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79화
“아바마마…….”
“응?”
세자가 민망한 얼굴로 답했다.
“하교해 주시는 건 지극히 감사하지만, 지금은 주제가 부적절한 듯합니다.”
“어째서 부적절하다는 말이냐?”
“아바마마께서는 수라를 들고 계시옵고, 소자는 곁에서 기미를 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나는 아버지의 실수를 지적한다는 가상한 행동에 세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벌써 이렇게 컸구나, 싶어서.
하지만 세자는 아직 세상의 경험이 부족했다.
“그래서 일부러 하는 것이란다.”
“…….”
“나의 부적절한 농담에 곤란해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재미있거든.”
“재미는 있겠으나 군왕의 품위에는 어울리지 않을 듯하옵니다.”
나는 세자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속삭였다.
“품위를 준수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실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단다.”
세자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곤혹스러워하다가, 금방 자신만의 이유를 찾아냈다.
“아랫사람들과의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서이옵니까?”
역시 세자는 머리가 똑똑한 말이지.
“하지만 나는 필요 이상으로 품위를 손상하고 있지 않으냐?”
“……예.”
나는 그 이유도 말해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자를 바라보았다.
세자는 부담스러운 듯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이번에도 금방 이유를 추측해 냈다.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이옵니까?”
세자는 대답하면서도 내키지 않는다는 투였다.
대신들을 불러 실전 사례를 알려주어도 듣고 방비하는 데 그칠 뿐, 반대로 무기로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는 세자였으니까.
순진하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그것이 통치의 정도正道이긴 하였다.
나는 일반인이니까 신하들을 상대하려면 사도私道를 애용할 수밖에 없는 거고.
“내키지는 않더라도 이런 방법이 있음은 알아두어라.”
“예, 아바마마.”
나는 다시 세자의 머리를 쓸어주고는, 원래대로 물러나서 물었다.
“그래서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똥물 졸인 가마솥에 흰 결정이 묻어나니…….”
* * *
조선의 왕이 앞에서는 병조판서의 위신 회복을 응원하고, 뒤에서는 천박한 말장난의 반응을 즐기는 동안…….
그보다 조금 서쪽에서는 상대방의 반응을 도저히 즐길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북경北京, 사신 숙소에서.
변무상사로 파견된 남이공은 예부상서禮部尙書 임요유林堯兪를 맞이해 문간으로 나아갔다.
“대인!”
손님을 맞이하는 남이공의 얼굴에는 가식적인 환대가 가득했다.
명나라의 예부는 조선의 예조와 마찬가지로 외교를 담당했다.
그리고 예부상서는 이러한 예부의 수장으로, 따지자면 외교부 장관이 직접 행차한 셈이었다.
목숨을 걸고 명나라를 방문한 남이공이 반드시 잘 보여야 할 사람이었고, 반대로 임요유는 남이공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안색은 단조롭다 못해 무심할 정도였다.
“대인.”
임요유가 형식적으로 포권을 맺고 풀었다.
남이공은 이어질 자리가 쉽게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짐작했지만, 그에게는 예부상서의 행차를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그러니 안쪽으로 팔을 뻗으며 억지스러운 환대를 이어갈 따름이었다.
“안으로 듭시지요.”
임요유는 고개를 까딱이고는, 한쪽 손을 등 뒤로 진 채 남이공의 안내를 따랐다.
이어서 두 사람은 숙소 안쪽에 자리했다.
사신단의 침묵과 긴장 속에서 시비가 양편에 다과를 전해주었고, 문을 닫고 물러나자 임요유가 곧장 입을 열었다.
“대인이 등주登州에서 올린 보단報單(통관 신고서)을 접수했을 때부터 경사京師에서는 왈가왈부가 많았소이다. 어째서일지는 대인께서 잘 아시리라 믿소.”
“대국에 물의를 일으켜 송구할 따름입니다.”
“……개중에는 다소 극단적인 주장이 있었다는 것 역시, 대인께서 유념해 주신다면 고맙겠소.”
누군가 들었다면 흉흉한 겁박으로 여겼겠으나 남이공은 한양을 벗어나기도 전에 각오했던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소관의 목이 붙어 있으니,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 거듭 망극할 따름입니다.”
“안심하기는 이르오.”
임요유가 단호하게 말했다.
