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80화
남이공이 예부상서의 방문을 받은 뒤, 열흘째가 되어서도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렇다 말이 없었다.
이쯤 되니 죽음을 각오했던 남이공마저 긴장을 다스리고 숙소를 나섰다.
혹여 죽는다면 이참에 즐겨보자는 생각도 없었던지라, 북경 일대의 명승지를 들쑤셔댄 남이공은 금세 명나라의 하급 관료 및 선비들과 면식을 트게 되었다.
현지의 식자 및 실직자들과 면을 트게 된 건 분명 좋게 이용할 여지가 있었고, 그건 국경 너머의 사신을 마주하게 된 현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남이공은 현지인들과 서로 소식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동안 가장 잘 팔렸던 이야기는, 친우와 함께 경회지에 입수한 이야기였다.
“하하하!”
“그럼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두 분을 엄하게 벌할 수 있었음에도, 가벼이 치죄하고 중직에 기용한 셈이로군요?”
왁자지껄한 웃음에 이어 분석에 뒤따르자 남이공이 답했다.
“예. 전하께서는 호방하시고, 벌을 내리실 때는 인색하시지만, 사람을 쓸 때는 그렇지 않으시지요.”
남이공은 자신의 왕을 무척이나 흥미로운 사람으로 소개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충성심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고, 솔직하게는 자신을 사지나 다름없는 이역만리 명나라에 던져버린 데 원망도 있었으나, 남이공에게는 공무가 있었다.
‘살아서 돌아가게 되면 최대한 많은 소식을 가지고 가는 게 이로울 테니까.’
부디 전하께서 자신의 불경을 용서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또한, 전하께서는 학문과 공무를 게을리하지 않으시고 병법과 시문에도 조예가 깊으십니다. 그러니 당연하겠지만, 대국에도 관심이 많으시지요.”
이상적인 군주라면 명나라에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왜냐?
명나라는 천하의 중심이고, 문명과 학문의 정점이니 당연히 고개를 들어 주시할 수밖에 없다…….
대강 그런 느낌으로 국뽕을 자극하면, 이 기고만장한 대국의 선비들은 아무리 과묵한 사람일지라도 ‘가상하신 번국의 전하’를 위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북적北狄의 소식이야 조선 국왕 전하께서도 잘 아실 것이니, 대신 남방의 이야기라도 괜찮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재작년 여름인가, 광동廣東 향산현香山縣 앞바다에서 털이 붉은 사람들끼리 싸움을 일으켰다는군.”
남이공이 온몸에 붉은 털이 뒤덮인 원숭이를 상상하는 동안, 명나라의 선비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꺼냈다.
“나도 그 소식 들었네.”
“온 바다가 쩌렁쩌렁 울렸다지.”
“예전에 그 말을 듣고도 오랑캐들끼리 싸워봐야 얼마나 요란하겠느냐, 싶었는데 홍이포를 보니 이해가 되더구만.”
선비는 남이공을 바라보며 두 팔을 펼쳤다.
“홍이포란 이렇게 그러모아도 손 끝이 서로 닿지 않을 정도로 길고 두꺼운 대포요. 상상이 되시오?”
“어음….”
남이공은 실물을 본 적이 있었지만, 호사가들이 더 떠들 수 있도록 맞장구나 치기로 했다.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군요.”
“조선에서도 홍이포를 도입한다면 북적을 소탕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요, 아무튼….”
이어서 다른 선비가 끼어들었다.
“털 붉은 오랑캐라고 하지만 다 같은 오랑캐가 아니요. 본디 저들은 포도아葡萄牙라는 하나의 부족을 이루고 살았는데, 소부족인 화란和蘭이 반기를 들어 다투게 된 것이 오늘날에도 이르게 된 것이지.”
남이공은 홍이포를 얹으려면 배가 얼마나 커야 할까, 생각하다가 이내 섬이나 진배없을 거대한 평저선을 떠올렸다.
바다에서 온 오랑캐들이라 하였으니 그 같은 배에 의지하여 무리를 이루고서 망망대해를 떠돌아다니는 것일까?
홍이포와 같은 거대한 화포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덩치가 상당해야 할 터이므로, 남이공은 곧 꺽다리인 오랑우탄을 상상해냈다.
“역시 대국의 식자들은 견문이 남다르십니다. 분명, 지금 해주신 말씀들은 전하께서도 깊게 관심을 가지시겠지요.”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나무배-섬과 그 위에서 살아가는 꺽다리 오랑우탄들이 무수히 모여서는 바다가 울릴 정도로 그 거대한 대포를 갈겨댔다는데 누군들 흥미가 돋지 않으랴?
