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75화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다.
아파태가 나를 만나고자 한참 기다렸다는 건 알지만, 먼저 시비를 걸고는 한 방 먹었다고 주먹을 말아쥐는 게 너무 하찮았다.
하지만 주먹 쥐는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던 걸까?
“제 형제 중에도 기교를 좋아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참으로 꼴사납다고 여기지요.”
“그래요?”
홍타이지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있지.
“진지하게 충고하는데, 조심하세요. 뒤통수 깨질지도 모릅니다.”
홍타이지는 다른 쟁쟁한 경쟁자들을 모두 꺾고 황위의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니까.
물론, 아파태가 순전히 형제를 소개하고 싶어서 홍타이지를 언급한 건 아닐 테지.
“반대로 제가 먼저 그 녀석의 뒤통수를 깨버릴 수도 있지요.”
꽤 감정이 담긴 어조였다.
“응원하겠습니다.”
나는 술잔을 들어 아파태에게 공허한 건승을 빌어주고는, 상큼한 미소와 함께 목을 축였다.
“제가 한의 서한을 가져왔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신하들에게서 들었습니다.”
“한데 받지 않으셨군요.”
“다른 나라에 보낼 서한이라면 받아주는 쪽의 양식을 준수하는 게 예의인데, 안타깝게도 귀국은 폐국의 양식을 존중해 주지 않았더군요.”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서한을 전달하지 못하고 귀국하게 된다면 한께서 저를 처벌할 겁니다.”
“도와드릴 수 없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글 지은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아파태는 시선을 고정한 채로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후금은 덩치만 클 뿐 국가의 기틀은 완전히 갖추지 못했다. 그러니 공문서 작성을 전담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리 없는지라, 아마 글을 쓴 사람은 명의와 마찬가지로 누르하치 본인일 가능성이 컸다.
모욕 아니냐고?
맞다.
“전하…….”
옆자리에 동석한 이원익이 조심스럽게 호명했다.
“오랑캐가 칼춤 좀 춘답시고 기고만장해서는 꼴 받게 굴지 않습니까?”
“……누군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사옵니까.”
하마연에 참석한 다른 신하들을 돌아보니, 아파태가 설칠 때는 속이 얹힌 듯하다가 이제는 소화가 다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나 전하께서는 이 나라를 책임지시는 분이오니 자중하시옵소서.”
나는 다시 아파태를 돌아보고는 손을 살짝 들었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아서.”
자중하기가 쉽지 않으니, 내가 물러나는 편이 피차 이롭겠지.
“……바쁜 분을 억지로 자리에 앉혔군요.”
“한이 아들을 보냈다는데 얼굴은 봐야지 않겠습니까? 억지는 내가 부렸으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대접이 부실한 건 이해해 주시길 바랄 뿐이지요.”
“이해합니다.”
“고맙군요.”
이해한다니 얼굴 보는 건 이쯤 하기로 했다.
만취하여서는 제멋대로 삐져 버린 아파태에게 쓸 만한 정보를 뽑아내기는 어려울 테니까.
나는 이원익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호차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먹이세요. 그전에 일어나려고 하면, 세자가 온다고 붙들어놓고요.”
그래야 필름 끊겨서 자신이 삐졌는지 안 삐졌는지 분간 못 하지.
“세자에게는 오라고 하겠습니다.”
교육적 목적으로.
“아, 세자가 마실 술에는 물을 타게 할 테니 곤란해지는 일은 없도록 조심하시고요.”
“예에.”
“믿고 맡기겠습니다.”
나는 다시 아파태를 바라보았다.
“미처 끝내지 못하고 온 것이 있어, 송구스럽지만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염치 불고하고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흥.”
아파태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쪽 무릎을 짚었다.
“대신 세자가 올 겁니다.”
이에 아파태는 엉덩이를 어중간하게 든 채로 고민했다.
“어려서 아직 세상 물정에 밝지 않으니, 사신께서 군주의 후계자로서 어떠한 덕목을 갖춰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면 참 좋겠군요.”
