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83화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하였는데, 환대가 과하구나.”
궁인이고 시위고 바짝 긴장해서는 제멋대로 기가 빨려 면면마다 창백하거나 식은땀을 흘려댔다.
분위기가 이래서야 아빠가 아들 보러 온 게 아니라, 왕이 각 잡고 시찰하러 온 거 같잖아.
“소, 송구하옵니다. 아바마마.”
또 세자는 풀이 죽어서는 고개를 숙이고…….
“질책하는 게 아니란다.”
일단은 부드럽게 다독였으나, 세자의 안색은 펴지지 않았다.
“들어가자꾸나. 사람들은 해산시키고.”
“예.”
주변을 향해 손짓하니 긴장해 있던 궁인과 시위들이 예를 올리고 흩어졌다.
그리고 세자를 감싼 채로 서궐에 들어서니, 한동안 잊고 지냈던 청기와 지붕들이 맞아주었다.
“이 녀석아. 얼마나 대단한 실수를 했다고 풀 죽어 있느냐?”
“…….”
“당장 웃지 않으면 웃을 때까지 꼬집어주마.”
엄지와 검지로 집게를 만든 채 들이미니 세자가 흠칫 놀라며 웃었다.
우울한 기분은 가시지 않은 채 반사적으로 지은 웃음이었고, 또 그것이 유쾌하지는 않다는 듯 억지스러운 기색이었다.
아주 당연한 반응.
그래서 볼을 꼬집어주었다.
“앗!”
“마지못하여 웃는 게 괘씸하여서 한 번은 꼬집어야겠다. 싫으냐?”
“……아니옵니다.”
말은 그러면서도 입술은 나온 게, 억울하다는 투였다.
그래도 그편이 침울한 것보다는 보기가 좋았다.
나는 세자를 더 끌어안고서 속삭였다.
“선물을 가져왔는데 마음에 들는지 모르겠구나.”
그러자 세자는 곧장 반색해서는 답했다.
“선물이요?”
“그래.”
나의 확언에 세자는 얼굴을 붉혔다. 빠르게 성숙했다지만, 그래도 한참 선물이 좋을 나이지.
“아바마마께서 소자에게 내려주시는 것인데, 어찌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디 보자꾸나. 금방 도착할 게다.”
선문답 같은 대답에 세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선물의 정체를 유추하려는 거겠지만, 아무리 총명한 세자라도 맞추지 못할 거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역사상 최초로 기록될 테니까.
* * *
세자가 서궐을 전용한다지만, 실제 세자가 이용하는 영역은 일부에 불과했다.
예비 왕일지라도 대전에서 신하들의 조회를 받거나 편전에서 업무를 보는 건 불가능하니까.
방대한 궁궐의 전각 상당수가 쓰이는 일 없이 최소한의 손길만 닿고 있으니, 비좁은 경운궁에서 지내는 나로서는 일대가 을씨년스러우면서도 기묘하게 느껴졌다.
비어 있을 때보다 더 한산하게 느껴질 정도.
부친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사가에서 아옹다옹 살아왔을 세자도 감상은 크게 다르지 않겠지.
“홀로 지내려니 심심하겠구나.”
중궁과 형제들도 서궐에서 지내지만, 궁전은 방대하고 이용하는 영역은 다르니 동네만 같은 꼴이다.
문안 때를 제외하면 따로 보는 건 손에 꼽을 정도겠지.
세자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듯 답했다.
“예.”
세자는 짧은 대답에 이어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이어하신다면 덜 심심해질 것이옵니다.”
“으음…… 나는 자리를 옮기기가 힘들구나.”
“아바마마는 이 나라의 주인이지 않사옵니까?”
“그러니 더욱 이어하기 힘들단다. 내가 군림하는 자라 하여 수신하지 않고 방종한다면, 어느 신하와 백성이 나를 믿고 따르겠느냐?”
세자가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님은 안다.
하지만 지금은, 아들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다.
내가 어전에서 이따금 노골적인 언행을 일삼으며 신하들을 압박할 수 있는 건, 적어도 이런 부분에서는 선을 고수하기 때문이니까.
“아바마마께서 서궐로 오신다면 어머니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음…….”
또 뻔한 소리를 할 수도 없고, 또 하고 싶지도 않아 조용히 세자의 머리만 쓸어내렸다.
