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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70화 (70/380)

인조, 명군이 되다 70화

“도승지의 염려는 잘 알겠습니다.”

이미 분에 넘치는 성은을 입어 죄 많은 일신을 부지한 폐주의 일가다. 두 번 기회가 주어지리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니 폐세자가 죽는 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폐세자의 우행으로 함께 죽게 된 폐주는 무슨 잘못인가.

따지자면 폐주로서는 억울한 처사였다. 패륜아 때문에 패륜을 당해놓고도 죽게 될 판이었으니까. 설마 폐세자라고 제가 몸을 내빼어 도망치면 덩그러니 남을 부친이 어찌 될지 몰랐겠는가?

일이 이렇게 돌아가니 어처구니없게 된 건 이덕형이었다.

반정이 있던 날 죽음을 무릅쓰고 옛 주인을 구명해 놨더니, 서인도 금상도 아닌 불효자식이 제 아비를 죽이려 들었으니까.

정녕 그리된다면 세인들이 이덕형의 희생을 얼마나 우습게 여길 것인가.

“한데, 누가 폐세자를 등 떠밀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누구도 닦달하지 않았다. 위리안치로 구속되었으니 운신이 불편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유 없이 그리된 것이 아니잖은가? 본디 반정이 일어난 날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사람들이다.

이에 이덕형은 난처한 투로 말했다.

“폐세자의 의려가 깊었다면 어찌 무모하게 탈출을 도모했겠사옵니까? 아이가 무지몽매하여 벌인 일에 극형을 내리지 않듯, 성상께서는 관대함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참으로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믿는 가치는 이렇게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자 하니, 어쩌면 나도 티 나지 않게 덕을 본 적도 있을 거다. 그의 충성이 오롯이 폐주에게만 향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러니 내가 폐세자를 살리게 된다면 이유는 오직 이덕형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다.

하지만…….

“내가 자비를 베풀고자 하여도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은 하나 된 목소리를 낼 테고, 거기에 반발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서인들의 세력이 다수의 김류파와 소수의 이귀파로 양분되었다 한들 이 문제에서는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고, 여기에 북인은 맞서지 못한다.

내게 의지해 어영부영 존재하는 그들이 하루아침에 단합하여 서인에게 맞선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거니와, 폐주나 폐세자의 안위에 대해서는 더더욱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으니까.

‘여차하면 제때 죽지 않은 폐주의 충신으로 몰려 삼대가 멸족될 수 있으니.’

나아가 한 집안만이 아니라 잔존 북인 세력 전체를 향한 2차 숙청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죽고 싶으면 대들보에 목이나 메고 말지, 가문과 옛 당여들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가벼이 입을 놀려 옥사를 일으킬 텐가. 오히려 누가 입을 잘못 벙긋하는 순간 다른 북인들이 파묻어 버릴 터다.

그러니 이번 사건에서만은 서인들이 무소불위였다.

“전하께서 관대하고 인후한 천품을 베푸시겠다면, 어찌 신하들이 부득불 정형正刑을 청하겠사옵니까?”

“도승지는 너무 속 편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하자고 하여서 다 된다면, 애초에 그간의 근심이 있었겠습니까?”

“오늘날처럼 인군의 위명이 높았던 적도 없사옵니다.”

“일단은 그렇지요, 일단은.”

모문룡과 그의 패거리에 소탕되며 여러 사람 목구멍에 걸린 가시가 쑥 내려간 덕이다.

대국 앞에서 백성의 안위야 나 몰라라 하던 나라가 칼을 뽑아 도적을 단죄하고 화근까지 짓밟았으니 싫어할 사람은 많지 않지.

문제는 다음 일을 생각해야 하는 조정이었다.

가도의 정벌을 명할 때만 해도 문무백관과 식자들 사이에서는 찬반의 여론이 치열하게 갈렸다.

모문룡이 하루 이틀 해악을 끼친 게 아닌 탓에 어쩔 수 없다든지, 오히려 잘 되었다는 긍정론도 있었으나 명나라와 전쟁이라도 하자는 거냐, 이러다 나라 망한다던 반대도 극렬했으니까.

그러나 가도 정벌은 대승과 함께 성공으로 귀결되었고, 또 결정적으로는 이미 벌어진 일인지라 반대하는 여론은 크게 잠잠해졌다.