“저는 한의 후계자가 아닙니다.”
사양하는 듯 말하면서도 엉덩이를 내리는 아파태였다.
“하지만 욕심은 있으시겠지요?”
“…….”
“살얼음판 같은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가는 기분, 그리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분전에 대해서라면 분명 세자에게 해주실 말씀이 많으실 겁니다.”
“……그런 것이라면야 밤새도록 떠들 수 있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니 몇몇 신하들도 묻어가겠다는 듯 함께 술상을 밀어냈다.
아파태는 못마땅하다는 기색이었으나, 세자가 온다는 말에 자리를 지켰다.
* * *
‘일단 수도까지 오는 길은 알아냈는데…….’
조선의 지형은 만주나 요동과는 크게 달랐다.
디디고 선 땅의 형상이 사람의 심성에도 영향을 끼치는 걸까?
‘배배 꼬이지 않은 게 없군.’
윤방이라는 자를 속여 내려올 때만 해도 조선의 종자들은 이리도 순진무구하구나, 내심 조소했다. 공허한 체면 따위를 지키고자 원래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수도로 들여줄 때는 또 어땠던가?
하지만,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의 왕이라는 작자만 해도 어떠한가.
입에는 꿀을 발랐으나 품에는 칼을 감추었다는 말처럼, 낯빛은 밝았으나 툭툭 내뱉는 말마다 사람의 속을 사정없이 후빈다.
‘괴팍한 놈.’
배배 꼬인 이 땅의 주인다웠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놈들이, 경쟁자로는 가장 위험한 부류였다.
홍타이지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맏형인 추연褚英이 무수한 전공에도 형제 및 공신들과 반목을 일으키다 어처구니없이 죽은 뒤 한의 후계는 불투명해졌다.
본디 만주의 전통적인 방식은 장성한 아들들이 저마다의 군사와 무리를 이끌고 독립해 각자 부족 밖을 평정해 자립하고, 막내가 남아서 원래의 부족을 지키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한이 만주에 이어 요동까지 정벌하면서 전통을 준수하기는 어렵게 됐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길목이 산해관으로 틀어막힌 지금, 장성한 아들이 분가하여 정복할 땅이라곤 코딱지만 한 조선이 전부였으니까.
그래서 한은 산해관을 넘기를 바랐다.
중원을 포함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길이 열려야 자식들이 온 천하를 두고 각자의 몫을 챙기러 떠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끝내 한이 숙원을 풀지 못한 채 눈을 감게 된다면 독립을 이유로 후금의 전력을 분할하는 건 자멸로 향할 뿐이다. 몽고가 하나 된 세력으로 존속했다면 과연 후금이 이리도 쉽사리 평정할 수 있었을까?
반면교사를 눈앞에 두고도 그 뒤를 쫓아갈 필요는 없었다.
하여, 한과 형제들의 공론은 같았다. 산해관을 넘어 중원을 평정하기 전까지는 단 하나의 주인만을 두고서 힘을 합치자고.
물론, 자신을 포함해 형제들 모두가 그 후금의 유일한 주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현재로서 그 자리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사대패륵들이며, 그중에서도 후계자로서 가장 유력한 인물이 바로 아래 동생인 홍타이지였다.
‘놈은 능력도 있지만, 자신이 가장 후계자에 가깝다는 걸 너무 잘 알아.’
그래서 처신이 깔끔했다.
다른 사대패륵이 저마다 가진 욕망과 불안, 맹점을 극복하고자 무리하는 동안 홍타이지는 차근차근 점수를 쌓아나갔다.
아파태는 그것이 꼴 보기 싫었다.
홍타이지가 잘 싸우고 유능한 건 부정하지 않겠으나 잔머리를 살살 굴려대면서 자신과 다른 형제들을 망신시키고 있으니까.
그리고 아파태가 보기에 조선의 왕도 홍타이지와 비슷한 부류였다.
겉으로는 둥근 척하나 한 꺼풀 너머에는 날카로운 구석이 있으며, 성격만 배배 꼬인 게 아니라 재주마저 좋으니까.
