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82화
“무엇을 경하드린다는 말입니까?”
도승지가 직접 찾아와 전하는 걸 보니 보통 희소식은 아닌 듯한데, 생각해 봐도 딱히 그만한 소식이 없었다.
나비효과로 누르하치가 몇 년 일찍 죽기라도 했나?
그렇다기엔, 누르하치의 사인이었던 영원성 전투가 아직 벌어지지 않았는데.
“변무상사로 파견되었던 남이공이 북경에서 치계하기를, 가도의 일을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책봉하는 조칙까지 받았다고 하옵니다.”
“오…….”
예상치 못했던 결과네.
가도의 일이 흐지부지될 거라는 자신은 있었다.
아직도 누르하치가 멀쩡히 살아서 산해관 바깥을 차지한 채 몽골의 세력을 야금야금 파먹고 있지 않은가?
‘그런 후금에 양면전선을 강요할 수 있는 조선과 척을 진다는 건 자존심 센 명나라라도 무리수지.’
3세기 뒤 유럽의 모 콧수염쟁이처럼 관자놀이에 딱총이라도 댈 게 아닌 이상에야 말이다.
그러나 이상의는 굉장히 놀란 듯했다.
“경하드리옵니다!”
이상의는 무척이나 감격한 얼굴로 고했다.
“오늘날에 이르러 나라의 우환이 해소되고 경사스러운 소식까지 전해진 것은 온전히 전하의 소양과 인품이 바다 건너에도 미쳐 황제를 감복시켰기 때문이옵니다.”
그런가…….
내가 명나라 상대로 해준 거라곤 후금과 싸울 때 쓰라고 하사한 화약으로 동강진을 쓸어버린 것밖에 없는데 말이지.
저지른 것만 보면 명나라 기준에서는 어디서 보기 힘든 소양과 인품이긴 하다.
트집거리 생긴 김이랍시고 이때다 싶어 어깃장이라도 놓았다간 곧바로 후금과 편 먹고 쳐들어올 미치광이쯤으로 보였을지도 모르지.
그러거나 말거나, 이상의는 여전히 기뻐 보였다.
“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속히 백관과 신민에게 알리시어, 하례를 받으시옵소서!”
“뭐 얼마나 대단한 소식이라고…….”
그러자 이상의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말했다.
“그동안은 매양 주청사를 거듭 보낸 다음에야 각로閣老가 상의한다, 육부六部가 논의한다, 갖은 뜸은 다 들이고서야 조칙을 내렸는데, 이번에는 모毛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의사를 피력한 것이 전부지 않사옵니까?”
과연 공식적인 주청사가 파견된 적은 없었다.
“하온데 이번에는 조칙을 먼저 내렸으니, 이례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원인을 상고하자면 오롯이 성상께서 해동海東의 혼란을 수습하고 크나큰 덕으로 포용하시며, 변방의 수비를 탄탄히 했기 때문 아니겠사옵니까?”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더니 찬양 일색에도 뼈가 있었다.
혼란을 수습했다는 건 이미 내가 빼도 박도 못하게 왕이 되었으며, 크나큰 덕으로 포용했다는 건 나의 지배가 이미 확고해졌다는 뜻이다.
변방의 수비를 탄탄히 했다는 건 동강진을 일순에 쓸어버릴 정도로 군사력이 막강해졌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책봉하지 않겠다면,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뻐길 수는 있겠지.
그런데 이쪽은 변무상사는 보냈어도 주청사는 안 보냈다.
해명할 일이 있는데 무엇을 요구하겠느냐만, 선조와 광해군 때 이미 복수의 목적을 지닌 변무주청사가 파견되어 해명과 부탁을 동시에 한 적이 있었다.
그런 사례가 있는데, 나는 안 했단 말이지?
‘그런데 앞으로도 내가 주청사를 안 보내면 명나라는 개망신이니까…….’
갈 때가 다 된 제국은 손절이고 조선은 각자도생하겠다는 의도가 가시화되면, 제국은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공인 당하는 셈이다.
이 역시 명나라가 허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
반대로 동강진의 일을 용서치 못하여 단죄를 결의하더라도 실행에 옮길 힘이 없다.
그만한 힘이 있었으면 애초에 요동이 여전히 후금의 땅이겠는가?
명나라가 보일 반응은 애초에 정해져 있던 셈이다.
‘그래도 이례적이긴 하다만.’
조금 더 늦은 시점에서 책봉되리라고 예상했으니까.
