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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85화 (85/380)

인조, 명군이 되다 85화

“의주부에서 보낸 건 아파태의 서신이로군. 국경에서 문제가 벌어진 게 아니라 다행일세.”

장만의 평가에 부원수 정충신이 서신을 받아들며 답했다.

“아무리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오랑캐들이라지만, 요동에서 다시 물러날 게 아닌 한에야 지금은 숨 고르기에 바쁘지 않겠습니까?”

후금이 요동을 점령하면서 무수한 유민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음에도, 여전히 많은 수의 명나라인이 요동에 남아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여진족의 숫자는 한 줌에 불과하니, 후금의 기세가 꺾인다면 요동의 명인들이 안에서부터 들고 일어나리라는 건 명약관화다.

“노적이 단물만 빨고 요동에서 물러난다면 모르겠으나, 요동 한복판인 요양遼陽을 수도로 삼고 경성京城을 축조하고 있다니 당분간은 조용할 것입니다.”

“부원수는 너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군. 저들이 머리를 굴릴 줄 알았다면 오랑캐라 부르지도 않았을 걸세.”

장만에게 후금이란 운수를 타고 덩치만 조금 커졌을 뿐 여전히 멍청하고 사나운 오랑캐 부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요동의 안정이야 뒤로하고 얼마든지 사고를 칠 수 있는 종자들로 비쳤으나, 폐조 때 직접 적의 심장부를 방문했던 정충신의 생각은 달랐다.

“노적이 그저 사납기만 하였다면 오늘날 같은 기세를 이루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후금에 사신을 다녀온 지도 꽤 되었고, 그때와 지금의 후금이 또 달랐으나, 노적의 아들들과 수하들은 오래전부터 저들만의 방식으로 안에서부터 경쟁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란으로 번지지 않게 노적이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동안 치열하게 경쟁을 거듭한 끝에 권력을 쟁취한 오늘날의 후금 실력자들이 그저 사납기만 하겠는가?

오랑캐들이니 사납기야 하겠으나 그것이 곧 무식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요양을 수도로 삼아 경성을 축조하는 것도 그렇고, 명나라인들을 을러대고 회유하여 아래에 두고자 하는 것을 보니 노적이 요동을 온전히 제 것으로 삼고자 진지하게 공을 들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아파태는 서신을 통해 최근 누르하치의 결정을 전해왔다.

명나라인이라도 저들처럼 체발剃髮하고 역복易服하는 자는 여진족속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요동이 후금에 정복된 이래 노예와 농노로 전락한 대부분의 명나라인에게는 혹할 만한 제안이었다.

반항하는 자가 나타나면 일대를 학살해 본보기로 삼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적이 숨을 고르고 있으니 여유를 가지고 긴장을 늦추자는 게 아닙니다. 적의 행보가 이러하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저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을까 고민해 봐야 한다는 말이지요.”

“흐음……. 부원수께서는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병사들을 더욱 거세게 훈련하고, 물자를 비축하여 싸움이 벌어졌을 때 전력으로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원수부 바깥의 장졸들이 들었다면 현기증을 느끼며 뒷목 잡을 소리였지만, 장만이나 정충신이나 부하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더 굴려주는 것밖에 없었다.

전장에서는 누적된 훈련과 체력이 그들을 살려줄 테니까.

장만은 자신이 보던 권자를 말아 부원수에게 건넸다.

“그렇다면 이 소식이 마음에 들겠군.”

정충신은 곧장 권자를 펼치며 시선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눈길을 사로잡는 단어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대포로군요.”

“부원수라면 대포 앞에 붙은 글자가 마음에 안 들 줄 알았네만.”

정충신이 홍이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최초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은 뒤 정충신은 친히 대포의 관리를 감독했고, 때로는 청하는 사람도 없건만 직접 일손을 보태기도 했으니까.

부원수나 되는 인물이 이러고 있으니 그 마음을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장만은 정충신의 애정이 ‘홍이포’에만 향할 줄 알았다.

‘소’ 홍이포가 아니라.

이에 정충신은 오해라는 듯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일군을 이끄는 처지로서 대포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욱이, 소형이라곤 하나 원본이 홍이포라면 반드시 제 몫을 해낼 것입니다.”

“작아도 홍이포라는 게 중요하다는 거군.”

“작은 대포라도 작은 대로 효용이 있습니다.”

“그래, 크건 작건 홍이포라면 다 효용이 있을 테지.”

장만은 연신 맞장구치며 실소하다가, 정충신의 시선이 따가워지자 서둘러 손을 저었다.

“농일세, 농. 부원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했네.”

