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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77화 (77/380)

인조, 명군이 되다 77화

조선의 신하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신의 치명적인 말실수를 낱낱이 전해 들었을 때.

아파태는 사고가 정지했다.

그리고 정신이 나간 채 숙소로 귀환해 시체처럼 쓰러졌다.

그로부터 채 반 각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파태는 실책을 과감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쏟아진 물과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까.

대신 아파태는 위기를 기회로 탈바꿈하기로 했다.

차라리 조선과 적극적으로 내통하여, 한위의 강력한 경쟁자들을 제거하기로 말이다.

본디 원치 않았고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인지라 자존심은 크게 상하였으나 이때의 상처는 한이 된 다음 갚아주어도 그만이었다.

‘조선은 한이 되어 직접 정벌해 버리면 되니까…….’

그러면 모든 게 해결이다.

아파태 본인이 생각해도 기발한 계획이었다.

그래서, 숙소를 방문한 이원익은 당혹했다.

아파태가 비틀거리며 어전을 벗어나던 모습이 여전히 선명하거늘 계획의 구체화에 자신보다 더 적극적이었으니까.

상식인으로서 아파태가 처음 말실수했을 때도 진의를 의심했던 이원익으로선 재차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의 앞에서 많이 당혹하셨던 듯했습니다만, 이렇게 열의를 보여주시니 이 사람도 기쁩니다.”

발언의 의도를 읽어낸 아파태는 태연하게 의자에 늘어진 채로, 한쪽 팔은 늘어뜨리고서 답했다.

“그때는 취기에 말실수하지는 않았을까 염려되었고, 하교를 들어보니 전하께서는 저를 크게 용서하였던지라 송구한 마음에 경황이 없었지요.”

“지금은 진정되셨나 봅니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조선 국왕 전하의 후덕한 인품을 알게 되었으니 저 역시 안심하고 약조의 이행을 논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파태는 자신만만하게 이를 보이면서 웃었다.

위기를 기회로 받아들였으니 더는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아파태의 과도한 당당함에 이원익은 곧바로 그에게 복심이 있음을 알아채었으나, 내심 안도했다.

우려했던 이중 배신이 아니라 그저 도랑부터 치고 가재까지 잡아보겠다는 안일한 사고였으니까.

“참으로 다행입니다. 지난 하마연에서는 막연히 약조만 맺어두고 어떻게 이행할지는 논의하지 않았는데, 이참에 이 사람과 계획의 구체화를 논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를 말이겠습니까.”

두 사람의 미소가 교차했다.

* * *

아파태는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기합리화를 해버렸다. 내게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없다만, 보나 마나 경쟁자들을 다 치운 다음 한이 되어서 조선을 정복하겠다는 뻔한 생각이나 하지 않았을까?

계획은 원대하다만 나는 되묻고 싶다.

홍타이지가 죽으면 산해관은 누가 넘냐?

누르하치도 넘지 못한 게 산해관이다.

그런데 패륵에도 들지 못한 인물이 한이 되어 조선을 어떻게 해보겠다니 가소로울 따름이다. 그전에 후금이 고사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상상은 누구나 자유인 법. 아파태가 원대한 야망의 실현을 위해 악착같이 협조하고, 구차하게 버텨준다면, 나야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이 대대적인 외교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

만성적으로 부족한 국고를 연회로 탕진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지만, 나는 나를 기념하지는 않아도 세자의 업적은 기념하고 싶었다.

“개천에서 용이 났어!”

나는 저마다의 술상을 낀 대신들 앞에서 세자를 끌어안았다.

“아비는 오랑캐 구워삶는 것을 포기했는데 세자가 내가 해내지 못한 일을 대신 해주니 참으로 자랑스럽구나!”

“……아, 아니옵니다.”

세자는 얼굴을 붉힌 채 움츠러들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칭찬을 들으려니 부끄럽겠지만, 신하들도 누가 공을 세웠는지 알아야지.

어전에서는 함께 세자를 교육한 모든 신하의 공으로 돌렸다만 진심은 아니었다.

양녕대군을 봐도 그렇다.

태종과 당대의 능신들이 다 달라붙어 장장 15년을 가르쳤는데 끝내 양아치 같은 품성을 버리지 못했지. 오죽하면 그 태종이 울면서 폐세자를 결심했을까?