그렇게 바람을 쐬고 있으니 궁인과 신하들이 찾아왔다.
대분 너머에서 반신반의한 얼굴로 등장한 손님들은 일행 끝자락에 작은 수레를 달고 있었다.
무언가 기물이 실린 채였고, 그 위에 천을 덮어놓았으니 정체를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
선물이 등장하자 세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동안 궁인과 신하들은 수레 주변으로 모여, 가까스로 수레를 대문 안으로 들어 옮겼다.
일행 중 하나였던 병조판서 김신국은 수레 앞에서 등판을 두들기며 탄식한 뒤에야, 나와 세자 앞으로 나아와 인사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병조판서.”
김신국은 겸양으로도 부정할 수 없었는지, 그저 수레가 덩그러니 놓인 마당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하명하신 대로 짐을 안으로 들였사옵니다. 그런데…… 이런 기물을 동궁에 들여놓아도 되겠습니까?”
“아니 될 건 어디 있답니까.”
선물의 정체가 무엇이건, 크고 무겁고 위험하다는 분위기를 폴폴 풍겨대니 세자는 흥분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서 보거라.”
“예!”
세자는 쫓기는 것처럼 뛰쳐나가 수레를 덮은 천을 걷어냈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려, 마치 투우사가 소를 유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반사頒賜하신 물품이 독특하니…….”
이때다 싶었는지 괘씸하게 한 마디 얹는 김신국이었다.
“내가 몹쓸 걸 내려줬답니까?”
너무 예상치 못한 선물이라 실망한 거라면, 구차하게라도 마음을 돌려볼까 싶어 우뚝 굳어버린 아들에게 나아갔다.
“세자야…….”
조심스러운 부름에 아들이 고개를 돌렸다.
아들은 선물을 덮었던 원색의 천은 한 손에 그러쥔 채, 멋쩍은 미소를 하고 있었다.
“아바마마.”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건, 여전히 얼굴이 발갛게 달아 있었다는 점이었다.
“정녕 이런 기물을 소자에게 내려주셔도 되옵니까?”
잔뜩 흥분 어린 목소리였다.
“그게, 병조판서가 신무기를 연구할 때 실험하고 남은 시제품이란다.”
소 홍이포라고…….
“실용성은 있지만, 양산형과는 사양이 다르니 내려주어도 무방하지.”
세자는 수레를 반 바퀴 돌아가 맞은편에서 소 홍이포의 포신을 쓸어내렸다.
“소자가 대포를 가지게 될 줄은 몰랐사옵니다!”
“이건 그냥 대포가 아니란다.”
“예?”
“애완용 대포지.”
세자는 두 단어의 조합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냐는 듯, 자신의 청각을 의심하는 얼굴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공부가 재밌다던 녀석이 이런 반응을 할 줄이야.
“드넓은 궐에서 혼자 지내려니 적잖이 적적할 터라 동무를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산 짐승은 헤아리기 어렵고 언젠가는 떠나보내지 않느냐?”
그래서 대포를 가져왔다.
“쇳덩이와 무슨 교감을 하겠느냐고 되물어볼 수 있겠지만, 때때로 기름칠하고 비가 올 때는 피신시켜 녹슬지 않게 잘 대해준다면, 불한당이 신변을 위협할 때 세자를 지켜줄 거란다.”
그거면 개가 외부인을 보고 짖는 것과 똑같지.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개는 밥을 먹으며 단지 짖을 뿐이나 대포가 화약과 쇠를 먹고 짖으면 외부인이 사망에도 이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세심하게 관리하거라.”
“예, 아바마마.”
나는 수레를 돌아 세자와 이마를 맞댄 뒤, 물러나서 말했다.
“아비가 오래간만에 서궐로 행차했으니 세자와 더 함께 있고 싶지만, 피차 일정이 있으니 지금은 해산해야겠구나.”
세자는 아쉬운 마음이 컸는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발길을 안 돌릴 수는 없었다.
“병조판서?”
“예에.”
“돌아갑시다.”
그렇게 김신국과 함께 대문으로 나아가니 세자가 쫓아왔다.
“곧 시강侍講이 있을 텐데 나오지 말고 쉬거라.”
“……예, 아바마마. 대포는 잘 관리하겠사옵니다.”
“나중에 또 진귀한 기물이 생기면 선물해주마.”