하지만 남이공은 그보다 더 실용적인 정보를 얻고 싶었다.
“다시 이 사람 차례군요.”
누구도 번갈아 말하자고 약속하지 않았으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굳이 마다하는 사람은 없었다.
명나라의 하급 관리와 선비들은 곧장 입을 닫고 경청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입니다.”
일가의 안녕에 대한 걱정으로 전전긍긍하던 그 시절.
“이 사람은 아직 전하의 후의를 입기 전이었고, 그래서 어깨너머로 전해들었던 것이라 분명치 않을 수 있습니다.”
“괜찮소이다.”
한 선비가 다독이자 남이공은 작은 미소로 답하고서는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회의를 파하시기 직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내가 천하의 안녕을 위해 기어코 노적을 처단해야겠는데, 오랑캐의 기세가 날로 승승장구하여 힘이 미치지 못함이 천추의 한이다.”
“….”
“그러니 놈의 수급이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고취하지 말라.”
고취란 왕이 행차할 때나, 가마나 연을 타고 내릴 때 연주하는 의전 음악.
해석에 따라서는 원한을 갚기 전까지는 왕 대우를 받지 않겠다는 결의처럼 비치기도 했다.
그 단호한 결의에 하급 관리와 선비들이 숨을 삼켰다.
일국의 군주라고는 하나, 대명과 비교하면 조선의 세력은 일개 성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소국의 군주마저 이처럼 결의를 다지고 있을진대 대명의 주인과 대신들은 과연 어떠한 태도로 노적의 처단에 임하고 있던가?
명나라의 관리와 선비들은 대국의 일원으로서 자부심이 넘쳤던 만큼, 대국의 치부도 자신의 일처럼 부끄럽게 여겼다.
한 관리는 손을 모으고서 말했다.
“부차夫差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섶에서 잠을 청했고, 구천勾踐은 쓸개를 핥으며 원한을 되새겼으니, 그들이 끝내 복수한 것은 각오를 다졌기 때문이지요.”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살이호지전薩爾滸之戰의 치욕을 잊지 않고자 고취를 금하셨으니, 하늘이 도와 복수하실 것입니다.”
이에 남이공도 손을 모았다.
“어찌 복수의 몫이 조선에만 있겠습니까? 오랑캐의 준동으로 대국과 소국을 가리지 않고 무수한 인명을 상하였으니, 노적이 효수된다면 양국의 창이 서로 기대어야 할 것입니다.”
“대인의 말씀이 지극히 온당합니다.”
“기실, 이 사람은 폐방이 대국에 오해를 빚게 되어 변무상사로 입국하였습니다. 죄가 있다면 벌을 받는 것이 이치이나, 억울함을 하소연하러 왔다가 도리어 벌을 받게 되면 통탄스럽게 될 것이니, 근심이 가득합니다.”
“음.”
“부디 대인들께서 전하와 폐방을 구명하는 데 조금이라도 이로울 계책이 있다면, 기탄없이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다들 현지인이고, 이 자리에는 실직자도 있으니 중앙에 대해 몇 마디는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남이공은 그런 기대감에 하소연했으나 다들 미안하고 멋쩍은 얼굴로 시선만을 교환할 뿐, 시원하게 한 마디라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흘렀고, 좌중에서 그간 별말 없이 오가는 대담을 경청하였던 구경꾼 선비가 입을 열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지 않습니까?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의리를 다하고자 절치부심하시고, 또 남 대인께서도 귀방과 주인의 안녕을 진심으로 우려하시니, 반드시 하늘의 도움이 닿을 것입니다.”
이에 할 말이 없어 침묵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긍정했다.
“그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요, 정성은 하늘도 감동시킨다지 않습니까?
“남 대인. 들으셨지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위안과 위로가 뒤이었으나 달리 기대하는 바가 있었던 남이공은 멋쩍은 미소만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리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달라지고, 또 기대심리도 확 꺾여버린 관계로 남이공은 슬슬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응원해주시니 이 사람의 마음도 한결 놓이는군요.”
남이공은 동석한 이들에게 일일이 감사를 표하고는 덧붙였다.
“갑자기 투정을 부렸습니다. 다음에는 이번 것보다 훨씬 가볍고 재미난 소재를 가져올 테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이공이 일어서자 여러 사람이 만류하였으나, 남이공이 성큼성큼 자리에서 멀어지자 억지로 쫓아와 붙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남이공이 숙소로 귀환하자 수행원들이 맞아주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수행원들의 어색한 환대와 함께 남이공을 맞아주는 건 아침 때보다 부쩍 늘어난 짐이었다.
