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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71화 (71/380)

인조, 명군이 되다 71화

“대비께서 폐세자의 죽음을 바라신다니, 놀랍습니다.”

대비는 무슨 가당찮은 말이냐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역괴를 일생의 원수로 삼았음은 온 천하가 알 거늘, 어찌 역괴의 자식에게 원한이 없겠소?”

“대비께서 폐주를 혐오하신다는 건 잘 알지요…….”

“한데 어찌하여 뻔한 소리를 하시오?”

“본디 만물이 창생하는 봄과 여름에는 생명을 죽이지 않습니다.”

대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은 겨울이요, 주상. 내가 늘그막에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면야.”

젊은 사람이 계절 분간도 못 하냐는 빈정에 나는 시선을 내렸다.

대비의 무릎에는 손주를 위한 강보가 걸쳐져 있었다. 침방 나인들을 다 제쳐두고 바늘에 찔려가며 직접 수 놓던 강보다.

“지금은 겨울이지만, 이 순간에도 생명은 태어나고 있습니다.”

대비 역시 뒤늦게 무릎에 놓인 강보를 의식했다.

“창생의 계절에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이유는 순리에 맞지 않기도 하거니와, 새로 태어나는 생명이 부정 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주상께서는 나를 협박하시는 게요?”

“협박이라니요. 저를 어떻게 보시는 겁니까?”

“내가 따르지 않으면 공주의 소생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소.”

“너무하십니다…….”

나와 대비가 서로 첫인상이 안 좋기는 했지만, 반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나쁜 사람 취급하는 건 심하잖아.

“그동안 제가 대비와 공주의 행복을 위해서 얼마나 힘을 썼는데요?”

당장 공주만 해도, 서로 마음 맞는 인연을 만나서 잘 살잖아?

그 증거가 여전히 대비의 무릎 위에 있다.

“저번에는 대비마마의 부탁으로 나들이에 공주와 부마도 함께하지 않았습니까.”

“……음.”

“저는 이렇게까지 대비와 공주가 행복하도록 헌신했는데, 아직도 나쁜 놈처럼 보인단 말입니까?”

대비는 할 말이 궁했는지 반박하지 않았다.

그래, 내가 초반에는 많이 윽박지르긴 했는데 그거야 지금처럼 두터운 우정을 쌓지 않아서 그렇지.

내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데?

“그럼 왜 공주의 소생이 부정을 탈 수 있다는 흉흉한 소리를 했단 말이오?”

“그거야 문지방 밟으면 부정 탄다는 소리랑 똑같지요!”

진짜 내가 공주네 쳐들어가서 불이라도 지를 줄 알았나……?

“저라고 폐세자에게 대단한 호감이라도 있어서 죽이지 말자고 하는 게 아닙니다.”

“허면, 왜 내게 도움을 청한단 말이오?”

“자존심이 걸린 일입니다.”

솔직한 대답에 대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존심?”

“절의가 곧은 신하는 돈과 권력만으로는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곤란하고 억지스러운 부탁을 해오지요.”

“폐세자의 생존을 바라는 자가 있나 보오.”

“그렇습니다.”

“누구요?”

대비는 은근히 떠보지도 않고 대놓고 물어보았다.

이걸 말해주어야 하나.

광해군을 향한 대비의 악감정이 자식인 폐세자에게까지 쏟아지는 상황이라 도승지에게 곤란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그렇다고 매몰차게 못 알려주겠다고 선을 그을 상황도 아니어서 고민하니 대비가 말했다.

“내게 도움은 청하지만, 자세한 사정은 밝히지 못하겠다는 거요?”

“대비께서 저를 입이 싼 사람으로 만들까 봐 걱정되어서 그렇지요.”

“허!”

“자신이 맡은 일은 군말 없이 잘 해내는 사람입니다. 귀찮을지라도 은근슬쩍 편의도 봐주고요.”

전리품 장부를 직접 만들어서 줄 정도이니.

아주 가상한 사람이지.

원래 묵묵하게 자기 일 해내는 사람이 진짜 능력 있고, 헌신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내가 험담이라도 퍼뜨릴까 두렵다는 말이오?”

“아무튼, 왕이 괜찮은 신하를 계속 부리려면 이런저런 부탁도 들어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삼천포로 가던 화제를 원래대로 돌려놓자 대비는 팔짱을 꼈다.

“이유라도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어디입니까? 그 갖은 배려에도 갓난아기 해 입힐 말종으로 보셨으면서!”