그제야 세자는 만족한 얼굴이 되었다.
아쉬운 기분을 억지로 달래는 느낌도 없잖아 있었으나, 이번 한 번만 보고 말 게 아니었으니까.
손을 흔들어준 뒤 과감하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대문에서 멀어지자 김신국이 물었다.
“신에게 하교해주신, 대포를 반사하는 이유는 어째서 밝히지 않으셨사옵니까?”
아니면, 단지 자신을 속이고 세자에게 특이한 선물을 했을 뿐인가.
조심스럽기는 하였으나 그리 추궁하는 저의가 느껴졌다.
“세자는 영민하니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말하지 않아도 의도를 고민해보겠지요. 내가 엉뚱한 행보를 여럿 보였지만, 그렇다고 이유도 없이 대포를 툭 던져놓고 갈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세자에게 대포를 선물한 이유는 정도正道 외의 방법도 있음을 각인하기 위해서였다.
살벌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초빙해 가르침을 전해도 이런 일도 있었구나, 이상의 수확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좌찬성을 불렀을 때도 그랬지.’
이상의는 자신이 가르칠 위기 사례로 폐모론을 꼽았다.
환국이 아닌 이유는, 당시 북인 잔당들은 처분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이상의는 자신을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은 궁극적 계기인 폐모론을 위기 사례로 설파했고, 생존을 위한 선택이 때로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 수 있음을 가르쳤다.
‘그래서 자신이 폐모론 때의 좌찬성이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지 말해보라 하니…….’
유학을 배운 사대부로서 충효를 고수하겠단다.
물은 흐르고 불은 뜨겁다, 수준의 뻔한 정론이었으나 당시 사대부들이 그걸 몰라서 폐모론에 찬동했겠는가.
그렇다고 세자가 달리 할 말이 없어 뻔한 소리나 욀 정도로 무식한 아이가 아니었고, 대답하면서도 반란을 일으킨 아비와 폐모에 찬동했던 중신의 눈치를 보는 것이 딴에는 진심이 분명했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옳은 선택이었지만, 만약 광해군이 더 잔혹했거나 인조가 반란에 실패했다면 어떻게 됐겠어?’
우직하게 충효를 고수한 사람들은 재평가받을 일도 없이, 연산군 때 직언을 고한 김처선처럼 죽임이나 당했겠지.
그러니 아비로서 걱정될 수밖에 없다.
자식이 선심을 베풀고 정직하게 사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상처로 돌아오는 일은 없도록 사람과 상황을 잘 분별하는 영악함 역시 갖추기를 바라는 게 부모의 마음 아니겠나?
정론도 좋지만, 정론만 쓸 수는 없다.
말만으로 계도하지 못할 인간이 많고, 선심만으로 타개하지 못할 상황 역시 많으니, 때로는 사도私道를 강구하는 게 최선일 수도 있다.
“말로는 이미 거듭 충고했으니까……. 들을 때까지 계속 다그치자는 식이 되어버리면 잔소리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래서 대신 눈에 보이는 상징을 선물했고, 진짜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세자가 아무리 영민하다지만, 일언반구 없으셨으니 어찌 흉금에 두신 깊으신 뜻을 짐작할까 저어되옵니다.”
“세자는 병조판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한 아이예요.”
확언에도 병조판서는 영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감히 불충한 생각이라도 하는 건지…….
“아니, 그럼 내가 세자에게 대포 하나 선물해 주려고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냈겠습니까?”
“소 홍이포가 이전의 총통류에 비해 동철銅鐵을 많이 아낀다지만, 그럼에도 소요되는 양이 적지는 않사옵니다.”
“왕이 장차 성군이 될 재목에 뜻깊은 교훈을 남기겠다는데 그깟 대포 하나가 아까우십니까?”
“나중에 또 진귀한 기물이 생기면 선물하시겠다고…….”
“쓰읍!”
김신국을 확 끌어당겨 헤드락을 거니, 김신국은 차마 저항까지는 못 하고 팔만 툭툭 두드렸다.
“저, 저언하!”
“내가 이래서 세자에게 대포를 선물한 겁니다. 세자가 마냥 순하고 성실하여서 경 같은 무뢰배가 맞먹으려 들어도 마냥 말만으로 다스리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말로 해서 안 됐잖아?
그러면 이렇게 사도私道를 동원하는 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