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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67화 (67/380)

인조, 명군이 되다 67화

짧은 휴식으로 숨 정도는 돌릴 수 있었던 이지완은, 정해진 일정에 맞춰 새벽부터 집을 나섰다.

그가 거리를 나아갈수록 한산했던 길거리에는 매한가지 관복 입은 자들이 하나둘 합류하기 시작했고, 별빛만이 총총 빛나던 밤하늘도 조금씩 개었다.

그리고 경운궁 앞에 이르렀다.

“두봉斗峯.”

김육의 호명에 이지완이 답했다.

“잠곡潛谷.”

“이렇게 모이니 생존자가 많지 않다는 게 한눈에 보입니다.”

처음 강원도로 파견되었던 어사의 숫자는 열여섯 명. 그러나 각 읍 수령과 분투하며 외방을 전전한 결과 어사 중 절반 가까이 떨어져 나갔다.

사유는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수령과 결탁했다가 적발됐고, 누군가는 양민 상대로 행패를 부리다가 파직됐다. 또 누군가는 지쳐서 관직을 내려놓았고, 괴담처럼 전해진 말로는 말도 없이 고향으로 도망쳤다가 파직된 자도 있다고 했다.

“갖은 고생은 다 하고 이 자리에 서니 소회가 남다릅니다. 두봉께서는 아니 그렇습니까?”

“이 사람이야 부친께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여전히 앞날이지요.”

“아, 일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사도 견뎠는데 내직이야 대수겠느냐던 말 말입니까?”

김육이 빙긋 웃고서 끄덕였다.

과연 이지완이 주변의 양손 안에 드는 생존자들을 돌아보니, 못할 건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 눈앞의 김육도 그렇게 금의환향한 사람이 아닌가.

“공은 무슨 배짱으로 내암來菴과 맞서셨습니까?”

광해군을 핍박하던 선조에 맞서 세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내암 정인홍은, 폐주의 치세가 시작되자 금성탕지金城湯池 같은 입지를 다졌다.

오죽하면 범동인계의 지주인 퇴계 이황을 공격하는 회퇴변척晦退辨斥마저 일으켰을까.

당시 성균관의 유생이었던 김육은 그런 정인홍과 맞섰다가 낙향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배짱이 좋아서 내암과 맞선 게 아니라, 그게 옳은 일이라 여겨 맞섰던 것입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주저 없이 해내는 것이 배짱 아닙니까?”

“으하하!”

이지완의 의문에 김육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배짱이 있었다면 이 사람이 밤마다 잠들지 못하고 벌벌 떨었겠습니까?”

이지완이 마땅한 대답을 떠올리지 못하자, 김육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두봉께서도 시간이 흘러 지금을 되돌아보면 웃음만 나오실 겁니다. 오늘날의 재상들이라고 예전에 고난이 없었겠습니까?”

“음,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고단해지면 불러주십시오. 술만 먹여주시면, 한탄 정도는 들어드리겠습니다.”

김육은 주변의 어사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공짜 술을 마다할 사람 있습니까?”

느닷없는 질문이었으나 어사들은 실소와 함께 긍정했다.

“술만 있으면 그깟 푸념 들어주지 못하겠습니까?”

“술 주는 사람이 상전이지요!”

어사들의 당색은 천차만별이었다.

개중에는 대북이라면 학을 뗄 서인도 있었으나, 외방에서 함께 반년이나 고생한 양전어사의 동질감은 정치적 간극을 메우고도 남았다.

“크흠!”

민망하면서도, 우군이 생긴 것이 못내 기뻤던 이지완은 헛기침만 연발했다.

잠시 후.

떠들썩한 분위기도 가라앉을 즈음, 내시 하나가 경운궁을 나섰다.

“모두 입시하시지요.”

내시는 안내와 함께 발을 돌렸고, 밖에서 찬 바람 맞으며 서성이던 어사들은 일제히 내시의 뒤를 쫓았다.

* * *

이른 새벽부터 쌀쌀한 바람이 몰아치더니, 날이 개니까 눈송이가 드문드문 날아다녔다.

