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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73화 (73/380)

인조, 명군이 되다 73화

“사신의 목을 베어 돌려보내십시오!”

이귀의 극단적인 주장에 몇몇 신하들이 찬동하면서 어전이 소란스러워졌다. 조정에서 발언권을 가진 자들의 당색을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주전론이 종내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던가.

조정이 남한산성에 갇힌 와중에도 공허한 정신론만을 드높이다가 끝끝내 왕이 홍타이지 앞에서 대가리를 박지 않았던가?

내가 인조가 되었다지만, 그의 역사까지 반복할 생각은 없다.

“병조참의께서는 자신이 없으신가 봅니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지. 여기서는 언성을 높인다지만 과연 강 너머에 던져놓아도 계속 짖을지 궁금했다.

“오랑캐가 일시의 시운을 등에 업어 권세를 쥐었다고는 하나, 본질의 중화의 것과는 달라 야만적이고 천박하여서 온 천하의 화평을 어지럽히니, 하늘의 뜻을 따르는 문명으로서 배격함이 마땅합니다. 신이 아뢴 것은 이 같은 이치에 따른 것인데 자신이 있고 없고의 문제겠습니까?”

한 소리 들었다고 즉각 언변이 날카로워진 이귀였다.

어전에서 이처럼 분별없이 성을 내다가 거듭 망신을 당했지만, 고작 그 정도로 좌절할 인물이었다면 별종 취급을 받지도 않았을 터.

“저들이 일사나마 권세를 입었음을 알면서도, 노적을 자극하자는 말입니까? 꺼질 불이라 하여도 다 식기 전까지는 맨손으로 다루어서는 안 되는 법이거늘 참판은 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십니다.”

“문명의 일원이 되어 저들의 난동을 마냥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한다면, 오랑캐들은 더욱 기세가 오르지 않겠사옵니까!”

벽에다 대고 떠드는 기분이로군.

조선이 임란 때 살아남은 건 명나라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귀환한 이순신이 죽음마저 불사하고 분전해 준 덕이다.

그런데 이귀는 마치 조선이 왜를 압살이라도 한 것인 양 자신감을 불태우니 어처구니없었다.

하물며 지금은 이순신도 없고, 명나라마저 후금을 감당하지 못해 요동을 내어준 판국인데.

‘어차피 날을 세우지 않아도 후금은 쳐들어온다.’

누르하치는 조만간 영원성을 들이받았다가 석벽에 대가리가 깨져 죽을 예정이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홍타이지는, 명나라와의 건곤일척을 앞두고 후방의 위협부터 다스리기로 한다.

‘그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지. 그때까지 내실을 최대한 보강해도 모자를 판에…….’

사신의 목부터 베자는 건 시한폭탄을 불구덩이에 던지는 꼴이다.

“명나라조차 매를 들었다가 공연히 땅만 빼앗기고서 산해관 너머로 틀어박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금나라의 기세가 더욱 강성해진 것입니다! 이럴 때야말로 아조라도 기강을 바로 세워 지난날의 황은에 보답하여도 모자라는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무리하게 동강진을 평정하여 양국에 화친은커녕 도리어 오해만 쌓지 않았사옵니까!”

“이 땅에 쳐들어와 논밭 짓밟고 백성을 도살한 해적을 소탕하는 건 오해만 만드는 짓이고, 명나라조차 감당하지 못해 물러난 후금이 고이 사신을 보냈다는데 목을 치는 것이 기개다?”

무슨 말잖은 소리를 하고 있어?

“우리가 먼저 싸우려 들지 않아도, 후금은 때가 되면 쳐들어옵니다.”

“힘을 비축한 다음에 말이지요!”

“그동안 우리는 손 놓고 있답니까? 경께서는 그간 손을 놓고 있었나 봅니다.”

빈정에 이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굳이 따지자면 이귀가 공헌한 순위는 위에서부터 세는 게 빠르다. 군적의 갱신에 이어 대립가와 군포를 중앙화, 현실화하면서 말단에서 행해지던 부정이 크게 축소됐으니까.

백성들에게는 그리 현실적이지 않은 비용이 되어버렸고, 그로 인해 여전히 부족함이 많은 상황이지만, 적어도 당장은 노비와 부랑자들로 형체만 어설프게 유지하던 변진이 이름값만은 하게 됐다.

