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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72화 (72/380)

인조, 명군이 되다 72화

한양의 성곽 밖 성저십리城底十里에서.

보통은 무기를 시험하기 위해 왕이 궁궐까지 나서는 경우는 잘 없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가도에 잔존한 해적들까지 말끔하게 토벌한 북방군은 모문룡과 그의 수하들이 배에 채 싣지 못한 나머지 전리품도 수거했고, 개중에는 말만으로 믿기 어려운 신무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야 이게 어떤 무기인지 잘 알지만.’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처음인 대신들은 마냥 놀라울 수밖에 없다.

“정녕 이 같은 화포가 가도에 있었다는 말이오?”

무인 출신인 형조판서 이서는 체통도 잊은 채 직접 대포를 매만졌다.

“홍이포라고 합니다. 먼바다에서 온 붉은 머리칼의 오랑캐紅毛夷들이 사용했던 대포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병조판서 김신국의 설명에 이서는 대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말했다.

“용케도 이런 무기를 숨겨놓고 있었구려. 일전에 문안사가 다녀왔을 때는 일언반구도 없지 않았소이까?”

“수감된 해적들 말로는 후금이 쳐들어왔을 때 아조에 지원할 예정이었다는데 믿지 못할 말이지요.”

“해적들 주둥아리에서 나온 말은 믿지 못하겠지만, 놈들이 꿍쳐두고 있었던 이 홍이포라는 물건이 범상치 않다는 건 잘 알겠소.”

이서는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보는 건 이만하면 됐다는 듯 기대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체하지 말고 방포해 봅시다.”

모두가 기다렸던 명령에 김신국은 군관들을 돌아보았다.

홍이포 방포에 필요한 절차와 장약량은 가둬놓은 모문룡의 떨거지들에게서 알아냈다. 달리 신경 써야 할 게 있다면, 조선의 화약은 가공되어서 성능이 진일보했다는 점뿐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화약은 그동안 써온 것과는 화력이 다르니, 정량보다 적게 넣어야 합니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먼저 털 뭉치 달린 장대가 포신 내부를 닦아내고, 이어서 가공된 화약이 담긴 자루와 주먹만 한 포탄이 포구로 들어갔다. 대포의 크기도 크기였으나 들어가는 화약의 양이 제법 살벌했으므로 신하들에게 경고했다.

“다들 귀를 막는 게 좋겠습니다.”

신하들은 사양하지 않고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 실눈을 떴다.

방포 준비가 끝나자 군관이 한쪽 귀를 막은 채 신호를 보냈고, 김신국은 이쪽을 확인한 뒤 끄덕였다. 그리고 군관이 불붙은 심지를 화문에 가져가는 순간…….

콰앙!

포성과 함께 초연이 일대를 뒤덮었다.

박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몇몇 신하들은 휘청거릴 정도였고, 나 역시 진동이 여전히 느껴지는 듯했다.

“어디까지 날아갔는지 확인하게!”

김신국이 코맹맹이 소리로 외쳤다. 나, 아니면 그의 고막 둘 중 하나는 맛이 간 모양이군.

마냥 남 일은 아닐 텐데 정작 신하들의 얼굴은 밝았다. 특히 홍이포에 관심을 보인 이서가 그러했다.

“전하! 홍이포의 성능이 완전히 확인된 건 아니나, 포성만 들어도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사옵니다.”

이서의 목소리 역시 코맹맹이 같은 게, 이상해진 건 내 고막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지.

“군기시에 명해 홍이포의 복제를 강구하게 하소서! 하여, 변진과 성첩마다 홍이포를 두게 된다면 노적이 만용을 부리더라도 단숨에 무찌르게 될 것이옵니다!”

이서가 잔뜩 흥분하자 곁에서 김신국이 진정시켰다.

“홍이포가 갖춰진다면 반드시 싸움에 유용하겠으나, 성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포탄이 어디까지 날아갔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았잖습니까.”

모난 구석 없는 상식적인 발언이었으나 잔뜩 흥분한 이서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병조의 수장이라는 분께서, 이 대포의 형상만 보고도 성능이 가늠되지 않는다는 말이오?”

