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74화
탈주하던 아파태의 발목을 붙잡은 건 조정을 대표해 그를 만나러 간 우참찬 윤방尹昉이었다.
아파태의 얼굴은 몰라도, 호인의 복색이 워낙 특이하니 윤방은 그저 의주에 도착하면 아파태를 만날 줄 알고 대로를 따라 올라가던 중 아파태와 마주한 것이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건 그다음 벌어진 일이었다.
윤방은 의주를 나선 아파태에게 경위를 물었고, 아파태가 부윤이 보내주었다고 하니 그저 월권이 벌어진 줄로만 알고 순진하게 함께 한양으로 향했다.
그리고 일대 수령들은 명령을 전달받았음에도 체포령이 떨어진 아파태가 조정의 대신과 태연하게 이동하는 모습에 일이 마무리된 줄 알고 그들을 보내주었다.
이 말 같지도 않은 상황은 개성부 유수가 접대를 빙자해 두 사람의 발을 묶은 뒤 치보를 보내면서 알려졌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조정의 대신들은 모조리 자지러졌으며…….
나는 어이가 없었다.
“…….”
미간을 너무 많이 주물러 멍이 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을 즈음.
결론을 내렸다.
“불러들이세요.”
“전하! 일개 오랑캐 차관이 전례 없을 정도로 아조를 능멸했는데, 어찌 엄히 다스리지 않고 도리어 수도에 발을 디디게 하시옵니까?!”
억울함마저 느껴지는 투로 따지던 이귀는 금세 얼굴이 새빨개져서 언성을 높였다.
“즉시 선전관을 파견해 조정을 망신케 한 의주부윤을 참하시고, 왕명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호차를 보내준 수령들은 모조리 삭직하며, 호인의 거짓말에 속아 나라를 위험하게 한 우참찬은 멀리 유배 보내소서!”
이귀의 과격한 주장에 여러 사람이 기겁한 목소리로 진정시켰다.
그러나 반대로 이귀에게 동의하는 의견도 많아 어전은 순식간에 시장통처럼 시끄러워졌다.
이유를 말할 틈도 안 주는군.
이번에는 나도 피곤했던지라 어좌에 편하게 기댔다.
그래, 백날을 떠들어라.
내 목이 아프냐.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으니 신하들은 어쩐지 조용한 나를 의식하고서 하나둘 입을 닫았다.
그렇게 몇 사람이 조용해지자, 정신 사납던 소란도 수도꼭지 잠가 버린 듯 일순 잦아들었다.
“다들 충분히 말씀하셨습니까?”
신하들은 조용했다.
“아파태를 들이고자 하는 건 아조의 명예를 이 이상 실추시키지 않기 위함입니다. 이미 개성까지 온 그에게, 원래는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며 이제라도 돌려보낸다고 해야겠습니까?”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느긋하게 국경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는 얼마나 비웃을 것이며, 후금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또 얼마나 비웃을 텐가?
나라 망신이다.
“하오나, 전하. 아파태는 그 같은 반응을 바라고서 개성까지 파고든 것입니다!”
이귀가 완고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받아주지 말고 개망신이나 당하자는 겁니까?”
아파태가 이런 전개를 의도했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이런 꼴이 되지 않았으려면 애초에 아파태가 개성까지 오는 일이 없었어야지요.”
이미 벌어진 일이다.
“호차를 억지로 돌려보내면 조정의 무능을 만천하에 공인하게 됩니다. 고작 한 사람을 제때 붙잡지 못해 수도 근방까지 내어주었으니!”
다들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할 말은 없었던지라 그저 앓는 소리만 내며 고개 숙일 따름이었다.
“철면피 쓰고, 처음부터 입조를 허락할 생각이었는데 사정이 있어 잠시 지연되고 있었다. 마침 억지로 찾아왔으니 물리치지는 않으나 돌발적인 행동에 우리는 많이 놀랐고 불쾌하다.”
나는 지령과 함께 노파심으로 덧붙였다.
“그런 사정이 있었다고 치고, 이를 직접 설명하는 일은 없이 느낌만 들도록 합시다. 체면은 세워야지 않겠습니까?”
고작 체면 따위에 연연하는 게 실익이 있냐면,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아파태는 후금의 사신.
그리고 후금은 원래 역사에서 조선이 자중지란으로 약해지자 틈을 놓치지 않고 즉각 파고들었다.
근거 없는 허세로 후금을 도발할 필요도 없지만 무능하거나 유약하게 보여서도 안 된다. 누르하치가 이때다, 하고서 영원성에 꼬라박아야 할 병력을 압록강으로 보낼 수 있으니까.
이런 점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신하들에게 국격이란 실익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였다. 문명과 오랑캐로 반분된 천하에서 조선을 문명의 반열로 들여놓는 게 바로 국격이었으니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받아들이고 사기극이나 벌이자니 자존심은 상하겠지만, 어쩌겠나?
그러지 않으면 오랑캐에게 놀림감이 된다는 데.
“……크흠.”
다들 멋쩍게 헛기침이나 터뜨릴 따름이었다.
* * *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났다.