그리고 덕택에 가도 평정의 주역인 북방군도 신설하게 되지 않았던가?

“전하!”

그러니 눈치 안 보는 이귀가 일갈을 내뱉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느 제신들이야 이귀의 미치광이 같은(그러나 익숙한) 모습에 학을 떼었다지만, 끼어들지는 않았다. 왕 역시 유약한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몇 번이고 이귀라는 미친개를 조리돌림하고 입마개를 씌웠던 왕이다.

하지만 왕이 보여준 언행은 여느 신하들의 예상과는 달랐다.

“병조참의가 얼마나 수고하고, 또 기개가 어떠한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

먼젓번의 말과는 정반대의 발언에 이귀는 일순 돌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병조참의의 공로와 기개를 증명하고자 국가의 명운이 걸린 자리에서까지 언성을 드높인다면, 내가 보기엔 도리어 참의의 공로를 깎아먹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신이 사신의 목을 베자고 청한 것은, 신 한 사람의 기개를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옵니다.”

이귀는 단호하게, 그러나 이전보다는 훨씬 진정된 태도로 단언하고서 덧붙였다.

“노적이 천하의 안녕을 위협하는 것이 오래전부터 드러났는데, 과연 저들이 순수한 의도로 사신을 파견했겠사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익이 있어서 저들의 농간에 어울려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이러한 지적에 왕이 고개를 끄덕여 주니 이귀의 난동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수긍하겠다는데 도리어 따지고 들 수는 없는 노릇. 그렇게 좌중이 진정되자 신하들은 다시 어좌를 바라보며 왕의 발언을 경청했다.

“아파태는 폐조 때 방문한 여느 후금의 사신과는 등급이 다른 인물입니다.”

후금이 아무리 국가의 형체를 갖췄다지만, 본질은 부족이 거대화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직은 모조리 누르하치의 자식들이 차지하고 있고, 이는 누르하치의 7남인 아파태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아파태가 노적 다음가는 권력자들인 사대패륵四大貝勒에는 들지 못하였으나, 사패륵이 차기 후금의 주인이 되고자 다툰다는 걸 생각하면 아패태는 국외로 나올 수 있는 자 중에서 가장 높다고 봐야겠지요.”

단순히 정탐의 목적만이 아닌, 조선과의 외교 수립에도 권한을 부여받았을 수도 있었다.

조선의 원군이 참가한 사르후 전투가 있었던 뒤 누르하치는 광해군에게 직접 서한을 보냈지만, 이번에는 그 이상으로 자식을 보내는 적극성을 보인 것이다.

“그만큼 가도 평정에 경각심과 함께 가능성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명분이야 어떻건 조선이 명군이 주둔한 가도를 공격한 건 사실이었다. 조선의 존재로 명나라 공략에 전력을 다할 수 없는 후금으로서는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었겠지.

저들의 적극성과 사신의 파견은 하나의 결론을 말한다. 후금은 조선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며 일단 말로써 통하고자 한다. 무작정 칼을 뽑아 들고서 후금에 대한 혐오를 증명할 때가 아닌 이유다.

“저들을 마냥 받아주어서도 안 되고, 박대하여서도 안 되니 어떻게 해결해야겠습니까?”

“전하.”

이조참의 김류였다.

“아파태가 방문한 것은 좋은 소식이기도 하나, 그렇지 않기도 하옵니다. 이는 아조가 저들에게 진지한 논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이 끄덕이자 김류가 말을 이었다.

“아파태가 무슨 말을 늘어놓느냐와는 별개로, 그는 아조 내부를 정탐하려는 의사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를 들인다면 정탐을 용인하는 것 이상의 이익이 갖춰줘야만 옳을 것입니다.”

이에 형조판서 이서가 답했다.

“우리 군사의 월등함은 동강진을 소탕함으로써 증명되었네. 놈들이 해적으로 전락했다지만, 그래도 한때 명나라의 군사였는데 일시에 쓸어버리지 않았나?”

이서는 말과 함께 손바닥으로 허공을 휩쓸었다.

“오랑캐 놈이 보고 싶으면 보라지!”