그러니까 오늘날의 성과는 순전히 세자가 잘 타고났기 때문이다.

신하들의 공로?

신하가 한 게 뭐가 있어, 훼방만 놨지!

“어휴, 너는 어찌 이리도 사랑스러우냐?”

“부끄럽사옵니다…….”

“네가 부끄러워한다고 내가 그만두겠느냐?”

세자의 이마에 입술을 박아대니 우의정 조정이 말했다.

“민망한 말씀 거두어주소서. 용은 용이 낳는 법이지, 어찌 개천이 용을 낳겠사옵니까?”

우의정…….

모든 집안이 다 그렇다면 견부호자와 호부견자라는 말이 왜 있을까?

인간쓰레기 인조의 핏줄에서 세자처럼 착하고 똑똑한 아들이 나왔으니, 이게 개천에서 용이 난 게 아니라면 무엇이냐.

인조의 뒤를 이었던 효종도 제 아비는 월등히 능가하였으니 인체의 신비란 참으로 놀랍다. 내가 보기엔 인조가 자신의 인간성과 지성을 고환에다 따로 분리해 둔 것 같거든.

“세자가 나를 닮아 이토록 장래가 밝다면, 경들의 후사 역시 경들을 닮았을 것이니 우리 다음 대에서 후금이란 한낱 사서에서만 보게 될 것이요, 이 자리에서 공신 아닌 사람이 없게 될 터인데, 우상께서는 확신하십니까?”

조정은 술잔을 받쳐 들고서 말했다.

“반드시 그러할 것입니다.”

“오, 그래요? 내 만약 눈을 감을 때까지 후금이 망할 조짐이 없다면 우상의 묘소에는 풀 한 포기 남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벌주를 잔뜩 부어버릴 테니까.”

“신은 확신하오니 감히 윤음을 마음에 두지 않겠나이다.”

나는 좌중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까?”

이에 신하들 모두가 술잔을 받쳐 들고서 감히 왕의 엄포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것 보아라, 세자야. 신하들이 이리도 괘씸하구나.”

과장되게 앓는 소리를 흘리니 제신들이 입을 모아 웃었다.

“세자야! 부왕이 망신을 당하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테냐?”

“아, 아니옵니다.”

“빨리 못된 신하들에게 벌을 내려주어라. 마침 이 사람들이 벌 받을 준비가 되어서 손에 잔을 받치고 있구나!”

세자와 눈높이를 맞춘 채 신하들을 가리키니, 세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감히 아바마마를 욕보이시니, 제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제공들께서는 모두 벌주를 마시세요!”

신하들은 목소리를 높이는 세자가 마냥 귀엽고 가상했는지 잔을 슬쩍 높이고서 답했다.

“예에!”

“명을 받들겠나이다!”

연회는 금세 왁자지껄해졌고, 나는 세자와 함께 자리로 돌아가 훈훈한 분위기를 즐겼다.

* * *

그날 늦은 밤.

편전의 문을 열어놓은 채 업무를 보고 있으니, 문득 부르지 않은 손님이 나타났다.

대문을 통해 뜰로 들어선 손님은 무수한 인원에게서 호종을 받고 있었다.

궐내에서 이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손님이 뒤편으로 손짓하자 뒤따르던 인원들이 멈춰서고, 편전을 지키는 궁인이 나아가 맞이하니 역시 손님은 손을 저어 쫓아냈다.

화등의 일렁이는 불빛은 손님이 있는 곳까지 닿지 못하였으나, 나는 그녀의 정체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짐작대로, 뜰을 가로질러 다가온 손님의 정체는 중전이었다.

나는 세필을 벼루에 기대둔 채, 서안을 밀어내고 나아가 계단을 내려갔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어인 거동이십니까.”

“오늘 즐거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앞날에 대한 걱정을 덜었고, 세자는 더 자랑스러워졌지요.”

대답과 함께 때마침 구름이 걷혔다.

중전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요 속에서 나를 한참이나 주시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도 그 기쁨을 공유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나는 중전을 집무실로 안내했다.

집무실은 처리된 문서와 처리를 기다리는 문서가 서안 좌우로 쌓여 공간을 분리하고 있었다.