“황상께서는 그대와 조선의 처분을 아직 결정하지 않았을 뿐, 무엇도 분명하지 않으니 말이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대인께서는 내가 이곳을 친히 방문한 이유를 짐작하셨을 것이오.”
남이공은 아는 체하는 대신 침묵을 지켰고, 임요유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손깍지를 낀 채 남이공을 마주했다.
“어찌하여 이전의 왕을 폐위하셨소?”
이미 등주에서도 오갔던 문답이다.
그러나 남이공에게는 여전히 사양할 권한이 없어, 임유원이 묻는 대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옛 왕이 덕을 잃어, 소경왕비昭敬王妃가 새로운 왕을 추대했습니다.”
“주문과 별반 다르지 않구려.”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왕에 대한 귀방의 여론은 어떻소이까?”
“대소 신민이 한마음이 되어 따르고 있습니다.”
“동강진을 파괴했을 때도 마찬가지요?”
임유원이 날카로운 질문을 날렸으나 남이공은 이전과 다르지 않은 어조로 답했다.
“변경과 백성들을 보전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으니, 따르고 말 게 있었겠습니까?”
“누구 하나 오늘날과 같은 오해를 우려하지 않았느냐는 말이오.”
“모두가 한마음으로 우려하였으나, 살기 위해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임유원은 재차 날카롭게 질문했다.
“조선이 오늘날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지난날 대명이 무수한 군사와 식량을 원조한 덕이거늘, 변방의 자그마한 혼란을 견디지 못하여 상국의 군사를 쳐 없앰이 옳았다는 말이요?”
“사견을 아뢰었을 따름입니다.”
“나는 귀방과 조선 국왕 전하의 입장을 물어본 것이오, 대인이 아니라.”
임유원의 추궁에 남이공은 민망한 얼굴로 답했다.
“소관이 어찌 감히 저하의 성심을 헤아리겠습니까? 폐방의 입장이라면, 주문에 담겨 있습니다.”
사신의 정석적인 대답이 달갑지 않다는 듯, 임유원은 손깍지를 풀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보시오, 대인.”
“말씀하시지요.”
“나는 지금 대인께 기회를 드리고 있는 거요. 당장 내 눈에 보이는 귀국의 행보만을 보고 폐하께 상주드린다면, 대인은 물론 조선 역시 엄벌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망극할 따름입니다.”
“말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일말이나마 나의 배려가 고맙게 여겨진다면 솔직히 말하시오. ……이게 다 무슨 수작이요?”
“어떠한 수작도 없습니다.”
“노적의 아들 중 하나가 귀방에 입국했다는 첩보가 들어왔소. 출처의 신뢰도는, 대인께서 대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정도고.”
“금시초문입니다.”
남이공은 당황하면서도 솔직하게 말했다.
바다를 건너 등주에 닿고, 등주에서 북경에 이르는 동안의 시간이 짧지 않았다.
그사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어찌 알겠는가?
등주에서 치계하였고 북경에 도착해서 다시 치계하였으나 돌아오는 소식은 없었다. 오가는 데만 이역만리이니 급박한 사정은 없는 줄 알고 무소식을 희소식으로 여겼을 뿐.
남이공이 이 같은 사정을 설명하자 임유원은 예상했다는 듯 이어서 물었다.
“그렇다면 대인께서 말씀해 보시오. 노추의 아들이 당도하였을 때 귀방의 조정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겠소?”
“여느 문명국가와 마찬가지로 오활한 야만인들의 행패에 분개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면 어째서 오해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노추의 아들을 입국시켰다는 말이오?”
조선과 후금의 결탁은 예부상서만이 아니라 명나라 전체가 우려하는 일이다.
가능성이 아무리 낮다고는 해도, 방심했다간 최악의 상황에 이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지난 임진년에도 명나라는 조선의 구원 요청에 먼저 왜와의 결탁부터 의심했다.
한데 이번에는 총병이 이끌던 동강진을 조선이 철저하게 분쇄해 버렸으니, 명나라가 더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당연했다.
반대로 남이공은 할 말이 궁색했다.
그저 원론적인 발언만 할 뿐.
“대인께서 우려하시는 상황만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걸 수 있으시오?”