생동감 있는 표현에 이은 자신감에, 김류가 답했다.

“동강진이 한때의 명군이라고는 하나 결국에는 제 땅을 지켜내지 못한 요동군의 말단이자 패잔병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을 소탕하였다고 어찌 후금군도 똑같이 이길 수 있다 확신하겠습니까?”

“…….”

“더욱이 명군은 이미 온 힘을 다하여 싸움을 일으켰다가 끝내 대패하였으니, 해적 한 줌을 쓸어버린 위세를 들이밀다가 도리어 업신여김을 당하지는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더욱이, 조선군의 전투력이 객관적으로 어떤지를 떠나 기세가 한껏 오른 후금군은 저들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줄 알 터다. 어떠한 군대를 가져놓더라도 겁먹지 않겠지.

중신들은 못마땅하여 앓는 소리를 흘렸으나 반박은 없었다.

‘무턱대고 목을 자를 수도 없지만, 들이고자 한다면 이익이 있어야 한다라.’

그렇다면 아파태를 들여 어떤 이익을 취할 수 있을까?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녕 이익이 없다면 오지 말라고 문전박대하는 것이 정답인가.

그러나 후금의 이례적인 적극성을 생각해 보면 문을 걸어 잠그는 것만이 상책은 아닐 터였다. 어쨌거나 폭력이라는 최종 수단에서 우위를 가진 건 후금 아니냐.

고민하고 있으니 이원익이 타협안을 내놓았다.

“사람을 보내어 의주에서 맞이하되, 더 깊이 들이지 않음이 어떻겠사옵니까?”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인 것 같군.

“영의정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아파태를 상대할 적임자를 정해 알려주세요.”

* * *

며칠 뒤.

“전하.”

이원익이 흙빛으로 보고했다.

“호차胡差 아파태가 부윤의 만류에도 의주를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왜요?”

“기필코 주상 전하를 뵈어야겠다고 합니다.”

모문룡을 잡아다가 보내 버렸더니 다른 미친놈이 찾아왔군. 국제 미친놈 보존 법칙이라도 있나?

어처구니없는 소식에 신하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아마 나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일단은 침착을 되찾고서 지시했다.

“사신이 나와 만나기를 바란다고 하였으나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이유이니, 일대 변진에 수상한 호인이 돌아다니지는 않는지 주의하라 전하세요.”

잠재적 적국에 사신을 보낸다면 정탐의 목적도 빼놓을 수 없다. 임란을 앞두고 조선도 왜에 통신사를 보내어 저들의 내부 사정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품을 파악하지 않았던가.

후금의 사신은 내부로 파고들지 못했으니 대신 국경지대를 정탐하고 사라질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만의 하나이겠으나, 아파태가 진정으로 나를 보겠다며 의주를 탈출한 것일 수 있으니 대로大路가 지나가는 고을의 수령들에게도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하세요.”

부윤과 지방관들이 지적 불구 수준의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이미 같은 명령을 내려두었겠지만, 확실히 해두는 편이 좋겠지.

이에 이원익이 물었다.

“호차를 적발한다면 어떻게 해야겠사옵니까?”

조정의 지시에 불응하고서 멋대로 탈주한 잠재적 적국의 주요인물을 어떻게 취급할 것이냐. 제법 민감한 질문이었던지라 신하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발언과 다르게 국경의 방비를 정탐하다가 적발되었다면……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사로잡아야 합니다.”

후금도 변명은 못 할 일이다. 애초에 전쟁을 앞둔 관계인 만큼, 안보와 직결되는 군사정보의 유출은 절대 허용할 수 없었다. 오히려 살려서 보내는 편이 더욱 위험해지겠지.

이원익도 이견은 없다는 듯 수긍하고서 질문했다.

“만에 하나, 이외의 경우라면 어떻게 대응해야겠사옵니까?”

아파태가 생각보다 훨씬 미친놈이어서 정말로 나를 만나러 오고 있다면……. 그런 거로 사신을 죽일 수는 없겠지.

“구속하여 추방하세요.”

“예에. 수령과 변장들에게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 * *

아파태는 생각보다 훨씬 미친놈이었다.

그리고 그를 사로잡은 건, 수령도 변장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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