사신단의 정사正使는 어떻게든 나라를 구하겠답시고 동분서주하는데, 수행원이라는 작자들은 알량한 이문에 눈이 멀어 장사하기 바빴다니.
“다과를 내오라 할까요?”
“…그러게.”
한심한 모습들이었으나 남이공은 굳이 지적하는 대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입에 물고만 있었던 한숨을 내뱉었다.
“휘유.”
오늘의 외유는 성과가 좋지 못했다.
붉은 털투성이 오랑캐들에게 포도아와 화란이라는 부족이 있으며, 그들이 사이가 좋지 않고, 서로 싸웠다는 소식은 분명 흥미로웠으나 그뿐이었다.
언젠가 다시 예부상서를 상대하게 되거나, 명나라 조정에 입조하게 되었을 때 도움 될만한 정보를 원했거늘.
북경의 백성들은 가장 핵심적인 영역에서는 좀처럼 입을 열어주지 않았다.
왕을 가상한 인물로 포장하여 내세워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곳 경사京師에서 철저하게 외부인이니 당연하지.’
나라의 내밀한 사정을 외국의 고관에게 친절하게 알려줄 사람이 어디 있겠나?
‘다음에는 술값이라도 가져가야겠구나. 독주라도 몇 잔 입에 넣어주면 달라질지 모르니.’
남이공은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으나, 그것을 이행할 기회는 없었다.
그날 저녁 깜깜무소식이었던 명나라 조정에서 남이공의 입조를 요청했으니까.
그리고 남이공이 예상치 못한 것이 있었다.
* * *
북경에서 가장 깊숙한 구중궁궐에서.
막 이십 대의 반열에 오른, 훗날의 희종熹宗 천계제天啓帝는 자신이 타고난 재주를 아낌없이 발휘했다.
자금성 안에 또 하나의 자금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태화전太和殿은 이런 느낌으로 중건하면 좋겠는데.”
천계제는 작업에 몰두한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으나, 그의 뒤편에서 윤음을 듣는 이가 있었다.
병필태감秉筆太監.
환관조직인 사례감司禮監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위로, 이름처럼 황제의 붓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다.
그러나 병필태감이 관리하는 건 붓만이 아니었다.
명대의 첩보 기관인 동창東廠 역시 병필태감의 관리하에 있었다.
그리고 병필태감은 오늘 붓이 아닌 첩보의 보고를 위해 황제의 처소를 방문한 참이었다.
조선의 변무상사가 꽤 흥미로운 발언을 했으니까.
노추의 목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고취를 금했다던가?
훌륭한 각오였다.
그러니 병필태감이 이 사소한 보고를 굳이 어전까지 나와 올린 데는 다른 목적도 없잖아 있었다.
“태감太監의 생각은 어떠한가?”
다만 평소와 마찬가지로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뿐.
“폐하…….”
“아, 조선에 대해서는 짐이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천계제는 과거 조선왕이 보인 가상한 기개를 떠올렸다.
조정에서 염초를 보내자, 사은과 함께 임진년 때 싸우다 죽은 천병의 무구를 바친 것이다.
그날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는 의도에서였다.
감수성 풍부한 천계제에게는 썩 인상적인 회답이었다.
“게다가 사신까지 그리 말했다면 조선왕의 충심은 더욱 의심할 필요가 없지.”
“송구하오나 조선 왕의 신용는 아직 완전히 검증된 것도 아니거니와, 설령 철저하게 믿을 만한 사람일지라도 신뢰를 무한히 보여주어서는 아니되옵니다.”
짐승과 마찬가지로 사람 역시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조율해야 잘 부려먹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천계제에게는 병필태감의 충언도 사족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쯧!”
천계제는 자신이 직접 깎아 만든 석영 돋보기와 깨알처럼 작은 가짜 기와의 전용 집게를 내려놓고서 돌아보았다.
“태감은 짐과 말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아니옵니다.”
“그런데도 내게 똑같은 소리를 또 하고, 짐 역시 또 똑같은 소리를 하게 만드는군!”
“송구하옵니다.”
“알아서 잘한다는 조선 왕을 굳이 자극하지 마라, 귀찮게!”
천계제는 이쯤으로 끝내자는 듯 휘휘 손을 저어버리고는 다시 자금성 모형에 집중했다.
그 실망스러운 모습에, 병필태감은 마음을 바꿨다.
황제가 이 지경이니 차라리 조선 왕이라도 밀어주어 노적을 대비함이 옳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