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69화
매우 새삼스럽지만, 해적 소탕과 가도 정벌은 성공리에 완수됐다.
오죽하면 조정이 두 사안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접어버리고서 사신 보내는 것에만 신경 쓰고 있을까.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두 사안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시시때때로 어망에 유해와 백골이 걸려드는 해안가의 어민들이 그러했으며, 안주부의 북방군 주둔지 사정도 그러했다.
“음…….”
정충신이 눈 떴을 즈음.
그는 처음 기상했을 때보다 이불에 더 깊이 파고든 채였다.
도원수 장만은 다친 정충신의 서두른 복귀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관의 지위를 이용해 이레의 휴식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 날.
정충신은 손을 빼내 방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갈랐다.
살갗에 들러붙은 먼지가 허옇게 나풀거렸고, 분전 중 입은 상처 자리에는 투명하게 굳은 살이 번들거렸다.
허공에서 몇 번 주먹을 쥐었다가 편 정충신은 이불을 밀어내고 나와 앉았다.
그리고 얼굴을 쓸어내린 뒤, 으슬으슬한 추위가 감도는 밖으로 향했다.
* * *
정충신이 기상 직후 찾아간 곳은 주둔지 원수부였다.
그의 등장에 서리書吏 몇과 장부에 파묻힌 장만은 놀란 얼굴로 정충신을 마주했다. 그러나 충격도 잠시, 장만은 안색을 바꿔 불청객이라도 대하는 투로 말했다.
“부원수…….”
“예.”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내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아니면 그새 이레의 개념이 달라졌나?”
“소관이 하루 일찍 방문한 것입니다.”
“부원수께서는 나의 명령을 어기신 셈이로군.”
장만은 세필을 내려놓고서 위협적으로 말했다.
“군율을 물으시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상관을 농락하는 장수를 베어 일벌백계를 세우고 싶네만, 안타깝게도 부원수는 막대한 전공이 있으니 사사로이 참하기 어렵군.”
장만은 제가 진심으로 벌하고자 했겠냐는 듯 말을 마치고는 웃음기를 보였다.
“망극합니다.”
“상처는 다 나았나?”
“예.”
정충신의 단호한 대답에, 장만은 툭 던지듯이 말했다.
“어디 한번 뛰어보게.”
정충신은 따르지 못할 것도 없다는 듯, 두 팔을 허리춤까지 올린 채 제자리에서 뛰었다. 격한 움직임이라 여전히 환자였다면 어떻게든 티가 났겠지만, 장만은 매의 눈을 하고도 의아한 구석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만. 먼지 날리는군. 부원수께서는 정말로 상처가 다 나았거나, 아니면 고통을 내색하지 않는 방법을 아시는 모양일세.”
“전자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마다하지 않는 고생을 굳이 배려치 않겠다는 듯 장만은 안쪽의 자리를 가리켰다.
“와서 앉게. 마침 일손이 필요한 참이었는데, 부원수도 알아야 하는 것이네.”
“예.”
서리들이 눈치껏 엉덩이를 들어 틈바구니를 벌렸고, 정충신은 그런 틈을 비집고 들어앉았다.
그가 끼기 전에도 집무실은 짐과 사람으로 포화 상태였는데 사람 하나가 더 끼어드니 화로를 놓지 않아도 후끈했다.
“이것부터 확인하게.”
정충신이 문서를 받아들자 장만은 쭈글쭈글한 손끝으로 내용을 훑었다.
“부원수께서 지휘한 부대는 모두 해체되었네. 재편하는 것보다 남은 인력을 분산하는 게 훨씬 쉬워서 말이야.”
“보졸로 편입되는 겁니까?”
“아니! 병사들이 세운 공로가 얼마나 많은데 말단 보졸이나 시키겠나?”
장만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서 새로운 문서를 쥐여주었다.
“훈공의 차등에 따라 무직에 제수하거나 소부대 지휘관으로 임명했네. 다들 실전 경험이 확실하고 전의도 두터운데 썩힐 수는 없지.”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가까운 시일에 병조에서 발송한 교첩敎牒이 도착할 걸세. 부원수께서 직접 나누어주면 많이들 좋아할 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부원수가 좋아할 만한 선물이 있지.”
장만이 새로운 문서를 건네자 그것을 함께 받아든 정충신은 슬슬 손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한 번 정충신의 시선보다 장만의 쭈글쭈글한 손가락 끝이 내용을 앞질렀고, 중간 즈음에 멈췄다.
