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84화
“자아, 내 말이 옳습니까. 틀렸습니까?”
“어찌 사대부가 되어 폭력 앞에 무릎 꿇을 수 있겠나이까!”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소리를 하는 걸 보아 김신국도 영 꾀가 없는 사람이었다.
“아악!”
“항복?”
“악!”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데요.”
“항복하겠사옵니다!”
신하의 패배 선언에 나는 팔에 준 힘을 풀고서 물었다.
“보세요, 병조판서. 세자도 나라를 다스릴 때는 이런 방편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팔에 감겨 있는 김신국은 잔뜩 눈치를 보면서 답했다.
“군주가 이같이 나라를 다스린다면 당장은 위기를 넘길지 모르나, 장차 더 큰 화근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병판.”
나는 주변을 확인하고는 김신국에게 속삭였다.
“여기서는 보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
“증인도 없이 왕에게 폭행당했다고 엄살이라도 부리실 겝니까?”
생존자가 없으면 학살을 벌여도 암살이라는 격언이 있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지.
신하들이야, 내가 공공연하게 저질러온 게 있으니 내심은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혹하겠으나 증좌가 없다면 음해나 마찬가지다.
곧바로 탄핵당하고 나락 갈 짓이지.
“……그래도, 당한 사람이 많아 원한이 생기고 여론이 응한다면 반드시 화액으로 이어지지 않겠사옵니까?”
얼핏 제 군주를 겁박하는 소리처럼 들렸지만, 이전과 달리 눈빛이 살아 똑바로 물어오는 게 딴에는 진지한 간언이었다.
“암. 그렇지요. 정도가 무조건 해답이 될 수 없듯이, 이는 사도도 마찬가지지요.”
“전하께서는 정도를 최소한으로 취하시고 사도는 애용하시니, 그것대로 화근이 있지는 않을까 저어될 따름입니다.”
김신국은 여전히 제압된 채로 호기롭게 말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이제 찢어지면서 꿀밤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중신이 진지하게 맞서니 나도 진지하게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일전의 도승지와 마찬가지로 나와 자신의 충성을 시험하는 것일지, 누가 알겠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사가에서 나고 자라 깊은 학문을 익히지 못하여, 당장에 해소하는 방편만을 모색할 따름이라 정도를 추종하는 것은 타고난 성정이나 재주에 맞지 않지요.”
그래서 길바닥 깡패 수준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느냐면, 그것은 또 아니잖은가?
때로 저지르고 내지르는 만큼 어떤 부분에서는 조심스럽고 세심하다.
오죽하면, 눈에 욱여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자의 부탁을 못 들은 척 넘어가겠는가.
“다만 자신의 재주와 품성을 때때로 돌아보면서, 고집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정도와 사도를 분별하여 사용한다면 그 역시 중용中庸이 아니겠습니까?”
공자가 말한 중용이란 언행에 있어 지나치거나 덜한 것 없이 적절하게 처신하라는 뜻으로, 두 수단을 균형 있게 쓴다는 것과는 정확히 일치하지 않으나 그래도 들어맞는 구석이 있었다.
경전 ‘중용中庸’에서 공자는 순舜 임금을 두고 평하기를, 양 끝단을 잡아 그 중간을 백성에게 (잘) 썼다고 찬탄했으니까.
그렇다면 양단인 예禮와 비례非禮를 균형 있게 취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도 중용 아니겠는가?
“……말씀은 유순하고 담긴 뜻은 깊으나, 듣는 이의 목을 붙들고 계시니 전하의 저의가 혼란스럽사옵니다.”
김신국이 다시 건방져진지라 머리를 고정한 채 꿀밤을 돌렸다.
“크아아악!”
그리고 적당히 풀어주니, 김신국은 제멋대로 비틀거리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이고!”
“물어보길래 곧이곧대로 답해주었더니 다 듣고 나서 혼란스럽네, 뭐네…….”
들어야 할 말은 다 들었다, 이거지.
김신국은 끄응, 앓는 소리와 함께 일어나더니 제가 언제 까불었냐는 듯 진지한 얼굴로 아뢨다.
“신하가 늙고 정신은 혼탁하여 행신行身을 다스리지 못하고 하늘과 같은 주인을 우롱하였으니 엄벌로 다스려 주시옵소서.”
“……꿀밤 한, 열 몇 대쯤 때려드려요?”
당장에 집행하겠다는 듯 주먹을 드니 엄벌해달라던 늙은이가 움찔하면서 물러섰다.
“……헛소리 그만하고 퇴궐하십쇼. 걷어차면서 서궐 바깥까지 굴려버리기 전에.”
김신국은 마냥 농담이 아니라는 걸 직관적으로 깨달았는지, 황급히 허리 숙이면서 물러났다.
