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76화
“세자가 아파태를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놈이 그런 소리까지 했답니까?”
“송구하옵게도 신이 취기가 심하여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파태가 이미 민감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사옵니다.”
“……영상이야 내가 참석하기 전부터 자리를 지켜주었으니, 이해합니다.”
세자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하마연에서 예상치 못한 소득이 있었다.
아파태가 정신이 나갔는지, 사대패륵 중 하나인 아민이 독자 행동을 꾸미고 있으며 조선을 공격할 생각도 있다 이실직고한 것이다.
‘정묘호란 때 후금군을 이끌었던 지휘관이 아민이긴 했지. 아민이 화약을 맺은 뒤에도 공격을 지속했다는 기록도 있고.’
그게 홍타이지의 지배에서 벗어나 조선에서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싶어서였나?
이원익이 평가했다.
“호차가 만취해서 한 말이라고는 하나 내뱉은 말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취중 진담과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한 술책. 둘 중에 꼭 하나만이라는 보장은 없지요.”
선조와 광해군 시기에서 모두 살아남은 이원익이니 아파태의 말실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그 같지는 않다.
하물며 아파태는 능력과 경쟁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게 아니다.
누르하치의 아들이니까 거기에 있지.
형제 중에서도 특기할 수준은 아니기에 다이샨이나 홍타이지와 달리 패륵의 자리를 얻지도 못했다.
술 처먹고 말실수?
할 수도 있지.
“더욱이 아파태도 진솔하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아민이 죽어야 그의 패륵 자리가 자신에게 온다고요. 정말로 그렇게 될지는 의문입니다만.”
“음…….”
“이 사안은 아파태가 돌아간 뒤, 마저 의논하도록 하고 지금은 입단속에 집중합시다.”
이원익도 너무 피곤해 보였고.
하마연을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했으니, 그의 연배를 생각한다면 체력도 한계에 다다랐을 거다.
급한 일도 아닌데 더 붙잡아둘 이유가 없지.
“게, 밖에 있습니까?”
문 너머를 향해 이르자 내시가 답했다.
“하명하시옵소서.”
“영의정이 댁까지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도록 사람을 붙여주세요.”
“예에.”
“오늘은 이쯤하고, 다음에 봅시다.”
나는 비틀거리며 예를 표하는 이원익에게 입가심 삼을 과자를 들려준 뒤 뜰까지 배웅했다.
바깥의 바람은 무척이나 시원해서, 취기가 마저 달아나는 듯했다.
세자는 서궐로 잘 돌아갔을까?
나는 포기한 아파태에게서 유용한 정보를 뽑아냈으니 참으로 가상했다.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있어.
* * *
아파태가 눈을 뜬 건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아파태는 익숙하지 않은 주변 풍광에 흠칫하였다가, 이내 이곳이 한양의 숙소임을 깨닫고는 퍼질러졌다.
여전한 숙취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
아파태는 인상을 찌푸린 채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었으나, 검은 안개가 낀 듯 분명치 않았다.
조선이 왕이 늦게 참석하여 자신이 무어라 불평했던 것 같고, 또 왕이 무어라 말했는데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던 듯했다.
그리고 조선의 왕이 떠나간 뒤에도 자신은 자리를 지켰더란다.
무언가 부탁을 받았던 듯했으나, 그 뒤로는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불안한데.’
아파태는 혹 자신이 말실수를 하지는 않았는지 아주 정확하고 날카롭게 추측하였으나, 천성이 견디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어차피 쏟아낸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고민한다고 사라진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닌 만큼, 아파태는 사고를 정지한 채 숙취가 깨기를 기다렸다.
* * *
그로부터 한 시진 뒤 아파태는 숙취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것이 축하할 소식이라면, 축하하지 못할 소식은 또한 아파태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듯한 심적 고통을 마주했다는 점이었다.
“차관 덕분에 당국의 주요 쟁점이었던 군사력 증강이 빠르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어……. 음.”
아파태는 뒤늦게 자신의 기억을 허둥지둥 파헤쳤으나 기상 직후에도 거의 남지 않았던 기억은 무책임한 사고의 정지와 함께 흩어진 지 오래였다.
만약 수행원이라도 대동하였으면 밤새 벌어진 일을 추궁이라도 하겠으나, 홀로 의주를 탈출한 그에게 동행은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차관. 밤새 긴히 해주신 말씀이 조정 밖으로 새어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어지는 조선 왕의 친근한 말에 아파태는 자신의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망극할 따름입니다.”
“……아직 숙취가 심한데 내가 무리해서 부른 건 아닌가 미안해지는군요.”