이서는 달아오른 홍이포 포신을 툭툭 때리면서 말했다.

“포구와 비교해서 포신이 매우 기니, 이는 포탄을 멀고 정확하게 보내기 위한 구조요!”

“확인 중에 있지요.”

“아! 답답하기는!”

이서가 질렸다는 얼굴로 손을 저어댔다.

“성능은 더 확인해 봐야겠지만, 의심을 걷어낼 목적이란 화약 낭비에 지나지 않소이다!”

마치 홍이포의 가치는 자신이 보장한다는 투였고, 이어서 이서는 군관이 사라진 방향으로 팔을 뻗었다.

“당장 포탄 찾으러 간 그자도 깜깜무소식이지 않소? 아주 멀리 날아갔다는 뜻이요!”

이서의 거듭된 자신감에 김신국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굴복한 것으로 여겼는지, 이서는 이쪽을 향해 밝은 얼굴로 무어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어째서 사람의 청각은 끄고 켜는 게 안 되는 걸까.

나는 성급한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속으로 고민했다.

‘홍이포를 복제한다 치더라도 써먹으려면 화약을 엄청나게 만들어야겠네.’

홍이포는 화약을 조총처럼 야금야금 흘려 넣지 않는다. 그냥 자루에 담아다가 밀어 넣어버리지. 장전 과정부터 박력 넘치는 홍이포를 값비싼 고철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면 화약의 생산량을 늘려야 하는데 쉽지 않다.

조선은 화약의 주재료인 염초를 비효율적으로 수급하고 있으니까.

현재 염초의 생산법은 염초가 포함된 묵은 흙, 함토鹹土를 모아다가 결정을 추출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함토를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처마나 마루 밑 등,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응달에서 조금 긁어낼 따름이니까.

이렇게 어렵사리 함토를 모아도 수율이 낮아 수십 섬의 함토 무더기를 정제해도 극미량의 염초만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임란을 거치며 왜군 포로와 명나라 장수들에게서 염초 굽는 방법을 이리저리 자문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함토의 수급을 두고 관찰사를 처벌하거나, 일개 도에서 수백 근 염초를 비축한 것을 매우 많다고 포상까지 논의했을까?

‘명나라에서는 2만 근을 쾌척했는데 말이지.’

염초 광산이 있어 가능한 만행이다. 하지만 조선은 터가 안 좋아서…….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건 정조 때 함토만이 아닌, 지천으로 널린 똥흙으로도 염초를 생산하는 기술이 확보된 뒤였다.

‘이걸 알려주면 염초 생산량은 크게 늘어나겠지만……. 세기를 뛰어넘은 기술을 간단하게 알려주어도 되나?’

보안을 신경 쓰는 미래에서도 빈번히 기술유출 사건이 일어나는데 하물며 조선 시대다. 연산군 때 개발된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은 바다를 건너가 일본을 한 해에 150톤의 은을 생산하는 경제강국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던가.

내심 고민하고 있으니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다가왔다. 그리고 도착한 군관은 양손으로 포탄을 받든 채 무척이나 민망한 얼굴로 보고했다.

“늦어서 송구하옵니다. 포탄이 산기슭까지 날아가 찾는 데 시간이 오래 지체되었습니다.”

“산기슭까지?”

김신국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포구 방향으로 녹색 지평선이 솟아난 곳까지는 거의 10리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미터법으로 환산한다면 약 4㎞.

그렇기에 김신국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기슭을 바라보았다.

“저쪽에서 말인가?”

군관의 대답은 명료했다.

“예.”

임무를 마친 군관은 예를 올리고서 물러났고, 이에 홍이포 찬양 일색을 이어가던 이세가 기세등등해져 말했다.

“이 사람이 말씀드린 대로 되지 않았소? 군기시에 일러둘 말을 생각해 두는 게 좋겠소이다.”

“홍이포를 복제하느냐 마느냐는 이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결정하실 수 있는 분께 상주 드리지 그러시오?”

물어봐야 대답은 뻔할 거라는 투였고, 이서의 예상은 옳았다. 17세기에 포탄이 4㎞ 가까이 날아갔다는데 복제를 마다할 수야 있겠나.

