소?”

모문룡은 흥분해서 떠들어대는 제 수하들을 마주 보다가, 실소를 지었다.

“아, 아니…….”

실소와 함께 고양감마저 섞인 대답이었다.

한동안 조용히 갇혀 있다가 수하들과 함께 불려 나왔을 때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겠지. 그러다가 생로가 보이니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거다.

물론, 모문룡의 이 같은 반응에 수하들은 극렬하게 반발했다.

“또 혼자서만 살겠다는 거냐?!”

군사 조련을 맡았던 공유덕이 낙담한 강중명을 밀쳐내고서 외쳤다.

“그래! 네놈들이 잘 싸웠으면 내가 이런 치욕을 받는 일도 없었을 것 아니냐!”

“네가 지휘를 잘했어야지!”

“싸움에서 진 건 네놈들이 다 무능했기 때문이다! 너 역시, 군사를 잘 조련했다면 패배를 당했겠느냐?!”

“패기 없는 패잔병들 따위들로 어떻게 하라는 소리냐!”

아비규환이었다.

공유덕 외에도 모문룡의 수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악다구니를 써댔다. 대단한 건 모문룡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니까 눈치 한번 보지 않고 이렇게 됐다는 점이다.

모문룡이 어떤 선택을 할지 뻔해서겠지.

‘뭔, 이따위 것들을 두고서 부자의 연 타령이야?’

이 세상에 어떤 아비가 저 혼자 살겠다며 자식들을 희생시키고, 또 자식들은 아비에게 혼자 죽으라고 폭언을 쏟아내냐.

“어떻게 하시겠소이까? 혼자 죽으시…….”

“저놈들을 죽이시오!”

“야! 모문룡!”

“닥쳐!”

김류의 말이 채 끝맺기도 전에 모문룡이 서둘러 답하고, 그의 선택에 수하들은 폭언이 폭동으로 번져갔다.

병사들이 뛰쳐나와 난동 부리는 모문룡의 수하들을 제압했고, 모문룡은 그런 병사들 뒤에 숨어 외쳤다.

“빠, 빨리 데려가시오!”

이만하면 됐다.

“그만!”

용상에서 일어나 한 마디 외치니 좌중의 소란이 가라앉았다.

모문룡의 수하들은 이 자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는지 이쪽을 향해 엎드렸다. 일단 굴복하면 만에 하나라도 살려주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운이 좋은 놈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장수와 수하를 나누어 서로에게 죽음을 떠넘기는 건, 그다지 볼 만한 광경이 아닙니다.”

아무리 해적 쓰레기들이라도 목숨은 효율적으로 쓰여야지.

합의해 둔 전개가 달라지자 김류는 다소 놀라워했으나, 면상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되어버린 모문룡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법을 시행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폐단이 될 것이니, 단 한 사람만 죽이는 게 좋겠습니다.”

이에 모문룡과의 그의 수하들이 안색이 반전했다.

주변의 신하들 역시 굉장히 당혹한 기색이었다. 다들 내가 기어코 모문룡을 죽이려는 줄 아는가 본데, 그럴 거라면 처음에 모문룡을 죽였지.

내가 죽이고 싶은 인물은 모문룡의 수하 중에서 유일하게 머리가 장식이 아닌 자였다.

“자네.”

강중명.

김류가 고작 몇 마디 한 시점에서 크게 충격을 받은 자였다. 그만한 두뇌가 있으면 이런 짓을 하는 저의도 알 테지.

모문룡이고 모문룡의 부하들이고 서로 배신감에 찌들어서 눈이 돌아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명나라 황제 앞에서도 두고두고 서로 물어뜯으며 사이좋게 지옥으로 갈 테니까.

하지만 강중명이 그런 목적을 알고 모문룡과 수하들 사이를 봉합해 함께 살아남으려 든다면 곤란했다.

다행히 모문룡의 수하들은 주인과 수준이 똑같아서, 강중명이 지목되자 곧바로 무리에서 밀쳐냈다.

“악!”

내던져진 강중명의 좌우로 병사가 붙었다.

“바보천치들아! 여기서 안 죽는다고 가서 안 죽을 성싶으냐?!”

“끌고 가라!”

엄명과 함께 강중명은 자신을 저버린 모문룡과 동료들에게 독설과 저주를 퍼부어댔다.

그러나, 한때 그의 동료들은 일단 살아남았다는 기쁨에 안도할 따름이었다.

다만 모문룡만은 여전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나머지도 다시 수감하세요. 서로 보지도, 대화하지도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의견을 공유할 일도 없이 서로에 대한 불신과 증오만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이거지.’

내가 평정을 잃었다는 박홍구의 말이 옳았다. 굳이 여럿 죽일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여러 사람이 목숨을 건졌으니, 아마도 일시적인 수명 연장에 불과하겠지만, 아무튼 이 얼마나 선하고 착한 일이냐. 나 자신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해도 될 정도다.

이원익도 분명 원래대로 돌아온 내 모습에 만족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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