요즘 늙은이들 참 영악해?
나 때 늙은이들은 말이야…….
* * *
세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서궐을 방문한 건 꼭 아들에게 선물을 전달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그 의도뿐이었다면 아랫사람을 시켜 배달했겠지.
일일이 저의를 훈계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서궐에는 세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있다.
일부러 틈틈이 시간을 내어도, 왕업이라는 게 만만치 않다 보니 다들 얼굴을 본지도 까마득했다.
오죽하면 세자나 중궁보다 대비와 더 자주 보고 지낼 정도니까.
‘그렇다고 고작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불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더 있겠나.
“그래서 왔습니다.”
중궁은 내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는 듯 굉장히 의외라는 눈치로 맞아주었다.
그러나 반가운 기색도 잠시뿐. 중궁은 이내 돌아서서 말했다.
“급히 전하를 마중하러 나갔으나, 먼저 세자를 데리고 동궁으로 들어가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상심했는지 아십니까?”
“그건…….”
안 그래도 온 궁궐의 궁인과 시위들은 다 불러놓아서 부담스러웠는데 중궁까지 합세한다고?
상상만 해도 너무 막강한 결계로군. 심약한 나는 궐문조차 넘지 못했을 거다.
“크흠. 그건 중궁의 평판을 지켜주기 위해서였지요. 만약 내가 세자와 함께 궐문에서 중궁을 기다렸다면, 불의한 자들은 신나서 입방아를 찧어대지 않았겠습니까?”
중궁이 아무리 왕의 부인이자 세자의 어머니일지라도, 왕은 왕이고 세자는 세자다.
나라의 주인과 장차 다음 대에 주인이 될 후계자보다는 순위가 낮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왕과 세자가 언제 올지 모를 중궁을 위하여 궐문 밖에서 우두커니 입장을 기다려야 했다면, 누가 이 나라의 주인이냐는 분분한 논란만 생기지 않겠는가?
급조한 변명이라도 썩 그럴듯한지라, 중궁도 할 말이 없어서 툴툴댈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기별조차 주지 않으시고 세자와 볼일을 다 본 다음에 찾아오신단 말입니까?”
“그야 당연히, 세자를 만난 다음에는 중궁을 뵈러 갈 생각이었고 이를 중궁께서도 아시리라 믿었기 때문이지요.”
“…….”
“세자부터 본 이유는, 뒤에 일정을 남겨두면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신국을 먼저 상대하면서 혀가 풀린 덕인지, 변명 나오는 수준이 나조차도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중궁께서 내키지 않으신다면, 다음에는 먼저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짜증은 내고 싶지만, 달리 할 말이 없어 못내 수긍하는 티가 역력했다.
다른 사람이 이랬다면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었겠으나…….
“밖에 오래 서 있던 듯한데, 벌이 충분했다면 안으로 안내해 주시지요?”
슬쩍 숙여주니 대비가 밝아진 목소리로 응했다.
“제가 어찌 전하께 벌을 내리겠습니까? 다만 이야기가 길어졌을 뿐입니다. 따라오세요.”
중궁은 몸을 돌린 그대로 중궁전으로 나아갔고, 나는 조용히 뒤를 쫓았다.
본디 궁궐공사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했던 광해군의 산물답게 서궐의 중궁전은 방대하면서도 화려했다.
그러나 영역의 방대함에 비해 사람의 손길은 충분히 닿지 않아, 반대로 비좁고 낡은 경운궁에 미치지 못하는 데가 있었다.
‘살아생전에 내가 서늘한 중궁전을 포근하게 만들 수 있을까?’
비슷한 말을 건넸던 세자에게도 호의적인 답은 내놓지 못했지만, 이 순간만을 떼놓고 본다면 그래도 기념비적인 구석은 있었다.
처음에는 초면인 사람보다 더욱 대하기 어려웠고, 이내 거주하는 궁궐마저 달라져 남남처럼 살게 될 줄 알았지만, 지금은 자의로 중궁전에 발을 들이밀고 있지 않은가?
딴에는 눈치 보느라 행차한 것이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대단한 진전이지.
“이곳이 제가 평소 지내는 방입니다.”
아래에서 따로 불을 피워두었는지, 방 전체가 온기로 따스했다.
입장 3초 만에 졸리는군.
마침 드넓은 방 한가운데 이부자리가 깔려 있어, 마치 한숨 자고 가라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염치 불고하고 여기서 푹 쉬다가 가겠습니다.”
“그리하시지요.”
보석으로 치장해 무겁기만 한 요대를 풀어헤치고, 또 마찬가지로 두꺼운 비단으로 지어 어깨를 짓누르는 용포를 벗어던지니 막상 쉬라던 중궁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왜?