‘조선에서 보는 기념비적인 첫눈이로군.’

기념비적인 것 치고는 바닥에 물기조차 깔리지 않을 정도로 약했지만, 시기를 생각해 보면 근심이 머리를 들 정도는 된다.

인조의 치세는 전 지구적 소빙하기와 함께 시작했다. 다르게 말하면, 앞으로는 농업생산력이 감퇴한다는 뜻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과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으로 대표되는 농본주의가 쇠락하고 중상주의가 대두하는 건 이러한 범지구적 변화와도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 조선은 선혜법의 확대만으로도 벅찰 지경이니.’

갈 길이 너무나도 멀었다.

외환이라도 없으면 모르겠으되, 국경 너머에서는 후금의 발호와 명나라의 멸망이 현재 진행형이기까지 하다.

이런 시기처럼 군주의 자질이 중요한 때도 없건만 원 역사의 조선은 운이 좋지 않았다.

과연 나는 다르게 평가될 수 있을까.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다.

“전하.”

“상선.”

“어사들이 궁문에 집결하였사옵니다.”

“들라고 하세요.”

“예에.”

상선이 물러나고, 곧이어 양전어사들이 대오를 맞춰 즉조당 앞에 모여들었다.

선두는 전직 판윤인 윤선이었다.

대비를 굶기려던 광해군을 설득하여 식사 조달을 끊이지 않게 한 사람이다.

당색이 대북이라 판윤을 구굉으로 교체하고 외방으로 보냈는데, 이렇게 보니 미안하고 또 반가웠다.

“신 양전어사 윤선이 전하께 삼가 인사 올리옵나이다.”

“고생 많으셨어요.”

윤선은 꾸벅 허리 숙여 치하에 답했다.

역사적으로는 특별한 성과를 세우지 못한 인물이나, 높은 자리에는 그처럼 심지 있으면서도 선한 사람이 있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말단의 백관이 사류에 휩쓸려도 나라는 중심을 지킬 테니까.

나는 계단을 내려가, 주춤 물러서는 윤선의 팔을 붙들었다.

“전하?”

“경이 어사들을 감독한 덕분에 양전이 늦지 않게 완수되었고, 또 시의적절하게 선혜법을 시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찌 신만의 공로겠사옵니까.”

“경의 공로가 없는 것도 아니지요. 거대한 전각일수록 석축 하나, 기둥 하나가 중요한 법입니다. 그리고 공께서는 가장 중요한 석축과 기둥을 맡아주셨어요.”

“……망극하옵니다.”

나는 윤선을 두고서 다른 어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대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이 아무리 많아도 손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내가 열의를 가져도 분부를 따르는 이가 없었다면 오늘날 같은 공효가 있었겠습니까?”

어사들이 허리를 숙였다.

“군주와 국가를 위해 고생한 이들을 적절하게 치하하지 않는다면 어찌 헌신한 이를 포상하고 유능한 사람을 우대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포상이 언급되자, 어사들마다 정도만 다를 뿐 미소를 억누르는 게 보였다.

노고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빈말로라도 마다하기에는 그동안 한 고생도 많았겠지.

오직 한 사람만이 포상의 개념이 다를 뿐이었다.

“판윤?”

다 똑같은 어사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분별 되는 전직의 직함을 부르자 윤선이 답했다.

“예.”

“경께서는 내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보상을 염두에 두신 듯합니다.”

“……전하.”

윤선은 고개를 똑바로 든 채, 각오를 다진 얼굴로 말했다.

“신은 이미 다른 주인을 모셨던 몸이옵니다.”

반정이 벌어진 원년元年도 얼마 남지 않은 시기다.

그것을 증명하는 눈발이 사모의 정수리마다 점점이 찍혔는데, 아직도 폐주를 잊지 못했다는 소리가 나올 줄이야.

다른 어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자 녹지 않은 눈송이들이 도록도록 흘러내렸다.