“……아무튼, 장거리 타격 수단이 부재한 상황에서 신형 대포가 생겼으니 기쁜 일입니다.”

중앙에서 쓰지도 못할 대포를 신형이랍시고 보내지는 않았을 테지.

무엇 하나 제대로 예측해 내지 못한 장만답게, 그는 농으로 치부했으나 정충신은 내심 대포의 원형이 홍이포라는 데 크게 가점을 걸어두고 있었다.

그래서, 물자가 도착하는 대로 훈련을 시행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였는데 마침 여기에 걸맞은 낭보도 있었다.

“염초 굽는 방법도 일신하였다니, 훈련을 강화하더라도 화약 부족할 걱정은 덜었습니다.”

“한동안 민원 많이 들어오겠군.”

갈 곳 없던 북방군이 청천강 요충지마다 놓일 수 있었던 건 안주부사가 크게 양보한 덕이 컸다.

그러니 도원수라도 안주부사에게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부민들에게 큰 양보를 받아내야 했던 안주부사도 마찬가지였다.

21세기에서도 상상치 못할 역 내리갈굼, 즉 오르갈굼이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안주부에서만의 이야기.

도원수가 일개 부사의 항의에 시달려야겠느냐고 왕에게 오르갈굼을 시도하다간, 눈병 앓는 쪽보다 다른 쪽의 눈이 먼저 눈탱이 처맞고 시력을 상실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위아래에 낀 장만으로서는 고달픈 노릇.

여기에 한술 더 떠주는 정충신이었다.

“한동안뿐이겠습니까? 긴장 상황이 발생할 때까지는 계속 굴려야지요.”

후금이 내치에 집중하는 지금이, 마찬가지로 북방군의 내실을 채울 적기였다.

* * *

왕이 즉위한 원년부터 선혜법을 개정한다며 양전을 시행해라, 군역을 개정하고 싶으니 군적부터 갱신해라, 하면서 여러 사람이 피곤해진 적이 있었다.

각기 나라의 수백 년 된 정체성을 뒤흔드는 일이었던지라, 용상의 주인이 바뀌고 환국이 일어나며 모두가 어떻게든 정책적으로 쇄신이 있으리라 각오했음에도, 갖은 잡음과 훼방이 일어났었다.

분란은 양지와 음지를 가리지 않아서 불특정의 외관 다수는 협잡을 통해 고관과 종친을 매수하고자 했다.

왕조차 쉽사리 입을 막을 수 없는 방패를 내세워 반대 여론을 결집하려던 것이었다.

이 같은 시도에, 왕 또한 음양을 가리지 않는 대응으로 훼방을 차단했다.

그 일환이기도 했던 이괄의 죽음으로 한동안 도성이 뒤숭숭해졌으니 백관들로서는 빈말로도 분위기가 좋다고 하기 어려웠다.

만약 왕이 숙청을 남발했거나 조정의 안정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혼란은 걷잡을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개혁의 번잡함도 잦아들고 성과가 나타나는 지금, 밖으로는 새로운 무기를 도입하니 변장邊將과 후금의 발호를 경계하던 이들이 한숨 돌리고, 안으로는 책봉하는 조칙을 맞으니 명분과 사대를 우선하는 고관과 선비들은 안도하게 되었다.

백성들이야 분호조가 혁파되고 수령과 아전들이 자중하며 잡세의 기승이 한풀 꺾이니, 이미 오래전부터 세상이 살만해졌다고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응달에 놓인 부분도 많은지라 과히 태평성대라고 칭하기에는 섣부르겠으나 십수 년 만에 나라가 나라 꼴은 하게 되었다고 평할 만하거늘, 도리어 이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는 자들도 많았다.

“갈수록 적당敵黨을 처분하기 어려워지는데, 영수는 당을 이끌 생각이 없습니다!”

자리에 모인 선비 중 하나가 성토하자, 이내 소란은 불붙은 듯 번져나갔다.

“이번에 병조판서가 동철銅鐵 바친 것은 어떻고요?”

“무능을 재물로 덮으려는 것이지!”

“옳소이다! 그깟 동철 두어 수레, 대단하다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어전에서 말까지 나온답니까?”

웅성웅성!

성토와 불만이 서로의 꼬리를 밟아대면서 비좁은 공간은 순식간에 과열됐다.

그것을 의식한 참석자들이 알아서 입을 닫으면서, 일렁이는 면면들 한가운데 놓인 호롱불도 정적과 함께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붉어진 눈동자들이 서로를 흘겨보았다.

뻔한 소리야 모두가 알고 있으니, 이제 어떻게 하겠느냐는 추궁이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물론 자리를 만든 좌장座長이라고 뾰족한 묘수가 있어 사람들을 모은 건 아니었다.