그것을 알 수 있는 점이 조선의 왕은 이미 이전의 왕을 갈아치우고 제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무능력자에게는 기대하기 힘든 행보다.
만약 그와 홍타이지에게 차이가 있다면, 홍타이지는 아직 한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리라.
‘골치 아프게 되었어. 여차하면 조선이라도 정벌하여 한이 되고자 했거늘.’
모두가 홍타이지를 경쟁자로 여기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그의 우위를 인정하고, 치열한 후계 싸움에서 빠져나와 제 몫을 챙기고자 했다.
이는 형제들의 합의를 어기는 셈이었으나, 그렇다고 욕망을 꺾을 수는 없잖은가?
아파태 역시 조선으로 파견된 김에 대안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왕이 이래서야 대안의 실현도 어려웠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이도 저도 분명히 하지 못한 채 양쪽 모두의 눈치를 보았던 이전 왕과 달리 지금의 왕은 간사하면서도 단호했다.
해도를 점거한 명나라 패잔병들이 변경을 약탈하기 무섭게 곧장 대응하지 않았던가?
쉽사리 구슬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칼을 뽑는 방법도 있으나, 조선은 패잔병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한마저 의식할 정도로 대승을 거뒀다.
자신이나 형제 혼자서 빼낼 수 있는 일군의 힘으로는 정복하기 어렵겠지.
후금 전체의 힘을 동원한다면 결과는 달라지겠으나 그건 한과 홍타이지의 몫만 늘어날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내 몫을 챙길 수 있을까…….’
아파태는 고민과 함께 연신 술잔을 기울였으나 명쾌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뒤로는 막강한 경쟁자가 있고, 앞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 놈이 버티고 있으니, 아파태는 하늘로 솟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세자는 언제 옵니까?”
아비에게 잘 배웠는지 조선의 주인이고 후계자고 제때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곧 오실 겁니다.”
아파태가 신경질적으로 의문을 표한 직후, 기다렸다는 듯 (실제로도 기다린 게 맞았다.) 조선의 세자가 나타났다.
“송구합니다.”
세자는 민망한 얼굴로 착석하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구중궁궐에서 사리를 깨치고 자라 바깥의 세상이 어떠한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송구하게도 차관의 위명을 알지 못하니, 가르쳐 주신다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아파태는 세자가 하는 말이 제 부친과 별반 다르지 않은 감언이설 같아 불쾌했으나, 조선 왕에게 부탁받은 것이 있고 제 자랑을 마다하는 성격도 아닌지라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내가 조선에 오기 직전 몽고의 찰로특기扎鲁特旗를 토벌하고 앙안昂安을 처단한 일을 말해주지요.”
아파태는 자신을 추켜세울 수 있는 부분이라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언급하며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다가도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과장을 곁들였고, 다른 사람의 공로는 깎아내리며, 자신의 실수에는 변명을 늘어놓으니 자리에 몇 안 남은 신하 중 질색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세자만은 눈을 반짝이고서 연신 맞장구와 질문을 거듭하니 아파태는 흥에 겨워 더 떠들었다.
“한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내 딸을 말라비틀어진 이李 유격에게 시집 보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내가 한을 위해 전장에서 거둔 승리와 무수한 희생이라면 이미 패륵에 올랐어도 부족함이 없지요!”
“이게 다 아민阿敏 같은 예비 반역자가 패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그럽니다!”
“저하가 마음에 들어서 몰래 알려주는 건데, 아민阿敏은 여차하면 조선을 쳐 정복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자신은 한의 자식이 아니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한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무리하려는 것이지요.”
“아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싸움이 벌어지면 아민이나 죽여주세요! 그놈이 죽어야 내가 패륵이 되니까…….”
흥에 겨웠던 아파태는 이런저런 말을 안주 삼아 한참이나 더 늘어놓다가 상 위에 처박혔다.
이내 코 고는 소리가 연회장을 시끄럽게 울려댔고, 세자와 신하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