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81화
천계제의 의향은 곧 명나라 조정의 재상들에게 전해졌다.
개중 십중팔구는 군주의 무책임한 행보에 내심 질색하였으나, 의제를 두고 반분하였던 조정의 추를 기울이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된 이상 대인의 뜻대로 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병부상서 우겸于謙이 말하니, 일시에 시선을 그러모으게 된 예부상서 임요유가 답했다.
“나라고 조선왕을 신뢰하는 건 아닙니다. 제공이 말씀하셨듯 우리 눈에 보이는 건 불온한 행보뿐이지요.”
조선에서 실제 어떠한 일이 벌어졌느냐는 논의가 끝난 지 오래였다.
명분을 준 것은 모문룡이며, 노추의 아들이 국경을 넘은 건 이간을 벌이려는 얄팍한 수작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재상의 입이 여전히 달궈지는 건 조선을 향한 외교 방침의 재고 때문이었다.
과연 조선은 신뢰할 수 있는 우방인가?
신뢰하기 어렵다면 지금부터 견제함이 옳지 않은가?
임요유가 다시 말했다.
“세간에서 퍼지는 소문과 달리 우리는 조선의 왕이 간교하며 탐욕스럽다는 것을 압니다.”
변무상사가 데려온 모문룡과 이하 쓰레기들의 증언에서도 공통적인 부분은 있었다.
조선을 공격한 건 맞지만, 먼저 조선의 왕이 군비의 지급을 중단했다는 점.
그리고 조선을 공격한 직후 빠르게 대응이 있었다는 점.
사로잡은 포로들을 환송하기 전 분열을 야기한 점.
이 같은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변무상사를 파견하였으나, 정작 사신이 가져온 뇌물은 극도로 형식적이라는 점.
절대로 순종적인 자가 벌일만한 행적은 아니다.
“하지만 북쪽에서는 말 탄 오랑캐들이 준동하며, 남쪽에서는 배를 탄 오랑캐들이 준동하고 있지요.”
누르하치의 위협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양광兩廣 앞바다에서는 포도아와 화란이 엄연히 대명의 영토인 섬의 패권을 두고 싸운다.
“홍모이간의 다툼은 지금이야 남의 집 불구경이겠으나, 그 다툼이 끝난 다음 용처가 없어진 전선과 대포의 끄트머리를 어디로 돌릴지 모릅니다.”
서로 다투기 이전에는 변방을 침탈하며 양민을 잡아갔던 홍모이다.
그리고 그 다툼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는, 이미 북쪽에서 야인들을 규합한 누르하치가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비록 조선의 왕이 간사하다고는 하나 천하의 대세는 여전히 중원에 있은즉, 그래서 먼저 칼을 뽑아 든 것이 아님에도 압박을 가한다면 새로운 적만 늘어날 따름이지요.”
모문룡의 발악에도 조선이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적절하게 대처해냈다는 점은 위협이자, 동시에 기대감이 되어주었다.
마치 홍모이의 대포가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대명의 득실이 달라지듯이 말이다.
“그래서 조선왕의 간교한 술책에 엄벌은커녕 포상이나 하라는 말이오?”
우겸의 의문이었다.
황제의 결정으로, 그동안 몇 번이나 거듭되었던 이 질문도 지금에서는 공허한 항의에 지나지 않게 되었으나 임요유는 전과 마찬가지로 잔잔히 답할 따름이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입니다.”
우겸 등은 그렇게라도 위안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이 간교하고 탐욕스러워 지난날의 은혜를 잊고 대명의 군영을 치는 경천동지할 사건을 벌였음에도 징치하지 않고 도리어 포상하는건,
당장 대명의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다스리는 방편이라고.
“손님을 불러들입시다.”
* * *
황궁을 나선 남이공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보름 가까이 말 없던 명나라 조정에서 갑작스레 호출이 있기에 잔뜩 각오하고 나갔더니, 호령은커녕 칭찬만 듣지 않았던가?
-모毛는 패장의 신분에도 돌아와 속죄하지 않고 귀방의 땅에 눌러앉아 갖은 횡포를 부렸으니, 예전부터 징벌을 마음에 두었는데 종倧이 나서주어 국법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포상이 이어졌다.