“가도를 평정한 뒤 회수한 전리품 내역일세. 이게 뭔지 알겠나?”
“홍이포紅夷砲라……. 처음 들어 봅니다.”
붉은 오랑캐의 대포라니. 이름만 들어서는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건 무엇입니까?”
“대포의 일종인데, 음. 자고로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지? 여기로 옮겨두었으니 직접 보게. 깜짝 놀랄 거야.”
장만은 깜짝 놀란 정충신의 얼굴이 벌써 보이는 듯해 웃었다.
홍이포는 포신 길이만 해도 사람의 키를 훨씬 능가했다. 방포한다면 포탄이 과연 어디까지 날아갈 것인가? 절대로 지척은 아닐 터였다.
가도를 포위했을 당시 소극적인 적의 모습에 기고만장해 상륙전이라도 펼쳤다면 지금쯤 고기밥으로 전락한 건 해적들이 아니겠지.
장만의 홍이포에 대한 첫인상은 짧지 않은 생애에 이처럼 흉악한 물건은 처음 본다, 였다.
하나, 그 흉악한 물건이 이쪽이 아닌 국경 너머를 향한다면 그보다 든든한 무기도 없을 터.
마침 병조에서도 새로운 전리품에 대한 평가를 받아들고서 ‘그 홍이포’ 한 문을 보내달라 요청한 참이었다. 만일 홍이포의 복제가 가능하다면 국경은 더없이 탄탄해지겠지.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지금은 그저 이름밖에 알지 못하는 정충신의 말에, 장만은 여유롭게 답했다.
“부원수께서도 실물을 보고 나면 홍이포 세 글자를 되뇔 때마다 기분이 좋아질 걸세.”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래, 확인해 보게.”
장만은 홍이포 이야기는 이쯤 하면 되었다는 듯, 정충신이 눈치껏 벌린 엄지 사이로 새로운 문서를 끼워넣었다.
“이건 무슨 내용이냐면…….”
* * *
장만의 몇 가지 서류작업을 돕고 일어선 정충신은, 뒤에서 들려온 당부에 곧장 무기고로 향했다.
그는 도원수가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다. 화포의 전략적인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북방군은 조총이라는 신식 무기로 대거 무장했지 않은가?
진부한 무기인 대포에 별종이 있다고 새삼스레 충격받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이게 홍이포라고?”
정충신은 눈이 동그랗게 되어 엉거주춤하게 섰다.
그도 그럴 게, 웬 시커먼 쇳덩이가 창고 하나를 혼자서 차지하고 있지 않겠는가?
밤중에 보았다면 육중한 거체와 번들거리는 표면에 괴물로 오해하고도 남았으리라.
……아니, 백주에 뻔히 대포의 형상을 눈에 담고 있어도 이 홍이포라는 물건은 반쯤 괴물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마, 만져보아도 되겠는가?”
정충신이 마음과 마찬가지로 두 팔을 앞세운 채 엉거주춤하게 서서 묻자 군관이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영감께서 소관에게 허락 맡으실 필요는 없지요.”
“아……. 아. 그렇지. 크흠!”
정충신은 삐죽 흘러나온 콧물을 소매로 쓱, 닦아내고는 홍이포의 시커먼 거체를 매만졌다.
고작 손끝으로 쓸어내릴 뿐임에도 홍이포의 육중함과 무게감이 온전히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들어본 적 없는 홍이포의 포성이 어째서인지 귓가에 아른거렸다.
“이거……. 이 사람이 쉬는 와중에도 포성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실 성능은 계측해 보았나?”
“아직입니다.”
대답은 부정적이었으나 정충신은 내심 들떴다. 정신을 잃고 있을 잠깐 사이 지상 최대로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쳤다는 재앙은 면했으니까.
“왜? 일정은 잡혀 있나?”
“아닙니다. 시험사격 해보자는 말은 많았지만, 도원수께서 백성과 가축이 놀랄 수 있다고 만류하셨습니다. 부원수께서도 요양하고 계셨고요.”
“뭐, 나는 정신도 차렸고 푹 쉬었으니까…….”
이제는 슬슬 갈겨보아도 되지 않겠냐는 소리였다.
“도원수께 건의해 보시지요.”
군관의 제안에 정충신은 장만의 호들갑이 떠올랐다. 과연 직접 실물을 보니, 그 정도 반응이 나오는 게 정상이었다.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과연 홍이포 세 글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입의 가장자리가 달싹였다.