그만큼 화약도 많이 소모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보완책도 있겠다, 여차하면 소형화를 시도해도 그만이었다.

“이렇게 되니 내가 마치 병조판서를 놀리는 듯하여 매우 미안하지만, 나는 형조판서의 예상대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예에. 홍이포의 효용이야 말해 무엇하겠사옵니까. 군기시의 모든 장인을 동원해서라도 복제해내겠나이다.”

“믿고 맡기겠습니다.”

홍이포 복제 외에도 맡길 일이 하나 더 있지만, 뭐어.

병조판서가 직접 대포 만드는 건 아니잖아?

* * *

새해를 앞둔 시점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남이공이 모문룡과 떨거지들을 인솔하여 명나라로 간 지 며칠 되지 않아 사신이 방문한 것이다.

명나라의 사신은 아니었다.

“후금의 사신胡差이 의주를 방문해 입국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신은 노아합적奴兒哈赤의 7남인 아파태阿巴泰라고 합니다.”

영의정 이원익이 소식을 전하기 무섭게 어전은 개판 오 분 전으로 전락했다.

“감히 오랑캐 따위가 아조의 강토를 밟고자 한다는 말입니까? 전하, 허용하지 마소서!”

“후금의 기세가 나날이 등등하거늘 저들의 창끝을 굳이 우리에게 돌릴 필요가 있습니까?”

“유약한 발언이오!”

“전하, 마침 남이공이 변무상사로 떠났으니 늦기 전에 사신의 목을 베어 딸려 보내소서! 그리한다면 명나라도 아조의 진심을 의심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사신의 목을 베자니요! 금수와 같이 외교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소와 닭을 잡는 칼이 각기 다르듯이 오랑캐를 상대할 때는 적합한 도구가 따로 있게 마련이외다!”

소란을 넘어 소동이 벌어질 듯해 팔걸이를 내려쳤다.

쿵, 쿵!

어좌가 시끄럽게 울리고 난 다음에야 신하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못 다 내뱉은 주장들이 여전히 혓바닥들 위에서 감도는지, 절반은 입술을 씹어버렸고 나머지 절반은 입술이 튀어나왔다.

툭 건드리면 당장에라도 다시 시끄럽게 떠들 기세였으나 내게 필요했던 건 이 잠깐의 침묵이었다.

‘조선에 떨어진 뒤에 역사를 바꿔버린 적은 많지만, 외부에서 이렇게 대응해 온 적은 없었다.’

본디 인조가 즉위한 뒤로 조선과 후금의 외교는 단절됐다. 반정의 주축인 서인들은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를 혐오했으니까.

이 같은 조선의 태도에 후금 역시 억지로 외교를 이어나가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사신이나 서한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확실하고 강압적인 방법으로 조선과의 관계를 다졌다.

그러니 후금이 이번에 아파태阿巴泰를 보낸 건 의외였다. 역사에서 이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나비의 날갯짓이 일으킨 바람이 이제는 조선에만 머무르지 않는 듯했다.

“가도가 수복된 소식이 저들에게도 전해졌나 봅니다.”

정충신이 큰 공을 세워주어서 망정이었다. 만약, 모문룡 패거리의 발악을 적시에 제압해 내지 못했다면 후금은 반드시 어부지리를 보고자 했을 테니까.

그러나 분쟁은 빠르게 종결되었고 가도는 다시 조선의 품으로 돌아왔다. 후금은 분명 한발 늦게 소식을 접한 것을 크게 아쉬워했으리라.

대신 후금은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분열의 단초가 생겨났다는 것과 함께, 조선이 무시하지 못할 전투력을 보유했음을 깨달았다. 역사와 다르게 사신을 파견한 건 이 때문이겠지.

대신들도 계산이 여기까지 이르렀는지 다들 콧대가 조금씩 올라갔다.

잔학무도한 오랑캐들이 스스로 칼을 집어놓고 잔꾀나 부리게 만들었으니, 왜란 때의 추태로 크게 실추되었던 국격이 다시 회복된 기분이겠지.

개중에는 자신감이 과하게 넘쳐나 일단 지르고 보자는 자도 있었다.

“저들이 아조를 두려워한다면, 더욱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병조참의 이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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