-조선은 대대로 충근忠勤을 드러내었고, 종이 이미 왕위에 봉해주기를 청하였으니, 마침 공을 세운 바가 있어 조칙을 내려 포장하고자 한다.
-이에 이종李倧을 특별히 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으니, 산길 물길로 조공을 잘 바쳐 윗사람 섬기는 공손한 태도를 잊지 말고, 동서로 호응하는 진영을 이루어 원수를 함께 토벌하는 용맹을 분발하라.
주청사奏請使가 아님에도 졸지에 책봉하는 조칙을 떠안게 된 것이다.
본국이 가도의 일로 주청을 서두르지 못하던 차에, 남이공이 변무상사는 물론 그 이상의 일까지 해낸 것이다.
온전히 자신의 공으로 삼기에는 해낸 것이 많지 않으나…….
다른 사람의 공로가 있었던 것도 아니잖은가?
북경에서 예부상서를 상대한 사람도, 하급 관리와 선비들에게서 쓸만한 정보를 수소문하였던 사람도 오롯이 자신이거늘.
남이공은 어쩌면 자신이 공신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확신은 없었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가정이었다.
이제 다시 목숨 걸고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 * *
일 년을 구성하는 절기도 한 바퀴를 완주하여 다시 입춘立春에 이르렀다.
그 이름처럼 봄에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맹추위는 기세만 꺾인 정도였고 하늘이 조금이라도 침침해지는 날에는 어김없이 눈발이 휘날렸다.
그럼에도, 조선의 왕은 한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난겨울 왕에게는 두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몰년沒年에 이른 좌찬성이 훅 가지는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동안 좌찬성이 지침을 잘 따랐는지, 겨울 초입만 하더라도 팔팔하였는데 어느새 잔기침을 달게 되었으니까.
한겨울에도 지침을 따라 한양을 활보한 탓이었다.
이제는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 견딜 수 없다던가?
왕은 날이 풀릴 때까지 자중하라는 당부와 함께 약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좌찬성보다 더 걱정했던 건 세자였다.
기실 세자는 좌찬성과 달리 한겨울에도 아주 멀쩡하였다. 젊은 혈기 덕이리라.
하지만 내리사랑이 과한 아비의 눈에는 그런 세자마저 바람 불면 꺾일 수숫대처럼 비칠 따름이었다.
“건강에 이상은 없느냐?”
“예.”
“기침도 안 하고?”
“예.”
“몸이 으슬으슬하지는 않더냐?”
“예.”
“이따금 귓불이 뜨거워지지는 않고?”
“……이따금 그러하옵니다.”
“어의를 보내마!”
“그것뿐이옵니다, 아바마마.”
세자가 질색한 얼굴로 답했다.
이것이 부왕의 내리사랑이며, 자신 이전에도 무수히 많았을 세자 모두가 지금 같은 행운을 누리지는 못했음을 안다.
하지만 부왕이 걱정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무릎에 앉혀둔 채 숨통이 조일 정도로 끌어안고 있으니 질색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숨 막히옵니다, 아바마마.”
“이 정도로 죽지는 않는단다.”
왕은 버둥거리는 세자를 한 층 더 끌어안은 채로,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습니까?”
이에 입동 한파를 헤치고 입궐하느라 코가 빨갛게 되어버린 좌찬성 이상의가 끄덕였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대답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가래가 끓는 듯하더니, 급히 소매를 들어 기침을 막는 이상의였다.
그새 재빠르게 몸을 틀어 세자를 피신시킨 왕이 말했다.
“고뿔이 잘 가시지 않는 모양입니다.”
“말년의 몸뚱이가 다 그렇지요.”
“기껏 세자에게 가르침을 청하고자 하였는데, 좌찬성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시니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습니다.”
“신이야…….”
좌찬성이 괜찮다고 덧붙이려는 찰나, 세자를 옆으로 끌어안은 왕이 고개를 저었다.
“크흠, 흠. 송구하옵니다.”
그제야 왕은 세자를 풀어놓고는 자상한 얼굴로 말했다.
“기껏 서궐에서 와주었는데 미안하게 되었구나.”
“아니옵니다, 아바마마. 소자는 아바마마를 뵌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어이구, 가상하여라.”
왕은 세자와 이마를 비비고는 팔을 풀어주었다.
“온 김에 대비마마께 인사하고 가거라.”