“……그래야지.”
정충신은 대포라고 다 똑같은 대포는 아니라는 깨달음과 함께, 짧은 식견으로 상관을 내심 농락했다는 게 부끄러워졌다.
“도원수께 말씀드려 보겠네.”
“예.”
군관은 수긍과 함께 웃었다.
“역시, 부원수께서도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서, 누군들 이 같은 무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나?”
이처럼 흥분하는 것도 매우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홍이포는 수효가 매우 적고 복제의 가능성은 불분명하니, 반드시 철저하게 관리하여 싸우기도 전에 쓰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엄금하여야 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미 도원수 대감의 명령으로 특별 관리 중입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 크흠!”
정충신은 잠깐 사이 품위를 너무 잃어버린 게 아닌가, 후회했지만 한눈에 다 담기지도 않는 홍이포의 거체를 앞두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군관도 군인이라면 이해하겠지.
* * *
한양, 경운궁에서.
“전하.”
집무실을 방문한 이덕형이 허리를 숙였다.
그가 맡은 도승지는 왕의 후설喉舌, 목구멍과 혀라고 하여 나와 업무상 엮이는 일이 많지만 자주 보는 건 아니었다.
궁궐과 승정원을 오가는 승전색承傳色이 따로 있는 탓이다.
그러니,
“도승지께서 면대를 청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는데, 특별한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이덕형은 가타부타 없이 품에서 책을 꺼내 바쳤다.
표지는 백지였으나, 펼쳐서 보니 물목과 수효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장부로군요.”
“예. 북방군이 가도에서 거둔 전리품을 취합해 만든 장부이옵니다.”
“내가 세목을 알아둘 필요는 있겠군요.”
못된 녀석들이 전리품을 빼돌리고서 모른 척할 수 있으니.
“한데, 이 장부 하나 때문에 도승지가 나를 찾아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내게 전달되어서 나쁠 건 없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보고체계를 무시하고서 직접 가져다줄 정도인가?
그래야만 할 정도로 나는 휘하 신하들을 불신하지 않는다.
이덕형 역시, 폐조 때에도 도승지를 지내오며 판윤 등과 서먹하게 지내지만 다른 신하들의 충성심을 의심하지는 않을 테고.
“안정眼精이 이토록 밝고 날카로우니 신이 무엇인들 숨기겠사옵니까. 다만 염려하는 마음만 있을 뿐이옵니다.”
염려할 거리라.
얼마나 대단한 소식이기에 이렇게 겁부터 주는 거지?
“말씀하세요.”
바짝 긴장한 채 준비되었다고 말하니, 이덕형도 역력히 긴장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막 도착한 강화부사 이중로의 장계에 따르면, 폐세자 이지가 배소에서 땅굴을 파 도망치다가 붙잡혔다고 하옵니다.”
이번에도 폐세자는 무모한 짓을 저질렀나.
원래 역사에서 사건이 발생한 5월에는 잠잠했던 탓에, 흐름이 달라진 줄 알았다.
하지만 폐세자는 인내심이 늦게 바닥났을 뿐 탈옥의 야망은 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강화부사는 폐세자와 폐빈, 배소를 지키던 별장과 함께 안치된 종들을 즉각 수감하였으며, 어명을 기다리겠다고 하였사옵니다.”
이덕형이 이처럼 중대한 소식을 직접 찾아와 전한 이유는 그가 반정 첫날 보인 패기의 이유와 같다.
폐세자 이지는 살아 있는 내란의 씨앗.
왕위를 정당하게 승계했으나 반란으로 쫓겨난 자의 후계이니, 조정에 반대하는 무리에게는 최적의 추대 대상이다.
한데, 이 폐세자가 배소를 벗어나 음지로 숨어들고자 했다. 만약 그 끝에 불충한 무리가 기다리고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더욱이 나는 군적을 갱신하고 선혜법을 확대하는 동안 이 나라에 두고두고 걸림돌이 될 무리가 존재함을 깨달았다.
달라진 역사에서도 이중로가 방심하지 않고 폐세자의 도주를 잡아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가정은 가정만으로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가정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방법은 쉽고 단순하다.
그래서 이덕형이 찾아온 것이다.
반정을 일으켜 조정을 장악한 서인들이 이 소식을 알게 되면, 그들은 다른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