“……크음.”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돈과 권력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을 사야 합니다. 폐세자를 살려두는 건 그 대가에요. 몹쓸 짓 하려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게 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이다, 호소하니 대비도 한발 물러섰다.

“그건 알겠소.”

“폐주를 향한 대비마마의 원한이야, 말씀해 주셨다시피 누가 모르겠습니까? 잘 알지요. 하지만 이건 복수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원수를 처단하는 것이 방법이 아니라면, 무엇이 방법이란 말이요?”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으음…….”

대비가 내 말을 부정했다면 설득이 어려워질 뻔했는데, 고민이라도 해주니 다행이었다.

“죽음으로 복수하는 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줄 자신이 없을 때나 하는 겁니다. 하지만 자신이 있다면, 두고두고 배를 아프게 만들어야지요!”

“…….”

“일생의 원수에게 한순간의 고통만 주고 편하게 만들어주실 겁니까? 대비께서 갇혀 지내신 만큼은 가둬놓고서, 두고두고 복수하겠다는 생각은 아니 드세요?”

기관총 갈기듯이 우다다 쏟아내니 대비가 질렸다는 얼굴로 답했다.

“알았소, 알았소! 주상이 폐세자를 살리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오.”

대비는 나의 억지를 마지못해서 들어준다는 투였지만, 그 너머에서는 광해군을 향한 원한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반년 전이였다면 대비는 절대 이 호기를 놓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오늘날의 대비는 원한에만 갇혀 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

한양으로 돌아온 노모 광산부부인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하루걸러 불러대었던 공주가 회임하자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

구중궁궐의 삶이라는 게 매일 신나지는 않겠으나, 무료함에 질리기에는 손주를 위한 강보 수놓기만으로도 바쁘다.

예전처럼 독기만을 응축하면서 살기에는 너무 아까운 삶이지.

“매우,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신경 쓴 게 헛짓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주었으니.

대비는 마냥 자신이 양보해 준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사선으로 돌린 채 말했다.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복수가 될 거라는 말을 믿어서요. 그러니 주상께서는 스스로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아시리라 믿소.”

“여부야 있겠습니까?”

특별히 더 해줄 것도 없다.

대비는 이미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해묵은 원한을 이처럼 누그러뜨리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나는 대비의 행복한 삶에 굳이 훼방 놓을 생각이 없다.

“조만간 신하들이 대비께 의향을 물어올 겁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고개를 끄덕이니, 대비는 할 말 다 했냐는 듯 자신의 반짇고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대비가 한창 바쁘던 차에 쳐들어온 불청객이었다.

“골무를 보내드릴까요?”

“아니요. 그럴 필요 없소. 주상께서 방문하시기 전까지는 바늘에 찔린 적 없으니.”

내가 양어머니 가슴에 대못은 못 박아도 손끝에 바늘은 박았군.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시오.”

언제 언쟁이 오갔냐는 듯 대비는 바늘꽂이에서 바늘을 뽑아 들었고, 나는 고개를 까딱인 뒤 침소를 빠져나갔다.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호들갑이 필요할 정도로 먼 사이는 아니었으므로.

* * *

폐세자의 탈출 사건이 알려지자 신하들은 즉각 예상대로의 반응을 쏟아냈다.

“폐세자의 존재는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이옵니다. 반정이 있던 날 못다 한 처벌을 집행하시옵소서!”

병조참의 이귀가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은 채 외쳤으며…….

“지난날 폐세자의 목숨을 살려준 것은 전적으로 전하께서 과분한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인데, 죄인은 이를 망각하고서 탈주를 기도하였으니 죄상이 매우 괘씸합니다.”

이조참의 김류 역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 분명하게 의견을 밝혔다.

서인 측 거두들의 공통된 의견에 두 사람을 따르는 당여들 역시 하나 된 목소리를 냈다.

“죄인을 참하소서!”

“이 일을 가벼이 다스리신다면, 불충한 자들도 저들이 용서받으리라 믿고 기세등등해질 것이옵니다!”

“그러하옵니다! 단호하게 일벌백계를 다스리시옵소서!”

조정의 절반이 얼굴을 붉힌 채 언성을 높이는 동안, 그들과 당색이 다른 나머지 절반은 고개만 숙인 채 전전긍긍할 따름이었다.

그런 소극적인 모습에 이귀는 삿대질까지 하며 따졌다.