“예.”
그렇게 세자가 인사를 올리고 물러나자 이상의는 자신이 볼 일이 없음을 알고 바닥을 짚었다.
그 순간, 왕이 먼저 용상에서 일어나서는 손을 내밀었다.
“어디를 가시려고요?”
“신이 원래 세자께 가르침을 내리려고 입궐하였는데, 세자께서 퇴궐하셨으니 신도 이만 물러나야지 않겠습니까?”
“그 추위를 뚫고 오셨는데…….”
이상의는 말만이라도 고맙다는 듯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고, 그에 맞춰서 왕도 마저 일어섰다.
“이제 따뜻한 곳으로 오셨는데 찬바람 다시 맞으시면 고뿔만 심해지십니다. 서두르지 말고 쉬다가 가세요.”
“신이 어찌 궁궐에서…….”
마음 놓고 편하게 쉴 수 있겠냐는 말에, 왕도 자리가 좋지 않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관?”
“부르셨사옵니까.”
“이 어르신 가는 길에 갖옷 한 벌 둘러주세요.”
“그리하겠나이다.”
내관이 심심하게 답하고 멀어지자, 하사품을 받게 된 좌찬성이 즉시 허리를 숙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갖옷이란 짐승의 털가죽을 이용해 만든 외투로, 그 자체만으로도 귀한데 하물며 왕의 하사품이다.
십중팔구는 최상품의 소재로 여겨지는 초피貂皮로 만든 것일 터.
그리고 예로부터 왕이 내리는 반사초피頒賜貂皮는 총신의 상징으로 여겼다.
“성은이 이토록 분에 차고 넘치니, 이승에서는 다 보답하기 어렵겠나이다.”
“최대한 끈질기게 버텨보세요. ……좌찬성이 잘 지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보답이 되니까.”
적신賊臣이나 반신叛臣이 아닌 한에야 여느 신하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상의는 그저 감읍하는 마음에 머리를 땅에 대고 또 대었다.
왕이 세자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다고는 여겨왔지만, 그래서 언제 신하 아끼는 마음이 꺾였던 적이 있던가?
“반드시 잘 요양하고 수신하여 망극한 은혜에 답하겠나이다.”
“예.”
금세 최 상선이 돌아와 하사품이 될 갖옷을 보였다.
겉에는 비단을 둘렀고, 목덜미에는 안감으로 쓴 초피가 겸손을 망각한 채 드러나 있으니 과연 이상의가 내심 기대하였던 반사초피였다.
그러나 왕이 꼭 초피 갖옷을 가져오라고 명한 적은 없었던지라, 상선이 에둘러 왕의 의향을 확인했다.
“옷의 크기가 찬성에게 맞지 않는다면 다른 옷을 가져오겠나이다.”
왕은 친히 내관으로 나아가 갖옷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눈치껏 일어선 이상의의 가슴팍에 대 보더니, 이상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콧김을 내쉬었다.
“한 치수 큰 거 같기도?”
이상의는 호흡도 잊은 채 침만 꼴딱 삼킬 뿐이었다.
설령 추한 노욕으로 비칠지라도, 괜찮다고 둘러대고 싶다는 말이 움찔움찔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뭐어, 한 치수 커도 어차피 겉에 걸치는 옷이니.”
“그, 그러하옵니다.”
이상의는 저도 모르게 답하고서 가슴이 철렁하였으나, 왕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진귀한 반사초피가 눈앞에서 왔다리, 갔다리 하는데 좌찬성이고 뭐고 냅다 물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을…….
“이러면 갈 때 덜 춥겠지요?”
왕은 그런 이상의의 관복 위로 친히 갖옷을 둘러주니, 이상의는 민망하고 또 망극할 따름이었다.
“벌써 훈훈하여 여름이 온 듯합니다.”
그렇게 왕이 좌찬성과 함께 즉조당을 나서니, 막 맞은편에서 도승지 이덕형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덕형은 마침 등장한 왕의 모습에 예부터 표하려다가도, 관복 위에 초피갖옷을 걸친 이상의를 보고는 눈이 동그래져서 주춤했다.
그 뻔한 반응에 이상의는 한껏 어깨가 올라갔고, 이덕형은 주춤하였다가 뒤늦게 허리를 숙이고서 나아가 아뢨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