“목숨뿐이겠습니까? 대인의 말씀처럼 조선이 종묘와 사직을 보전한 건 오롯이 폐하의 과분한 성은 덕분이거늘, 어찌 한순간에 은혜를 망각하고서 도리어 원수로 갚으려 들겠습니까.”
남이공은 곧장 덧붙였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건 압니다. 하나, 동강진의 일은 진심으로 전하께서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총병이 재보를 내놓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짜고짜 쳐들어오니, 별다른 수가 있었겠습니까?”
“…….”
“정녕 조선이 후금과 결탁했다면 어째서 소관이 오해를 종식하라는 명을 받고 이곳으로 보내졌겠습니까? 대인께서는 부디 통촉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남이공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자신이 명나라를 방문하는 사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지만, 조선과 후금이 결탁했다고?
터무니없는 모함이다.
차라리 동강진을 박살 낸 것으로 질질 물고 늘어졌다면 모를까!
억울하다 못해 오히려 이쪽에서 그런 취급을 해온 거냐고 도리어 따지고 싶을 정도다.
“……그게 해줄 수 있는 말의 전부요?”
임유원이 대수롭지 않게 묻자, 남이공은 폭발하려는 감정을 애써 추스르고는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소.”
“배웅해드리겠습니다.”
남이공이 함께 일어서자 임유원은 손을 저었다.
“문간까지 나아가는 길쯤은 나도 알고 있소! 아니면, 여기서 집주인 행세를 기어코 하시겠소?”
“……아닙니다.”
“그렇다면 쓸데없는 짓은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되오. 나중에라도 내게 할 말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연락하시고.”
“예.”
“다음에는 더 솔직해져서 봅시다, 대인.”
“…….”
겉옷을 정돈한 임유원은 고고하게 자리를 빠져나갔고, 그가 완전히 숙소를 벗어나자 남이공은 다 식어빠진 찻잔으로 목을 축였다.
그래도 갑갑해진 가슴이 울화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 * *
그동안 숙소 밖에서.
“어땠습니까?”
동행한 하관의 물음에 임유원이 답했다.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더군.”
“속고 있는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뭐, 내가 말인가?”
“그자가 말입니다.”
“조선이 우리를 배반할 생각이고, 사신은 그저 시선을 돌리기 위한 용도에 불과하다면 목숨값이 아깝지 않은 인물을 보냈겠지.”
“아닙니까?”
“이름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네.”
죽어도 되는 사람을 던져놓은 게 아니라, 사신으로서 경험이 있는 인물을 선발했다는 뜻이다.
그만큼 조선이 이 일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왕이 바뀌었다니, 구신을 숙청할 의도로 보낸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글쎄. 지금 왕은 구왕舊王의 총신들을 한꺼번에 처단한 뒤 더 특별한 숙청은 벌이고 있지 않다는군.”
“반란 직후의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위장일 수 있잖습니까.”
“자네 짐작처럼 조선의 왕이 아주 간교한 작자라서 신하들의 눈을 가린 채 알음알음 숙청하고 있고, 차도살인의 일환으로 사신을 우리에게 보낸 것이라면, 나는 조선의 왕을 존경할 수밖에 없겠군.”
“예?”
“반란을 일으키기 전부터 대명을 배신하고 신하들을 어떻게 숙청할지 정해두었다는 뜻이 아닌가. 동강진과 모야毛爺를 없애버린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사실일 가능성이 현격히 낮은 가정이었다.
그러나 반씩은 옳았다.
조선의 왕이 찬탈 직후 숙청을 신속히 마무리 지은 건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가 맞았지만, 이는 숙청을 위한 위장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또한 신하들 모르게 알음알음 숙청이 일어나고는 하였으나 이는 구왕에게 충성했던 자들을 향한 것이 아닌, 재차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큰 자신의 공신들이 대상이었다.
그리고 동강진과 모문룡을 없애기로 한 건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이 맞았지만, 남이공이 명나라에 파견된 건 차도살인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임유원과 명나라의 관리들은 조선의 왕이 배신까지는 아니어도 임진년의 은혜를 잊고 사대하는 도리를 망각한 건 아닌가 우려하였으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조선 왕에게 명나라란 금방 망해 없어질 나라였기에 염두에 있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망국의 생각은 상상으로도 해본 적 없는 임유원이었기에, 순진하게 조선의 왕을 어떻게 대명의 편으로 붙들어놓을지 고민만 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