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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68화 (68/380)

인조, 명군이 되다 68화

즉조당.

겨울이 다 되어서인지 새벽에 시작하는 어전회의는 여전히 밤중이었다. 눈 침침한 늙은이들은 뭐가 보이기나 할지 의문이로군.

“강중명의 집행이 완료되었사옵니다.”

김류가 보고했다.

“그에게도 자비를 보이고 싶었지만, 반응을 보니 감각이 좋은 사람이더군요. 그 총명한 두뇌를 악행에 남용했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신이 일제히 예를 표했고, 영의정 이원익이 한 발자국 나섰다.

“죄인의 처벌은 마쳤으니 다음 일을 생각하실 때이옵니다. 모문룡과 그의 수하들이 저지른 죄과는 명백하나, 명나라의 관직을 지내고 있으니 응당 명나라에도 사실을 전해야 할 것이옵니다.”

혹여 다른 사람을 통해 전말이 전해지면 조선은 곤란한 상황에 놓일 테니까.

철산부는 국경과 가깝다.

명나라가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사신은 누가 좋겠습니까?”

그 한 마디에 제신의 과반이 시선을 피했다.

반쯤은 죽으러 가는 길.

명나라에서 가도 정벌의 소식에 진노하면 목숨을 구명하기 힘들 테니까.

죽지 않더라도 유배 따위의 화풀이는 당할 수 있다. 그 역시 다시 조선의 땅을 밟기는 힘들 터이니, 죽은 사람과 다름없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육로가 끊긴 지금 명과 소통할 방법은 바다로 통하는 것뿐.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힌다면 그 역시 죽고도 남는다.

“신이 가겠사옵니다.”

이번에 호조참의로 제수된 김육이었다.

“직을 맡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신을 자처하십니까? 들어가세요.”

훠이훠이 손짓해도 김육은 버티고 서서 말했다.

“이번에 파견될 사신의 역할이 더없이 막중한데 새로이 제수되었다고 피하겠사옵니까? 신에게 맡겨주시옵소서.”

“그 더없이 막중한 역할의 사신을 이제 당상에 오른 사람이 맡겠다는 겁니까?”

꽤 기합이 들어갔던 김육이었지만, 제가 한 말이 있어서인지 불퉁해서는 물러났다.

유능한 사람 치고 고분고분한 인물이 없어.

근성도 강단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유능할 수 있겠느냐마는.

“남이공이 일전에 가도를 방문하여 도적들의 사정에 해박하고, 당장 맡은 중임 역시 없으므로 변무상사辨誣上使를 맡기겠습니다.”

자리에 없는 사람이 거론되자 여럿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직 남이공과 두터운 면이 있는 병조판서 김신국만이 착잡한 표정을 지을 뿐.

“이하는 의정부에서 정하세요.”

이에, 눈치만 보던 좌의정 박홍구가 나섰다.

“가도 정벌에 따라 사신을 보내는 것은 분란 및 변방과 직결된 일이옵니다. 그만큼 사행의 의의와 인원의 선발이 중대하니, 비변사備邊司를 소집해 논함이 어떻겠사옵니까?”

본디 비변사는 그 이름처럼 변방邊을 방비備하는 임시 기구다.

그러나 양란이 벌어진 뒤에도 해체되지 않고 남아, 기존의 최고 기관이었던 의정부와 비변사에서 낙오된 공조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상설화 및 확대된 비변사는 변방을 방비하는 데 필요한 군무만 아니라 조정의 갖은 잡스러운 업무까지 다 주관하게 되어, 사실상 나라에서 유일하게 기능하는 기관이 되어버린다.

독주의 바탕이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세도정치기에 들어 왕권이 약해지고 소수의 권력을 점한 신하들의 힘이 강해지자 비변사는 권신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수단이 되었지.’

그래서 권력의 분할이 중요한 것이다.

조선과 왕권의 부활을 꿈꾼 흥선대원군 대에 이르러서야 비변사는 축소 끝에 해체되지만, 그때는 이미 나라가 망국을 앞둔 채였다.