필사적으로 갈구하지 않아도, 명이 중원을 빼앗기면 살려달라는 의미에서 알아서 조칙을 내리리라고 짐작했다.
그보다 일찍 조칙을 받아들게 된 건 그만큼 가도에서의 실령행사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겠지.
“보아하니 대명이 이례적인 경우를 만든 건 오롯이 나만의 공이 아니요, 나라가 영묘조英廟朝와 마찬가지로 인재가 넘치고 신민은 충정으로 애국하니, 군신이 합치하여 국체를 드높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각기 다른 손으로 이상의, 이덕형과 악수한 채 덧붙였다.
“그러니 이 순간이 찰나의 호시절로 기억되지 않도록 계속 정진합시다.”
두 사람은 여부가 있겠냐는 듯 악수한 손을 포갠 채 허리 숙였다.
* * *
남이공이 가져온 조칙을 받드는 행사가 있었고, 조정은 한 시름 놓았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번졌다.
그러나 백관과 달리 다 죽어가는 제국을 떠받드는 건 내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게…….”
춘풍春風이라고 부르기엔 여전히 살벌한 칼바람이 몰아치는 시기였으나, 나는 친히 군기시로 나아가 완성된 신무기를 마주했다.
“소小 홍이포입니다.”
병조판서 김신국이 포차에 탑재한 신형포를 소개했다.
소 홍이포는 원본의 박력은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작고 앙증맞았으나, 포구에서 쏘아질 포탄의 위력은 그렇지 않을 터였다.
때마침 17세기의 야전은 이 같은 소형 대포가 화력을 책임지던 시대.
원본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어 타협을 봤다고는 하지만, 시의적절했던 셈이다.
“소 홍이포는 원형인 홍이포보다 훨씬 작고 가벼워, 이처럼 포차에 탑재한 상태로 우마는 물론 사람이 끌어서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이옵니다.”
그렇다면 성능은 어떨까?
포구는 소형화된 만큼 작아졌지만, 야전의 용도라면 포탄의 크기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아무리 작은 포탄이라도 얼마든지 인마의 대오를 무너뜨릴 수 있으니까.
그러니 포구 지름보다 중요한 건 이거겠지.
“사거리는 어떻습니까?”
“포탄이 5리里까지 나아가나, 위력을 발휘하는 거리는 이에 조금 미치지 못할 것이옵니다.”
5里는 대략 1.5 킬로미터.
원본과 비교하면 많이 짧아졌으나, 총통류와 비교하면 압도적인 사거리다.
그렇다면 효율은 어떨까.
“방포에 들어가는 화약의 양은 얼마나 되지요?”
“일곱 냥이옵니다.”
김신국이 손짓하자 장인이 주머니를 가져왔다.
원본인 홍이포가 화약을 아예 자루에 담아놓고서 사용하는 것을 응용해, 장전하기 쉽도록 7냥을 소분한 것이리라.
“머리를 잘 쓰셨습니다.”
김신국은 그저 망극하다는 듯 고개 숙이고서 말했다.
“포신 길이가 비등한 천자총통과 비교하면, 소 홍이포는 사분지 일에 불과한 화약을 써서 곱절은 멀리 쏘아 보내니 참으로 유익하다 할 수 있사옵니다.”
천자총통의 구경이 두 배나 크니 많은 화약을 사용하고도 사거리가 짧은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소 홍이포가 압도적으로 유용하다.
기존의 총통류는 청동만으로 제작되었는데, 많은 양의 화약을 사용하는 만큼 포신도 두꺼워 많은 청동을 소모했다.
그러나 소 홍이포는 훨씬 적은 양의 화약을 사용하니, 포신 제작에 금속을 아낄 수 있다.
‘그마저도 내부는 주철을 사용해서 값비싼 청동을 절약하니, 천자총통 하나 만들 비용으로 소 홍이포를 몇 개는 만들겠지.’
그리고 포문의 숫자는 곧 화력.
요란한 포성과 함께 대들보를 날려 보내는 것도 박력은 있지만, 대포 하나 보다야 네 개가 훨씬 박력 있지 않을까.
특히, 맞는 입장에서는 말이지.
“몇 개를 더 만들어서 북방군에 보내세요. 원수들의 반응을 참고해 개선할 점이 있다면 개선하고, 원한다면 더 만들어서 보내도록 합시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북방군 원수들이 소 홍이포의 가치를 몰라보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더 많은 화력을 마다할 지휘관이 어디 있겠나?