여럿이서 머리를 맞대면 그럴듯한 방법이 하나쯤은 나오지 않겠는가, 막연히 기대했을 뿐.

그러나 줏대 없이 요행만을 바라며 살아온 이들끼리 머리를 맞댄다고 갑자기 좋은 방도가 떠오를 리 없었다.

“…….”

“…….”

탁한 분위기 속에서 침묵만이 이어지면서, 이내 가장 먼저 인내심이 바닥난 자가 입을 열었다.

“방법 없소?”

채근과 다를 바 없었던 의문에 누군가가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당신은?”

고개들이 좌우로 돌아가고 옷자락들은 쓸렸으나, 작은 불빛에 의지해 빼곡히 모인 군중 속에서 발언자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덕분에 좌중의 분위기는 끊어지기 직전의 실처럼 팽팽하였으나, 막 침묵 속에서 채근한 자가 한 수 접어주겠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고변!”

예로부터 고변은 여러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천만하여 남발하기가 어려웠는데, 무턱대고 언급되자 좌중들 사이에서는 금세 잡음이 번져나갔다.

그러자 파문을 일으킨 발언자가 마저 말했다.

“이보다 나은 방법이 있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에 발언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변 참석자들을 은근히 혐오감 묻어나는 시선으로 돌아보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상책이 없다고 다들 이대로 만족하고 사실 게요?”

마찬가지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 침묵은 할 말이 없어서 생긴 먼젓번의 침묵과는 이유가 달랐다.

자리의 참석자들이 더운 밤 날벌레처럼 불빛 주변으로 모여든 것은 분수에 넘치는 욕망을 절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대로 만족하고 살겠느냐는 질문에 굳이 입을 열어봐야 나올 대답은 뻔했다.

“그렇다면 뭐라도 해야지.”

“고변을?”

무의미한 질문에 시선들이 쏟아졌고, 곧 질문자는 자신의 질문을 정정했다.

“누구를 상대로, 어떻게 고변하겠다는 말이요? 조정에 죽어 마땅한 간신배들이 득실댄다고는 하나 아무렇게나 고변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골치 싸맬 일도 없었을 거요.”

“관심이 생겼으면 일단 의견 합치부터 합시다. 응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나 혼자 머리 굴린다면 손해지요.”

발언자는 말을 끝맺으며 허리를 바로 세웠고, 질문자는 반개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면면들을 마주했다.

“더 나은 방법을 제시할 사람은 없소?”

정적.

“……그렇다면 다들 고변으로 끝을 봅시다.”

질문자는 최종적으로 확인하고자 주변을 향해 발언했으나 돌아오는 건 무책임한 침묵뿐이었다.

참석자들의 천성이 본디 폐주 때부터 반정과 환국을 거쳐 금상의 치세에 이른 오늘날까지도 분명한 줏대 하나 없이 시류에 편승하며 요행만을 갈망했던지라, 나서서 심지를 굳힐 인물이 드물었다.

질문자 역시 그중 하나였음에도 새삼 무리가 꼴사납게 느껴졌던지라, 다시 입을 여는 대신 발언자를 주목했다.

그가 어정쩡한 허섭스레기들을 끌고 갈 의향이 있다면 모를까, 아니라면 따로 자리를 만들고자 하겠지.

“다들 마음을 굳히지 못한 듯하니, 생각을 차분히 정리한 다음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긍정도 부정도 채 돌아오기 전에 발언자는 일어났고, 약간의 실망 섞인 웅성거림과 인기척이 일었으나, 몇몇 사람 역시 함께 기상하면서 금세 자리는 파투났다.

무능한 영수를 제치고 직접 적당을 처단하자는 원대한 기치 아래 모였음에도 뚜렷한 성과 없이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해산한 것이다.

그러나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사람의 기준에서야 도토리 키재기일지언정 도토리들 사이에서는 크고 작은 놈이 있게 마련. 볼품없는 절대다수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사람이 몇 명은 있었고, 그들은 서로를 알아봐 둔 참이었다.

그래서 질문자는 먼저 멀어지는 발언자를 쫓아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유생인 이시만李時萬이라고 합니다. 선생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발언자는 추종자를 마다하지 않겠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서 답했다.

“나는 형조좌랑을 지내고 있는 수지遂之라고 하오.”

언젠가, 심기원이 김류에게 맞섰다는 소문을 떠올린 이시만이 감탄했다.

“아……!”

“나를 아는가 보오?”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시만은 못다 한 예를 지금이라도 다 하겠다는 듯 꾸벅 허리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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