빤히 쳐다보아도 놀란 모습으로 말이 없기에, 나는 그대로 이부자리에 퍼질러졌다.
그리고 중궁은 늘어진 나와 내던져진 용포를 번갈아 보더니, 여전히 동그란 눈을 하고서 자신의 옷고름을 풀었다.
하기야, 방도 뜨끈한데 옷을 잔뜩 껴입었으니 더울 만도 하지!
마침 졸리기도 하겠다, 둘 데 없는 눈을 감고서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니 중궁이 곁에 앉았다.
“기껏 행차하셨는데 주무시기만 하시렵니까?”
자야지 그럼, 피곤한데.
달리 여기서 할 게 뭐가 있다고…….
* * *
세자책봉식 이래 최초로 서궐로 행차했다가, 진땀을 뺐다.
평소 운동할 기회가 없는 사람이 체력을 시험해야 했으니까.
덕분에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인데도 몸에서 열기가 식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래서 아들 부잣집은 부모가 고생이 많다는 거군…….’
봉림대군, 인평대군은 중궁 이상으로 오래 못 본지라 간만에 아비 노릇한다고 고생했지.
나중에 커서 아빠가 해준 게 뭐가 있냐고 대들까 싶어 갖은 놀이를 다 해줬다.
인평대군이야 아직 아기나 다름없어서 상궁의 감독 아래 밥을 먹이고 장난이나 치는 정도였지만, 봉림대군은 꽤 머리가 굵은지라 어깨에 태우고 등에 태우고 던지고 휘두르고…….
덕분에 이 짓거리 두 번 하면 국 끓여 먹을 도가니도 남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사지가 시큰거렸다.
그래도 봉림대군은 쓰러진 아비를 밟아대면서 계속 놀아달라고 패륜을 일삼더라.
“아오, 허리 아파.”
조선 시대에 파스가 없다는 게 이토록 아쉬울 줄이야!
왕이 출궁해서 뭉텅이로 시간을 비웠지만 큰 논란은 없었다.
그동안 업무가 없었으니까. 사람이 자기 자유시간을 재량껏 사용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겠나?
도승지만 태업으로 욕 좀 먹고 말았을 뿐이다.
환궁할 때까지 내 앞으로 올 공문은 모조리 계류해두라고 했거든.
이덕형이 배은망덕한 사람은 아니어서 폐세자를 살려준 의리를 잊지 않고 의도적으로 태업해주었지.
……흐음, 태업이 맞나?
태업하라고 지시했다면 일을 하는 게 태업일까, 일을 안 하는 게 태업일까. 어렵군.
아무튼, 이래서 평소 신하들의 마음을 얻어둬야 한다.
* * *
북방군 도원수 장만은 작년, 왕의 흉금에 있던 가도의 평정을 완수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부원수에게 인계하고자 했다.
부원수의 적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전의와 군 전체의 사기 수호를 위한 결의는 전 조선군 지휘관들의 모범이 되었던바.
심약하고 노쇠한 자신을 대신해 북방군을 이끌어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중앙에서는 이 같은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
교전과 통솔만이 지휘관의 역량은 아니었으니까.
장만은 폐조 말엽 병조판서를 지내며 군무를 총괄한 경험이 있었다. 수만에 달하는 상비군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적임자로는 알맞은 셈이다.
그리하여, 장만은 오늘도 체직에 대한 기약은 요원한 채 북방군 주둔지에서 아침을 맞았다.
한양과 달리 평안도 안주부에서는 여전히 쌀쌀한 칼바람이 몰아쳤고, 장만은 공관을 나서기 무섭게 낯이 따가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침하셨습니까?”
“어어…….”
장만은 공관 앞에서 얼굴이 빨갛게 되어버린 장교에게 인사한 뒤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어젯밤까지 해결하지 못한 업무를 다시 뒤져보려는 찰나.
이때다 싶어 찾아온 원수부의 서리가 서안 좌우로 새로운 일감들을 깔아놓았다.
“나머지는 자잘한 것들이옵고, 간밤에 한양과 의주부에서 온 소식이 있사옵니다.”
서리가 이것부터 봐 달라며 권자 몇 개를 서안에 직접 올려주자 장만은 그 내용을 펼쳐보기도 전에 인상을 찌푸렸다.
한양이라면 당연히 상부인 중앙에서 보낸 것이고, 의주부는 후금과 마주한 국경지대.
골치가 아프려면 한없이 골치 아파질 수 있었다.
‘자는 중에 깨우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로군…….’
도원수를 기상시킬 정도라면, 골치 아픈 정도가 아니라 골이 터질 일일 테니까.
장만은 그 정도는 아님에 위안하면서, 원수元帥에게 원수怨讎 같은 서리에게 물러나라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