프리드리히 대왕은 대포가 자칫 천박한 다툼에 불과할지 모를 전쟁에 품격을 부여한다 했고, 나폴레옹은 신이 가장 강한 포병대가 있는 군대의 편이라 했지.
나는 북방군이 품위와 신성을 갖추길 원한다.
* * *
전 세계적인 소빙하기의 추세를 등에 업고 봄까지 기승을 부리던 추위도 끝내 시간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사내들이 멋들어지게 길러놓은 콧수염마다 성에 끼는 날도 사라지고, 거리의 행인들은 그저 봄철다운 선선함에 하나둘 외투를 벗어갔다.
덕분에 초피 갖옷을 자연스럽게 과시하기 힘들어진 좌찬성이 입맛을 다시고, 다른 의정부 대신들은 내심 그 늙은이 꼴사나운 모습을 더 안 보겠다 싶어 안도하던 차.
왕이 서궐로 행차했다.
흔치 않은 거동이었다.
본디 왕은 애써 지어놓은 궁궐을 보전할 요량으로 방대한 서궐 권역을 모조리 동궁으로 삼았다.
그리고 자신은 광해군에게 공사의 남발로 민생파탄의 죄를 물은 몸으로서, 선왕이 소싯적 임시로 쓰다가 남긴 경운궁을 영구한 처소로 삼은 지 오래였다.
그러니 양 궐의 주인이 서로 만날 일이 있다면, 대개는 세자가 부왕을 찾아가는 편이었다.
왕이 세자를 보고자 일일이 서궐로 거동할 수는 없으니까.
이는 일국의 군주 된 지체와 품위에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왕이 드높은 지체에 상응하는 품위를 고수해왔냐는 별개로 치더라도) 자식이 부친을 거동하게 만드는 건 불효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왕은 다만 이따금, 세자책봉처럼 세자와 관련된 대사를 주관할 때나 친림할 따름이었다.
대개는 이러하였으니 왕의 급작스러운 방문에 서궐의 궁인들은 혼비백산이었다.
“저하, 전하께서 탄 가마가 지척에 이르렀다고 하옵니다.”
기습적인 방문에 놀란 건 궁인들만은 아니어서, 내관이 헐레벌떡 달려와 알리니 세자도 뻔히 들었던 소리를 되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바마마께서요?”
“그러하옵니다. 늦기 전에 속히 궐문으로 거동하소서.”
내관은 의향을 묻는 게 아니라는 듯, 섬돌에 놓인 신발을 받쳐 들었다.
세자는 보통 이런 자잘한 수발은 사양해왔으나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대청 끄트머리로 나온 세자는 두 다리를 뻗친 채 내관이 신발을 신기는 동안 의관을 정제했다.
부왕 없는 서궐이라고 평소 복색을 함부로 하지는 않았으나, 만약 놓친 바가 있어 예법에 어긋난다면 자신을 세자로 삼은 부왕께 얼마나 많은 근심을 안길 것인가?
터벅터벅, 세자는 섬돌 아래로 내려와 신발을 맞추며 물었다.
“괜찮아 보입니까? 부왕께 결례가 되는 일은 없겠지요?”
“예. 다만….”
내관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쓸어넘기자, 세자는 곧장 흘러내린 머리칼을 망건 아래로 밀어넣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궐문으로 행차하시지요.”
“예.”
세자는 꼴깍 침을 삼킨 채, 익선관이 흔들리지 않도록 양손으로 고정하고서 내관의 뒤를 따랐다.
앞선 사람은 허리를 푹 숙인 채 나아가고, 뒤따르는 사람은 벌이라도 서는 양 머리를 감싼 채 나아가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우스꽝스러울 광경이었다.
그러나 서궐의 궁인과 위사들은 온통 왕을 맞이하는 데 정신이 팔려 남을 신경 쓸 상태가 아니었다.
다들 혹여나 왕이 이 구석까지 당도하는 일이 있을까 하여 마당을 쓸고 마당을 닦으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눈알만 굴려댔다.
그리고 마침내 가마가 궐문 앞에 당도하였을 때.
궐문 일대의 분주함이 뚝 잘라낸 듯 멎었고, 서궐 깊숙한 영역 곳곳에서는 검지에 입술을 댄 궁인들이 잰걸음으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가마에서 용포 자락과 함께 발이 내려오는 순간.
궐문 앞에 선 세자와 시위, 궁인들의 기합이 일제히 최고조에 달했고, 그 광경에 왕은 난처한 얼굴로 고민할 따름이었다.
‘부담스러우니까 다신 오지 말라고 항의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