중전은 그 광경을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보았고, 나는 용상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함께 앉으시겠습니까?”

“왕의 자리에 제가 함부로 앉을 수는 없습니다.”

“비단 방석을 깔고 등받이를 조각했다고 왕좌가 아닙니다. 내가 앉는 그 자리만이 왕좌지요.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나는 중전에게 다가가 빙긋 웃었다.

“내가 반란까지 일으켜 봐서 잘 아는데, 별일 없습니다.”

“…….”

중전은 눈이 동그랗게 되어서 쳐다보더니, 이내 눈을 감고는 콧김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을 붙잡은 채 공문의 벽을 넘어섰다.

* * *

“간밤에 중궁이 주상을 찾아갔는데, 별다른 일은 없었소?”

“대비마마…….”

바로 옆집이라고 그새 소문이 들어갔나 보다.

괜히 얼굴 비추러 왔네.

“왜 말씀이 없으시오. 말 못 할 일이라도 벌어졌소?”

“우리가 모자의 관계라지만 엄연히 거리감이 있는데, 부부생활에 과도한 관심은 안 가져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대비는 눈이 가늘어져서 불평했다.

“나는 부부생활이라는 게 불가한 처지인데, 어미의 아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주기 싫다는 말이오?”

“국풍國風이 허용해 주었다면 새신랑이라도 소개해 드렸을 터인데 세상이 꽉 막힌지라 도리가 없군요.”

“……후우.”

대비는 한숨과 함께 질린 얼굴로 말했다.

“꽉 막힌 국풍보다는 뻥 뚫린 주상의 입이 더 문제인 것 같소.”

“대비께서 말년이 적적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만은 진심입니다. 그래야 아들 부부 사정에 관심도 덜 가지실 테니까요.”

“두 번 관심 가졌다간 내가 탄핵이라도 당하겠구려. 주상이 미친 소리를 하게 만든다고.”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민감한 부분이라고, 이거.

“그리고, 대비마마께서 관심을 가지실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떤 데 관심을 가진다고 그러시오?”

“대비마마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부분이 제가 일하고, 중궁은 쳐다보고, 저는 일하고, 중궁은 졸고, 저는 일하고, 중궁은 기대서 자고, 저는 일하는 게 아니지 않겠습니까?”

딱히 로맨틱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중궁이 워낙 생과부 노릇에 지쳐서 직접 찾아올 정도이니, 내가 이실직고는 못 해도 부부가 공유하는 시간을 궁색하게나마 가져보았을 뿐이지.

“흐음.”

대비는 콧김을 내쉬고는 말했다.

“아니요. 마음에 들었소.”

“예?”

* * *

“이게 말이 되나……. 싶기도 하고.”

군기시의 모 약장藥匠은 투덜대면서 가마솥에 똥물을 부었다.

오래전, 화약에 물을 부어 반죽한다는 기상천외한 사건이 있은 뒤로 모두가 왕의 통찰력을 긍정했다.

단순하지만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공정으로 화약의 위력을 단숨에 끌어올렸으니까.

‘하지만, 똥으로 염초를 만들어낸다고?’

아무리 왕의 통찰력이 대단하여도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수백 년 전 연단술사도 아니고, 어떻게 개나 소나 싸지르는 똥으로 진귀한 염초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그게 가능했으면 수은을 금으로 바꾸는 방법이 나오고도 남았지!

이내 가마솥의 똥물이 보글보글 끓으며 악취가 온 사방에 퍼졌다.

약장은 폐부로 깊게 스며드는 똥 냄새에 오만상을 찌푸린 채로 코를 막고 손을 휘저었다.

“어으으으윽!”

그런다고 똥물 부어진 가마솥이 도망가는 건 아니어서, 곧 폭심지에 가까운 사람부터 아침밥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똥통에 떨어져 똥물과 함께 삶아진다는 화탕지옥의 광경이 이러할까?

관리와 장인들이 악취를 피해 사방으로 도망치자 병조판서 김신국은 호령으로 만류하였으나, 그만큼 더 깊게 똥 냄새를 폐부에 담으면서 이내 그 역시 아침밥을 쏟아냈다.

“구와아악! 케흑! 컥! 어으윽, 웨엑!”

과연 화탕지옥의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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