조선의 왕은 신경 쓰인다는 투로 말하자 아파태는 일단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아니옵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아파태는 자신의 과오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억의 흐름은 늑대가 잘근잘근 씹어다가 물어간 듯 멀쩡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말실수를 한 건 분명했으니까.
최악의 조합이었다.
자신이 어디까지 말실수를 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단지…….”
“단지?”
“지난밤 취기 때문에 결례를 끼치지는 않았을까 염려할 따름입니다.”
아파태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실수를 떠보자, 왕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어젯밤에는 무척 즐거웠으니까요. 경도 그렇지 않습니까?”
왕이 오른쪽을 돌아보자, 신하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자가 고개 숙였다.
“그러하옵니다.”
신하는 짧은 대답과 함께 자신을 보더니 종잡을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가 입술을 말고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
아파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말실수를 했기에 저리 대놓고 좋아한단 말인가?
아파태는 도저히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자신의 머리를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조선의 왕은 그리 삭막한 사람이 아니어서, 겁을 주는 건 이쯤으로 충분하다는 듯 손을 내밀어주었다.
“차관께서 어젯밤 나눈 이야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시는 건 아닌지, 나야말로 걱정되는군요.”
“…….”
아파태는 감히 확언하지 못하고, 그저 비 맞은 개처럼 불쌍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취중에 나온 말이라 나 역시 기억이 분명치 않을 수 있습니다. 영상, 차관이 홍태주洪太主가 기교나 부리는 자라고 말하였던가요?”
“그러하옵니다.”
홍타이지는 사대패륵 중에서 가장 후계자에 가까운 자.
그런데 취기에 뒤에서 모욕했다니, 아파태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목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터무니없는 발언으로 치부하기에는 평소 자신의 생각이 그렇지 않았다.
아파태는 이 순간이 잔혹하게 느껴졌지만, 조선의 왕은 태평하게 어젯밤의 일을 되짚어 나갔다.
“그리고 홍태주의 뒤통수를 먼저 깨버리겠다고 하셨지요.”
“제…… 제가 말입니까?”
“이건 명확하게 기억합니다. 내가 차관을 응원했거든요! 그렇지요?”
왕이 고개를 돌려 물으니, 아까 그 신하가 긍정했다.
아파태는 이제 세상에서 증발해 버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어쩐지 그런 말이 오갔다는 듯한 기억이, 빌어먹게도 어렴풋하게 되살아난 탓이었다.
맏형인 추연이 무수한 전공에도 허무하게 죽어버린 이유가 무엇이던가?
다른 유력한 형제와 노골적으로 반목한 탓이었다.
후계의 자리는 불투명한데 경쟁자는 많으니 서로의 사이가 좋지 않은 건 당연할 수밖에 없으니, 전례가 있으니 다들 진심을 숨기고 이합집산하며 다른 경쟁자를 쳐내고자 한다.
그런데 자신이 가장 유력한 후보자인 홍타이지를 이토록 노골적으로 비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가장 먼저 죽는다……!’
곧바로 다른 형제들에게 물어뜯겨 형체조차 남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제가 취기에…… 너무 터무니없는 말을 했나 봅니다.”
“말실수였다는 말입니까?”
추궁과 같은 질문에 아파태는 속으로 벌벌 떨면서 답했다.
“한의 자손들은 하나의 숙원을 위해 모두 힘을 합치고 있습니다. 이따금 반목하는 일은 있지만, 잠깐일 뿐입니다. 제가 최근 형제와 다툰 일이 있어 송구스럽게도 동요했던 모양입니다.”
“그럼…….”
“…….”
“나와 힘을 합쳐 아민을 죽이자던 약조도 말실수였습니까?”
“……?!”
“아민을 처치하여 차관께서는 염원하던 패륵의 자리를 차지하고, 나는 변방의 혼란을 다스리고. 각자의 이익을 위해 분명하게 합의된 줄로 알았습니다만.”
조선의 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실망감에 적개심마저 묻어나는 어조로 덧붙였다.
“그게 말장난에 불과했다면 나는 아주 기분이 나쁠 것 같군요, 차관…….”
* * *
입조를 마친 아파태는 돌풍 맞은 갈대처럼 부들거리면서 숙소로 향했다.
신하들은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아파태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입을 가리고서 실소를 흘려댔다.
개중에서 가장 극적인 반응을 보인 건 이조참의 김류였다.
그는 한 발자국 나서, 곧장 용상을 향해 손을 모았다.
“성상께서 타고난 기지로 야만스러운 호차를 굴복시키시니, 오랑캐는 제 꾀에 걸려 자승자박自繩自縛한 셈이고, 아조는 노추의 자식을 종으로 부리게 되었으니 이는 종사에 더없이 큰 복이옵니다.”
이어서 좌의정 박홍구도 손을 모으고서 나섰다.