“홍이포 복제는 진전하고 있습니까?”
최근 바빠진 김신국이 다른 신하들 앞에서 망신당할 일 없도록, 배려하는 의미로 독대獨對하는 자리에서 성과를 물어봤다.
“신이 군기시를 통해 알아본바 홍이포 제작에는 비용적인 문제와 기술적인 문제가 있사옵니다.”
선진문물을 따라잡다 보면 당연히 발생할 문제들이었다.
“말씀해 보세요.”
안다고 도움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먼저 비용적인 문제는, 홍이포를 만들기 위해 막대한 양의 청동이 소요된다는 점이옵니다.”
놀랍지는 않군.
“포신을 청동 대신 주철로 만드는 방법도 있으나, 주철은 충격에 약해 방포 시 대포가 폭발할 수 있사옵니다.”
그러나, 위험성과는 별개로 대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전쟁을 앞둔 상황이라면 더더욱.
일단 비용 문제는 미뤄두고서 물었다.
“기술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대포가 너무 크고 무거워 주물사鑄物砂가 열기와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무너지며, 설혹 주물을 뜨더라도 포신의 내부가 좁고 길어 정돈하기 어렵사옵니다.”
그러나 홍이포는 실재한다. 방법은 있다는 뜻이다. 당장 명나라만 해도 홍이포를 복제해 내지 않았나.
‘계속 연구하다 보면 결국 극복하겠지만……. 문제는 효율인가.’
홍이포를 양산하기 위해서는 비용이든 위험이든 하나는 각오해야 했고, 실현을 위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발생할지 몰랐다.
이러한 고민을 김신국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당장 홍이포를 양산하기에는 여러모로 미진한 점이 많으니, 변방을 대포로 방비하고자 하신다면 불랑기佛狼機를 만듦이 어떻겠사옵니까?”
불랑기포.
호준포와 함께 임진왜란 시기 조선에 전래한 대포다.
몸통인 모포母砲에서 자포子砲가 분리되는 특이한 형태를 지녔는데 덕분에 장전 시 자포만을 빼내 빠르게 화약과 포탄을 채울 수 있다.
이러한 불랑기는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제법 좋은 인상을 남긴 터라, 조선은 불랑기포가 전래하자 다수를 복제해 냈다.
‘결점은 대포가 분리형이라 가스가 새고 폭발하기 쉽다는 것…….’
약실폐쇄가 쉬운 일이었다면 제대로 된 후장식 포가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등장하지도 않았겠지.
“……타협해 봅시다.”
이에 김신국은 어떤 타협을 말하냐는 듯, 눈이 동그래져서 마주 보았다.
“홍이포를 불랑기포처럼 소형화해 보세요.”
일단 복제 기술부터 충분히 갖추고 난 뒤 소형화를 주문할 생각이었으나 사정을 들어보니 그렇게 편하게 돌아갈 것 같지는 않았다.
반대로 소형부터 만들어가며 기술을 배워나가는 게 낫겠군. 어차피 현재 시점에서 홍이포는 화력 과잉이다.
“10리 가까이 포탄이 날아가는 건 분명 대단하지만, 그렇게 철환 몇 개 날린다고 후금군을 몰살시킬 수는 없지요.”
홍이포가 이처럼 크고 무식한 화력을 자랑하는 건 원래 한 방 한 방이 치명타로 작용하는 해상용 함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전이라면 숫자도 중요하지. 양산은커녕 원본 복제마저 요원한 마당에 비용 걱정부터 하는 재정으로는 홍이포로 군대를 도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예.”
“포신 안쪽은 주철로 만든 뒤, 겉은 청동으로 감싸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무른 청동이 충격을 받아낼 테니 내부는 주철을 써도 폭발할 위험이 크게 줄지 않을까, 해서 말이에요.”
대포 안팎의 소재를 달리 하는 건 실제로 사용되었던 기술이기도 하고.
김신국으로선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얼굴로 답했다.
“장인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래요. 병조판서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유능한 게 죄라고 생각하세요.”
위안과 함께 살짝 칭찬해 주니 김신국이 희미하게 웃었다.
“신은 명나라로 가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하옵니다.”
“남이공이 돌아오면 그 말씀,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가벼운 농담과 함께 독대를 마치고 해산하려는데 방문 너머에서 내시가 알렸다.
“전하.”
“예?”
“우참찬이 입시를 청하였사옵니다.”
우참찬이라는 말에 김신국의 안색이 굳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우참찬의 정원이 늘어난 게 아니라면, 지금 면대를 청한 우참찬은 아파태의 거짓말에 속아 그를 한양까지 안내한 윤방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그가 도착했다는 건 아파태 역시 한양에 도달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 * *
윤방과의 면담은 짧고 신속하게 끝났다.
만나야 할 사람이 그뿐이 아니기도 했으나, 윤방이 내게 할 말도 변명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전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정을 전해 들은 뒤 처분은 추후에 논하기로 하고 자리를 파했다.
윤방 역시 난처했던지라 시간 끌지 않고 곧장 물러났다.