늦기 전에 싹을 잘라놔야지.

왕위에 오른 뒤 비변사를 한 번도 소집하지 않은 이유였다.

“비변사는 폐주가 나라를 좌지우지하기 위해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겨놓은 기구입니다. 좌상께서 지적하신 이번 일의 의의와 중요성을 모르지 않으나, 나는 폐주의 실책을 반복할 생각이 없어요.”

“송구하옵니다.”

막상 비변사 자리를 청했던 박홍구는 곧바로 승복하여 물러났다.

도저히 비변사를 재가동하려는 의지가 있다고는 느껴지지 않는 모습.

‘좌의정도 이참에 비변사 놀음을 끝내고 싶었나 보군.’

아니면 내가 비변사에 대해 일언반구 없는 걸 보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던지.

어느 쪽이라도 충신은 충신이었다.

* * *

회의가 파한 후.

김류는 가까운 당여들의 요청으로 자리를 만들었다.

간만에 소집된 모임에 측근들은 회기애애한 분위기로 잡담과 근황을 나누었으나, 술이 들어가자 이내 불평을 쏟아냈다.

“요즘 의정부의 늙은이들이 너무 설쳐대지 않습니까?”

“요즘이라기엔, 어제오늘의 일만도 아니지요.”

“당장 오늘만 해도 박 대감이 정신 못 차리고 헛소리나 하지 않았습니까!”

심기원沈器遠이 노성과 함께 술상을 때리자, 모두의 흥분이 일순 싸늘하게 식었다.

그리고 상석에 앉은 영수의 안색을 살폈다.

김류.

그는 달아오른 심기원의 난동에도 느긋하게 술잔만 꺾을 따름이었다.

그런 태도가 마치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참의께서도 똑같이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심기원이 여전한 술기운으로 채근했다.

김자점과 마찬가지로 김류의 후의를 입어 높은 등급의 공신에 녹권된 그는, 정육품에 불과한 자신의 형조정랑 자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반란에 성공하면 즉각 당상에 오를 줄 알았거늘 아직도 참상에 머무르고 있었으니까.

심기원은 그 원인을 마저 숙청되지 않은 잔존 북인계 인사들에게서 찾았다.

“의정부에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폐주와 결탁한 쓰레기들입니다! 그 작자들만 사라져 주면 참의께서도 당장 재상에 임명되실 겁니다!”

심기원은 제 발언에 더 흥분해 언성을 높였다.

영수를 앞에 둔 채로 산통을 깨다 못해 질근질근 바스러뜨려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수준의 난동이었다.

“이보게, 수지遂之…….”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한 당여가 만류했으나 심기원은 도리어 성낼 따름.

“왜? 왜! 이 사람이 틀린 말이라도 했나?!”

달그락

잔 내려놓는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상석으로 향했다.

김류는 찬물이라도 맞은 듯 얼어붙은 당여들 사이에서 혼자 온탕에 던져진 심기원을 마주했다.

왕 앞에서는 가급적 온건하고 유용하다는 인상을 남기고자 애쓰는 김류지만, 당여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를 따르는 측근 대부분은 충성의 대가로 과분한 포상을 받아낸 자들.

본인의 능력으로 지금의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니었기에, 그들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위에서 끈을 계속 당겨주어야 했다.

이 자리에서 상대에게 잘 보여야 할 사람은 김류가 아니었다.

“수지遂之.”

“예.”

“많이 마셨군.”

용서이자 경고였다.

계속 사리분간 못 하고 설쳐대면 원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 벌어질 거라는.

“…….”

직접적인 경고에도 출세와 더 많은 부귀영화를 바라는 심기원의 욕심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욕망을 이해해 주지 않는 영수에게 원한만을 가질 뿐.

난동을 더 부린다고 좋아질 건 없기에 입술만 짓씹을 따름이었다.

“송구합니다.”

“의정부의 재상들을 내버려 두는 건 내가 아니라 전하시다. 설마 나라고 욕심이 없으리라 생각하나?”

“아닙니다.”