“경이 어찌하여 사직을 바라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어사로 나아가 수고한 그대가 포상으로써 사직을 바란다면, 마치 내가 그대를 속박해 둔 것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본디 윤선은 어사의 역할도 마다했다.

나라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니, 바깥 공기라도 맡는 셈 치고 다녀오라는 권유를 가까스로 들어주었을 뿐.

그렇게 윤선은 제 몫을 다 해냈고, 광해군에게는 과분한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을 언급하며 사직을 청하고 있었다.

윤선의 당색을 생각하면 죽음에도 이를 수 있는 초강수다. 당장은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될지라도, 평소 대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서인들이 알게 된다면 앞다투어 처벌을 요청할 테니까.

‘목숨을 시험하는 한이 있을지라도 관직은 사양하겠다는 건가.’

반정이 있었던 뒤 많은 사람이 사직을 청하고 낙향했다.

혼란스럽던 정국 끝에 극단적인 상황까지 벌어지자 정계를 향한 혐오와 피로감이 폭발한 것이다.

윤선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경께서 억지를 계속 부리시겠다면…….”

윤선은 고개만 숙일 따름이었다.

“나는 의정부 자리 하나를 끝까지 비워두겠습니다. 이 주변이 덜 꼴 보기 싫어질 때쯤이나, 아니면 더 꼴 보기 싫어져서 직접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언제든지 돌아와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윤선은 그대로 고개 숙인 채, 답하지 않았다.

확실히 심지만큼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거듭 옥사를 일으킨 광해군과도 맞섰을까.

다른 어사들에게 향하니, 다들 대단한 기 싸움을 목도한 참이라 바짝 얼어 있었다.

“응교?”

“예.”

“덕분에 낡은 조세 제도를 조금이나마 뜯어고칠 수 있었습니다.”

“신은 성상의 명대로 행하였을 뿐입니다. 손발이 아무리 많은들, 올바른 지시가 없다면 짐승의 수족과 무엇이 다르겠사옵니까?”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군.

1점 가점.

“그대가 강원도에서 분투하는 동안 좌찬성께서도 힘써주신 덕분에 북방군을 창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북방군으로 바다의 도적을 물리쳐 수괴를 이 나라 감독에 가두었으니, 그대 집안의 공로가 매우 큽니다.”

“망극하옵니다.”

“한데, 내가 방금 판윤에게 무어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이상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서둘러 고개 숙였다.

“판윤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두시겠다 하셨사옵니다.”

“흐음.”

“성상께서 이렇게 신하들을 아껴주시니, 누군들 충성하지 않겠사옵니까.”

판윤은 아직 충성하기 싫다는데?

300점 감점.

나는 옆으로 옮겨 다른 어사를 마주했다.

김육.

원래 역사에서 그는 출사와 함께 기존 조세 제도의 불합리를 지적했고 대동법의 확대를 요구했다.

그리고 효종의 치세에 들어서는 화폐를 도입하고자 애썼는데, 이력을 보면 김육은 당시 조선에 필요했던 변화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낙후하고 불합리한 조세 제도의 개혁.

대두하는 상업을 뒷받침하기 위한 화폐의 도입.

그러나, 김육은 생전 어떠한 쪽에서도 끝을 보지 못했다.

그는 충청도에 이어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확대하고자 했으나 곡창지대의 막강한 지주들과 유지에 의해 가로막혔고, 화폐 역시 갖은 고난으로 현종 대를 지나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정착됐다.

하지만 역사가 달라진 지금.

김육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경은 내가 판윤에게 무어라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신은……. 전하께서 판윤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도록 의정부에 자리를 비워두겠다는 말씀을 기억하옵니다.”

“흠.”

나는 김육의 정수리를 털어주었다.

“솔직히, 응교와는 다르게 답할 줄 알았습니다.”

“신이 어찌 전하의 앞에서 거짓을 고하겠사옵니까? 전하께서 신하를 아끼는 마음을 보았으니, 어디 가서 발설하지 않을 뿐이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김육.

50만 점 가점.

종신 노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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