“영상께서는 어찌하여 한 말씀도 아니 하십니까?!”

“이 사람은 주상 전하의 의향을 따를 뿐이네.”

“대감께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자리에 올라 폐세자의 불궤를 듣고 한다는 게, 고작 입을 닫는 것뿐입니까?”

“중대한 일이니만큼…….”

“중대한 일일수록 소신을 밝히셔야지요!”

이귀의 호통에 침묵하던 여러 대신이 똥이라도 밟았다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이내 그들 역시 이귀의 표적이 되었다.

“어째서 삼공三公 중에 단 한 사람도 충의를 드러내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까? 혹, 대감들께서는 전하의 과분한 인사에도 폐세자와 꿍꿍이라도 꾸미셨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좌의정 박홍구가 발작하듯 반응했고, 이어서 우의정 조정 역시 다급하게 외쳤다.

“음해는 멈추시게! 이 사람이 목숨을 구명한 건 오롯이 성상의 은혜 덕택이거늘, 어찌 그 같은 망언을 일삼는가!”

박홍구와 조정은 대북의 중진이었기에, 더욱 필사적으로 해명할 수밖에 없었다.

“하면, 어찌하여 두 분께서는 폐세자의 엄벌을 청하지 않고 가만히 계십니까? 그러니 이 사람의 오해가 깊어질 수밖에 없지요!”

이귀의 일갈에 북인 인사들은 곤혹스러워할 따름이었다.

왕의 의향이 분명하지 않은 이 시점에서, 오해를 벗기 위해 서인과 목소리를 합치는 건 위험했으니까.

만약 왕의 의견이 서인들과 다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잔존 북인들을 살려주고, 또 여전히 살려두는 건 서인들이 아니라 왕이었다.

‘다행히 처신을 잘못하는 사람은 없네.’

만약 누군가가 당장의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여기 붙고, 저기 붙는 식으로 생존을 도모했다면 내쳐 버렸으리라.

누가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지 망각했다는 뜻이니까.

‘검증은 이만하면 됐겠지.’

이귀가 계속해서 북인들을 겁주고 있었다.

이에 북인들이 나의 눈치를 보는 지금, 제때 끼어들지 않으면 나의 뜻을 지레짐작하여 서인들의 의견에 찬동할지도 몰랐다.

나와 신하들 사이에 낀 채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는 도승지도 눈에 들어왔고.

“그만!”

단호한 호령에 삼의정과 북인들을 타박하던 이귀가 입술을 말았고, 제신의 시선이 용상으로 향했다.

“대비마마께서 이미 마음을 굳히셨으니 나는 따를 뿐입니다.”

좌중이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영의정 이원익이 말했다.

“대비께서는 폐주에 의해 가장 부당한 처사를 당하셨으니, 이처럼 폐주와 그 자식의 처분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과연 대비의 의향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이에 박홍구와 조정이 찬동했다.

“그러하옵니다. 신하들이 아무리 왈가왈부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사옵니까?”

“대비께서 폐주를 용서하였든, 그렇지 않았든 바라시는 바가 있다면 그 뜻을 따르는 것이 국모와 왕실의 어른을 존중하는 방편일 것입니다.”

다들 눈치가 빨랐다.

이에 가타부타 없이 대비의 의향, 이라는 막연한 표현으로 혼란스러워하던 신하들도 상황을 가늠하고서 당황했다.

이 흐름은 대비가 폐주와 그의 자식을 용서해야만 가능했으니까.

반년 전의 대비를 기억하는 신하들로서는 믿기 어렵겠지. 도승지 이덕형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이쪽을 보는 게, 그도 이런 전개는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대비마마께서는 폐세자의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아래에서 처벌을 논의하세요.”

신하들은 당혹감과 반신반의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귀는 벼락이라도 맞은 안색으로 입을 반쯤 벌린 것이, 무언으로 진실을 추궁하는 듯했다.

그게 사실이냐고.

사실이지, 암.

어전의 흐름이 급변하며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로 소란스러워지자 영의정 이원익이 건의했다.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당장은 하나로 모으기 힘드니, 폐세자의 처벌은 차후 논의하여 올리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렇게 하세요.”

날치기로 폐세자 건을 넘겨버린 이원익은 소란이 이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듯 곧장 다음 화제를 꺼냈다.

“그리고 병조에서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물론, 나는 기꺼이 받아주었다.

“병조판서?”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받게 된 병조판서 김신국은 딸꾹질과 함께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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