“그렇다면 수지는 내게 전하의 뜻에 반하라고 말한 셈이로군.”

심기원의 시선이 돌아간 곳에서, 눈이 마주친 당여가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언행을 말라는 듯.

“……오해이십니다.”

심기원이 끝내 겉으로나마 굴복하자 김류는 당여들을 향해 말했다.

“전하께서 이따금 노하시고, 평소에는 잘 대해주시니 다들 파악이 똑바로 안 되었군. 주상께서는 그대들의 생각보다 훨씬 의중이 깊으시다.”

금상은 자신을 왕위로 모신 공신일지라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단지 선이 매우 관대하여, 식견 좁은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경거망동하는 자는 말로가 좋지 않을 것이야.”

비밀스럽게 왕명을 받들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김류의 단언에 당여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불만족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하수들이 있었다.

심기원만이 아니다.

덜떨어진 놈 하나가 취기에 화살받이가 되었을 뿐 과분한 자리와 부귀영화를 탐내는 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김류는 문득 왕의 당부가 떠올랐다.

스스로 족쇄를 차지 않는다면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을 거라고.

차마 부정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와 동석한 측근들은 거머리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방패이기도 했다.

과연 이놈들을 모두 떨쳐 버리고서 단신으로 삭풍이 부는 조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불확신이 김류를 고민하게 했다.

그는 때때로 대사건을 충동적으로 일으키면서도, 그것을 홀로 감당할 재주는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

한참이나 손안의 술잔을 굴리며 원치 않게 내용물을 데운 김류가 목을 축였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였으나 언제 떠들썩했냐는 듯 사위는 고요했다.

김류는 저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신과 조직의 장단을 저울질하며 무엇이 더 이득이 되는지 속으로 계산하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같은 소인배들이니 알 수 있었다.

* * *

소인배들의 회합이 구밀복검口蜜腹劍으로 축약된다면 소인배가 아닌 자들의 만남은 구검口劍에 복밀腹蜜일 것이다.

때로 날카로운 말이 오갈지언정, 그조차도 서로를 위함일 테니까.

“붙들어놓고 신세 한탄할 사람이 나밖에 없나?”

김신국의 퉁명스러운 질문에 남이공이 악에 받쳐 말했다.

“자네가 거기서 한마디 없이 이놈 잘됐다, 가서 뒈져봐라,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저도 모르게 변무상사로 임명된 남이공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명나라가 해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것?

백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또 그런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게 신하된 자의 도리니까.

하지만 명나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뒈질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고작 앞바다의 섬으로 가는 와중에도 물고기 밥을 쏟아냈는데, 심지어는 그 바다를 관통해서 명나라까지 가라고?

입에서만 아니라 후장에서도 멀건 물고기 밥을 쏟아내게 되리라!

“아아악!”

남이공이 되살아난 악몽에 절규하자, 김신국이 타이르듯 말했다.

“이 사람이 거기서 한마디라도 했으면, 다른 사람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겠지.”

대안을 요구받았을 테니까.

그럼 지명된 이에게는 나가 뒈지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누가 되었을지 모를 그 사람이, 함께 죽다 살아난 죽마고우보다 소중한가?!”

“함께 죽다 살아난 죽마고우라면 이해할 줄 알았지.”

“제기, 이해는 무슨!”

남이공이 자신의 술상을 붙들고서 부드드 떨자, 김신국도 어디 한번 해보자는 듯 술상을 흔들었다.

뜨드드드!

그러자 남이공이 눈이 동그래져서는 따졌다.

“미친놈! 자넨 뭐가 당당해서 난리인가!”

“따지면 나도 할 말은 많지! 누구 덕분에 경회지에 빠졌는데!”

“대신 병조판서 됐잖아! 나는 이레나 사랑채보다 측간에 더 오래 있었는데!”

“누가 설사나 싸지르라던가?! 더러운 놈!”

“닥쳐라, 배은망덕한 종자야!”

두 늙은이는 각자의 술상을 요란하게 흔들며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었다.

분명, 말은 날카로울지언정 서로를 향한 따스한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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