“하지만 명나라와의 외교 마찰이 걱정된다는 우려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무의미해진 반대 여론이야 사그라들었지, 발언자들은 여전히 조정에 남아 있고 그들은 근심 가득한 눈빛으로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만약 남이공이 좋은 소식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이들은 백방 ‘거봐’로 시작하며 불평을 끊임없이 이어가리라.

만약 명나라가 말만이 아니라 유의미한 제재라도 가한다면 불평 역시 말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신하들의 목소리를 꺾고 폐세자를 살린다면 과연 중외의 사람들이 내게 관대하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독선적이라고 하겠습니까?”

가도 정벌 때 내지른 말이 있어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다.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래 목숨 거두는 일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만을 두어 집행하셨으니 종사와 민생이 오늘날같이 안정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

“목숨을 거두는 일은 쉽고 간단하지만, 죽이고 난 뒤에는 다시 소생시킬 수 없으며, 폐세자가 죽어 마땅한 우행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그렇기에 살려내는 데 의의가 있사옵니다.”

살려내는 데 의의는 몰라도 열의가 있다는 건 알겠다. 그러나 이덕형의 발언이 폐세자를 살려둘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매사는 대체로 처음이 어려우며, 나는 폐세자가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걸 감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내가 폐세자를 살려야 할 이유로는 오직 도승지가 원한다는 것 이외에는 공감하기 힘들군요.”

“……!”

이덕형에게는 의외의 발언이었는지, 그는 숨을 들이켜면서 허리 숙였다.

“도승지가 폐세자의 생존을 바란다니 진지하게 검토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확답을 줄 수는 없어요.”

“……망극하옵니다.”

이덕형은 슬쩍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쳤고, 고개를 끄덕여 주자 뒷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남은 건 그가 전해주고 간 장부뿐. 표지에는 제목도 없이, 종이와 실 모두 새것이어서 누군가가 직접 필사하고 제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승정원에서 이런 일을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도승지 혼자서 해낸 걸까?

그가 장부를 직접 가져온 의의를 생각해 본다면,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혼자서 해냈을 공산이 컸다. 폐세자를 살리기 위해 잘 보이겠다고 한 고생이 아니라는 뜻이다.

마침 가져온 데는 그런 의도도 없잖아 있겠으나, 단지 시의적절하였을 뿐.

“건실한 신하의 염원을 들어줘야 하나, 아니면 불화의 씨앗을 없애 버려야 하나?”

왜 왕이 간신을 가까이하기 쉬운지 깨달았다.

간신은 욕망에 충실하여 그저 돈과 권력이면 만족하고 알아서 누리는데, 그렇지 않은 신하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른 까다로운 소망을 들어주어야 하니까.

오리지널 인조는 이런 소망을 들어줄 능력이 없었기에 김자점 같은 간신배를 가까이했다.

‘어라……?’

그럼 내가 이걸 안 들어주면 인조 같은 무능한 군주가 되는 건가?

* * *

이덕형의 마음을 얻는 것과 불화의 씨앗을 없애는 것, 두 가지만 저울에 올렸을 때는 결정하기 힘들었는데 내 자존심이 더해지니 결정이 쉬웠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는데 인조랑 비교되는 건 못 참지.

과장 조금 보태서 나는 내가 인조처럼 눈 두 개에 콧구멍 두 개인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나씩 더 달렸으면 차별점도 생기고 얼마나 좋아?

그래서 이곳에 왔다.

석어당.

나를 증명할 곳이다.

“이리 오너라!”

부름과 함께 궁녀들이 몰려왔으나 나는 기다리지 않고 솟을대문을 넘었다.

이리 오라던 사람이 직접 이리로 오니 궁녀들은 모이던 자세 그대로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

“대비께서는 안에 계신가?”

“예에…….”

나는 시간 정지 능력자가 된 기분으로 어정쩡하게 선 궁녀들 사이를 헤치며 석어당에 들어섰다.

그리고 익숙한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왕대비의 침소.

“저 왔습니다, 어머니!”

문을 좌우로 밀어내고서 침소에 들어서니, 한창 바느질 중이던 대비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손을 휘저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동이요?!”

나는 스르륵 문 닫히는 소리를 뒤로하고서 대비에게 나아갔다.

“대비마마시야말로 어울리지 않게 무슨 바느질이십니까?”