“호차를 잘 구슬린다면 오랑캐들의 무리에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나라를 보전하고 천하를 유지할 계책이옵니다.”
신하들이 돌아가면서 찬탄을 내뱉으니 한 바퀴 도는 데도 꼬박이었다.
그만큼 아파태를 굴복시킨 게 기쁘다는 거지.
아파태는 돌발행동으로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었고, 하마연에서는 오만한 태도로 왕과 맞서려 들었으니까.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한 후 발호하는 후금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던 신하들에게 원수 같은 노추의 자식을 굴복시켰다는 건 달콤한 복수였다.
“경들은 입을 모아 나를 칭송하지만, 실상 나의 공로는 순간의 기지를 발휘한 것뿐입니다. 오늘날 성과의 원인을 분별하자면 세자가 호차를 잘 구슬려 스스로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한 덕인데, 그 배후는 제신이 힘써 세자를 교육했기 때문이니, 어찌 나 혼자 칭송받을 일이겠습니까?”
신하들이 금칠한 만큼 나 역시 신하들을 금칠해 주니, 마치 우애 좋은 형제가 서로를 챙겨주는 듯해 마음이 뿌듯했다.
이래서 공공의 적을 만드는 거로군.
이런 분위기에 취해 화기애애한 상태로 해산하는 것도 좋겠지만, 중대사는 객관적으로 마주해야 했다.
“아파태가 당장은 기세를 잃고 굴복하였으나, 그가 숙소에서 숙고하다 보면 어떻게 결심할지 모를 일입니다.”
좌절한 채 저항을 포기할 수도 있겠으나, 정면으로 맞설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으며, 철면피를 깔거나 혹은 의주에서처럼 또 한 번 탈출을 기도할지도 몰랐다.
“그가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시간을 주는 게 좋겠습니다.”
이에 병조참의 이귀가 물었다.
“호인이 혼란스러워할 때, 마저 몰아붙이는 게 좋지 않겠사옵니까.”
“심정에 최소한의 가닥도 정해지지 못한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몰아붙이면, 협의가 잘 진행되었어도 나중에 의향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그랬다간 합의 과정에서 노출되었을 우리의 전략이 아깝다.
“호차의 심경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 말주변 좋은 신하가 약조의 구체화를 논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에 이원익이 물었다.
“만약 호차가 약조의 이행을 내켜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겠사옵니까?”
당사자는 한 적도 없는 약조의 이행 여부를 논한다니 이것도 어처구니는 없다만, 그러게 왜 남의 나라에 와서 지시도 어기고 기고만장이야?
외교라는 중대사를 띠고 온 인물이 즐길 거 다 즐기고 약점을 드러냈으니 개 같이 물어뜯기는 건 순리다.
“우리에게 수단이 많다는 건 호차 본인도 알고 있을 테니 너무 몰아붙이지는 마세요.”
“좋게 구슬려도 끝내 불응할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억지로 목줄을 채우려 했다간 도리어 손만 물릴 수 있으니 무리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호차는 후금이 조선과 이어지는 것을 어떻게든 경계하고 훼방 놓을 터인데, 이만해도 나쁠 건 없지요.”
이에 이귀가 다시 나섰다.
“하오나 강 너머 오랑캐들은 대명을 핍박하고 아조를 겁박하였습니다. 만약 호인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자중지란을 일으킴이 어떻겠습니까?”
이귀의 호전적인 종용에 여러 신하가 긍정했다.
아파태가 약점을 다 드러내고도 고분고분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이들로서는 괘씸하게 여겨지는 것이리라.
“아파태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돌아보지 못한다면 병조참의의 말씀대로 되겠지만,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건 적절한 때가 될 것입니다.”
“……?”
“아파태는 권력의 중심인 패륵에 들지 못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패륵과 싸우게 되면, 결과는 뻔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잠깐의 혼란뿐이다.
“한 번만 가능한 일이니 낭비하기는 아깝지요.”
서두르지 말고 기회를 보아서 더 요긴하게 써먹자는 말에, 이귀도 딱히 반대할 생각은 없었는지 손을 모으고서 물러났다.
오늘따라 신하들이 많이 공손해지는군.
“지금 내가 제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 그리고 제신께서 지켜주셔야 하는 건 각별히 말조심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이원익의 말에 신하들이 일제히 끄덕였다.
이 좋은 기회를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서 망쳐 버린다면, 대역죄나 마찬가지니까.
그것을 신하들도 잘 알고 있다니 다행이었다.
다만 아파태도 똑같이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실수했다는 게 문제지.
만약 누군가 아파태와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한강 바닥의 생김새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부디 명심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노파심이 아닌, 모두를 위한 진심 어린 걱정으로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