아파태를 묶어두기 위해서는 원치 않게 원접사遠接使 노릇을 한 윤방이 시간을 끌게 하는 게 자연스럽겠으나, 그는 정신적으로 몰려 철면피를 깔 상태가 아니었다.
하여 좌찬성 이상의가 대신 출격했고 그동안 삼의정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호차胡差가 수도에 당도하였으니 규례대로 하마연下馬宴을 열어야 하는데, 대개 하마연은 인군이 주재하옵니다.”
영의정 이원익이 말했다.
“내가 참석해야 한다는 뜻이로군요.”
“때로 세자나 대신이 맡기도 하였으나 호차의 신분이 낮지 않으니 조심스러울 따름이옵니다.”
“하마연에 늦게 참석하겠으나, 미리 알려주지는 마세요. 나는 지금 바쁜 겁니다.”
“예.”
이어서 좌의정 박홍구가 잘 포장된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호인이 가져온 노추의 서신이온데, 그 내용이 지극히 흉악하여 모두 경악하였사옵니다.”
박홍구가 조심스럽게 건넨 두루마리를 펼쳐보니 지면에는 지렁이에 다리가 돋아난 형상의 만주어뿐이었다.
이에 박홍구가 통역에게서 전해들은 말을 외웠다.
“조선이 명과 싸워 대승한 것을 축하한다는 내용입니다.”
“음…….”
“또한, 함께 명에 맞서는 우방으로서 친교를 다지고자 근시일 싸움에서 거둔 전리품을 보내겠다고 하옵니다.”
“아조와 명나라를 이간질하기 위한 술책이군요. 명나라에서 전말을 추궁할 수 있으니 사본을 만들어놓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두루마리를 돌려주면서 덧붙였다.
“호차에게는 양식이 맞지 않아 접수할 수 없다고 전하되, 부득불 사양한다면 보관해 두었다가 명에 전달하겠다고 하세요.”
“예.”
“내부적으로는 노추의 표문表文이 양식은 물론 사리에도 맞지 않아 반송한 것으로 합니다.”
표문은 군주급 상급자에게 올리는 글이다.
조선이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글도 일종의 표문인 셈인데, 누르하치의 서한을 표문으로 치겠다는 건 후금이 조선보다 아래라고 공인하겠다는 뜻이었다.
호차를 수도에 들여보내면서 꼭지 돌아간 인간들이 많을 텐데 이렇게라도 달래야지.
마지막으로 우의정 조정이 나섰다.
“표문에 따르면 곧 노추가 예물을 보낼 듯한데, 부윤에게는 어떻게 지시해야겠습니까?”
“이번 일로 팔자 꼬였다는 건 잘 알 테니, 어디까지 더 꼬일 수 있는지 궁금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예물을 사양하라고 하세요.”
삼의정 각자의 걱정거리를 해결해 주고 나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곧 누르하치의 아들놈을 보겠군.
이렇게 일찍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 * *
“조선 국왕 전하십니까?”
아파태가 물었다.
하마연이 꽤 진행되어, 해는 다 저물고 흐릿한 조명만이 깔렸음에도 사신의 얼굴이 불콰하게 물들었다는 게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
전사답게 굳센 얼굴에는 자잘한 상처가 여럿 보여 성향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니요. 꽤나 인상적이어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결례가 되었다면 미안하군요.”
“흠!”
아파태는 실소와 함께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내 얼굴이 잘생기기는 하였지요. 오는 길에 조선인을 여럿 보았으나 나처럼 남성적이고 강인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조선은 무력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어서 그럽니다.”
이에 아파태가 호방하게 웃으며 무어라 지껄였는데, 통사通事가 난처한 시선을 보냈다.
하여 눈치 보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까딱이니 통사가 잔뜩 움츠러든 채로 말했다.
“전하께서 이 나라가 약해 빠졌다고 직접 시인하실 줄은 몰랐다고……. 하옵니다.”
기고만장한 발언이었다.
억지로 띄워놓은 하마연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고, 아파태는 몰려드는 시선에 어깨를 으쓱했다. 너희들이 불만이 있어서 어찌할 거냐는 듯.
“요즘 들어 기세등등해진 후금과 비교하면 조선의 무력은 압도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사를 쓰러뜨리는 건 힘이 아니라 기교지요.”
“기교요? 하! 그건 힘없는 나약한 자들이 찾는 수단이지요!”
씨익 웃어주면서 연회상을 가리켰다.
“음식에 독을 넣어뒀다는 걸 알려주어도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까?”
나는 또 굳어버린 통사에게, 머뭇거리지 말고 전하라는 뜻으로 아파태를 가리켰다.
아파태는 미심쩍은 얼굴로 통사를 바라보다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일순 정색하고는 씹던 음식들을 흘렸다.
“하하!”
“……?”
“가볍게 농담 한번 했을 뿐인데 반응을 잘 해주시니, 내가 다 기쁩니다.”
이런 게 바로 기교지.
주먹 한 번 들지 않고 기고만장한 사내를 흠칫하게 했잖아?
통사의 통역에 아파태는 이게 가능했나, 싶을 정도로 얼굴이 더 붉어져서는 입술을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