“공주가 회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를 감쌀 강보에 직접 수 놓는 중이요. 소식을 듣지 못하셨소?”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적당히 둘러대니 대비는 인상을 찌푸린 그대로 손끝을 닦아내며 말했다.

“소식이 아니 전해졌을 리는 없으니, 주상께서도 아니 들으셨을 리 없소. 그냥 다른 귀로 흘리신 것이지.”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랬다면, 저는 분명 속으로 축하드렸을 겁니다.”

아마도.

“이번에도 번거롭게 직접 찾아오는 대신 가슴에 손을 얹고 속으로 말씀하지 그러셨소?”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반년 괴롭히니까 대비도 말재주가 늘었다.

부디 대해 같은 나의 인품도 배웠으면 좋으련만.

자화자찬이 아니라 좌의정 박홍구가 공인한 바다.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대비는 어느새 손주를 위한 강보로 시선을 돌린 채 건성으로 답했다.

“무슨 소식 말이오?”

“폐세자가 배소에서 탈주했다지 않겠습니까?”

“악!”

대비는 내가 침소에 들어왔을 때처럼 손을 털어내더니, 노려보던 바늘을 바늘꽂이에 밀어놓고서 말했다.

이제야 이쪽을 봐주는군.

“폐세자가 탈주를 했다고요?!”

“쉿. 아직 중외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러자 대비가 언성을 낮춘 채로 채근했다.

“상세히 말씀해 보세요!”

“폐세자가 탈주한 건 맞으나, 다행히 강화부사가 놓치지 않고 잡아들였다고 합니다.”

한 번 들었다가 내려놓으니 대비가 안도와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천만다행이구려! 역괴의 아들이 살아서 사라졌다면 낭패가 벌어졌을 거요.”

“무지몽매한 짓이지요.”

“허어, 나도 폐세자가 생각이 없다는 건 잘 알겠소! 죽기를 바라는 게 아닌 한에야 어찌 그 같은 만행을 저지른단 말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얌전히 좀 있지, 괜히 여러 사람의 속을 긁어서…….

강화부사 이중로는 폐주와 폐세자 부자에게 가급적 잘 대해주려는 자이니 그를 기겁하게 만든 건 은인과 아버지를 동시에 배신한 것이다.

거기에 본인과 부친을 구명하고자 애쓴 도승지 이덕형을 노심초사하게 만들었고, 결정적으로 나를 고민하게 만든 데다 자존심까지 시험하게 되었으므로 아주 괘씸했다.

“이참에 역괴와 그의 자식까지 완전히 제거하여 분란의 화근을 철저하게 삭초제근함이 옳겠소.”

확신을 갖고 말하는 대비의 눈빛이 마치 소싯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대비께서 반년 젊어지신 듯하여 제가 다 기분 좋습니다.”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이오.”

“그만하면 장작도 더 남아 있지 않을 텐데요?”

“주상이 방금 새로 넣어주지 않았소?”

“이런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더라, 하고 웃고 넘기실 이야기를 아궁이에 처넣으신 건 제가 아니라 대비마마십니다.”

“폐세자가 감히 도망치려 한 것이 어찌 재미있는 일화란 말이요?!”

대비의 언성이 왁, 올라가서 나는 손바닥을 보였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폐세자를 벌주고 싶습니다. 눈엣가시 같은 사람이 왜 조용히 살지 않고 자꾸 눈에 들어오냐 이 말이지요.”

“내 심정이 그렇소!”

“한데 그렇다고 막 죽여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두 부자는 지금까지 살려준 것만 해도 과분한 처사였소. 한데 탈주 따위의 난행을 도모하다니!”

나는 재차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흥분, 멈춰!

이덕형의 염원을 들어줄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대비를 설득하는 것.

광해군과 폐세자에 대한 적개심이 누구보다 강한 대비를 설득해내면, 그녀의 용서와 자비를 앞세워 신하들을 압박할 수 있다.

왕실의 어른이자 폐주의 최대 피해자인 대비마마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는데 제삼자들이 무슨 간섭이냐고 말이다.

그런데 대비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녀는 폐세자 소식을 듣기 무섭게 반정이 벌어졌던 날로 돌아갔고, 그동안 화가 누그러진 줄 알았더니만 아주 이참에 죽여 버리자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반년 전의 양어머니 훈련사로 돌아가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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