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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86화 (86/380)

인조, 명군이 되다 86화

딱따기 부딪히는 소리만이 은은히 울리던 어느 날 밤.

사내 몇이 발소리를 죽인 채 대로로 나타났다.

수상쩍기 그지없는 이들은 일행이 주변을 감시하는 동안 저택의 담장 아래로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겨드랑이에 돌돌 말아두었던 종이를 빼내 펼쳤고, 또 누군가는 커다란 붓을 바가지 안 액체에 적셨다.

붓을 든 사내가 먼저 담장의 한쪽을 끈적하게 칠하니, 곁에서는 펼쳐둔 종이를 딱 붙이고는 세심하게 손바닥으로 펴 눌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인되지 않은 방이 붙자 사내들은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아직 그들에게는 수 장의 종이가 남아 있었다.

* * *

간밤에 붙은 방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불행히 순라군도 집주인도 아니었다.

그들이 담장에 붙은 방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무수한 구경꾼이 몰려든 뒤여서, 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몸싸움을 벌여야 했다.

“비키시오!”

“어엇?”

“뭐야.”

“물러들 나시라니까!”

순라군 몇이 인파를 헤치고 방에 다다랐으나, 이내 방을 살펴보던 순라군이 똥 씹은 얼굴이 되어 말했다.

“이거, 뜯어내면 찢어지겠는데요?”

“기술적으로 잘 뜯어내 봐!”

“그게 안 됩니다!”

간밤의 불경한 작자들이 얼마나 꼼꼼하게 풀을 발라놨는지 막내 순라군이 질색한 낯으로 손톱을 혹사해도 방은 찢어질 뿐, 뜯기지 않았다.

“패장牌將 어르신!”

“바빠! 안 떼지면 침이라도 바르던지!”

과연, 막내가 방과 씨름하는 동안 나머지는 더 몰려든 구경꾼을 몰아내느라 씨름해야 했다.

소동이 진정된 건 더 많은 인력이 증원되어 사람들을 물리치고, 방은 뜯어내기보다 담장을 긁어내는 쪽으로 겨우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곳곳에서 같은 내용의 방이 여럿 확보된 지라, 반드시 멀쩡하게 회수할 필요는 없었고 그날 손톱만 닳아버린 막내 순라군만 불쌍하게 되었다.

대낮부터 골치 아파진 조정의 신료들도 포함해서 말이다.

* * *

활짝 열린 정문 너머에서 따스한 봄볕이 쏟아지고 바람은 온기를 가져와 실내에 흩뿌렸다.

그럼에도 어전은 여전히 어둡고 싸늘했다.

다들 조회의 참석을 위해 입궐하는 동안 어딘가에서 소란스러운 일이 벌어졌다는 건 알았다.

그러니까, 한양 아닌가?

사람이 빼곡하게 들어차 살아가는 수도이니 원래 크고 작은 일들이 매일 벌어지게 마련이었다.

다만 그것이 벽서일 줄 몰랐을 뿐.

제때 회수되지 못한 벽서의 내용은 온 한양에 들불 번지듯이 퍼져나갔다.

그 내용은, 유몽인이 아들 및 낙향한 북인 인사들과 광해군의 복위를 꾀하고 있다는 것.

벽서의 신뢰도를 떠나 매우 민감한 소식이었다.

이로부터 어떻게 흘러갈지는 북인과 서인 모두 가늠하기 어려웠던지라, 이른 시점에서 섣불리 입을 열고자 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니 백관의 대표가 나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전하.”

영의정 이원익이 용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괴서에 거론된 사람들은 혐의의 여부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도 불러다 조사케 하시옵고, 이 같은 일을 방지하지 못한 판윤과 이하는 추고推考하시옵소서.”

현재 판윤을 지내는 구굉은 왕의 외척으로 매우 신뢰받는 총신이었다.

오래전에는 도승지 이덕형과 분란을 맺기도 했지만, 복상한 뒤로는 처신에 유의하여 구설을 만드는 일이 없었는데 이 같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왕으로서는 안타깝게 여길 일.

그렇다고 판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왕조차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질서를 준수하라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세요.”

왕은 원칙대로 이행하는 데 응했고, 내심 걱정하던 이원익은 안도하고서 말했다.

“본디 정체를 숨긴 채 벽서나 투서 따위로 누군가를 고발하는 이유는 도리어 제가 화를 입을까 두려워해서인데, 거론된 인물들은 누군가를 박해할 처지가 아니옵니다.”

그런데도 고발자는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

“이는 그만큼 고발에 진실성이 결여돼 있고, 누군가를 모함하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는 증거가 아니겠사옵니까?”

크게 번지지 않을 거라는 위안이었다.

발언자의 신분을 생각하면, 설령 크게 번질 일이라도 최대한 진화해 보겠다는 약조와 마찬가지.

그래서 서인들은 관망을 견지했다.

일선에서 물러난 북인 잔당들이 다수 거론된 벽서 사건은 이참에 못다 한 숙청을 재점화할 기회였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영의정은 물론이고 왕의 성향 역시 분명했던 데다 숙청을 피한 북인의 잔당 다수가 여전히 당상에 포진하고 있었다.

북인 잔당들은 품계만 높다 뿐, 맡겨진 일을 해내는 것 외에는 역할이 없는 허수아비라도, ‘살아 있는’ 허수아비다.

쥐도 궁지로 몰라면 깨무는 법.

섣불리 벽서 사건을 확대했다간 총체적인 저항에 부닥쳐 역풍만 맞고 된통 깨지기 쉬웠다.

그래서 김류와 이귀는 서로를 의식했다.

‘하수 아니랄까 봐 무턱대고 사고부터 저지르는군.’

‘동기야 뻔하지.’

두 사람 모두 왕을 새로 세우는 공로를 이뤄냈으나 정작 왕은 공신들을 크게 추켜세우는 대신 북인 잔당을 수습하여 조정에 균형을 가져왔다.

그러나 공신의 시선에는 배신이나 마찬가지.

실제로 두 사람 모두 환국 직후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며, 그럼에도 불만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던 터라 각자 서로를 의심했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김류와 이귀가 서로는 의식할지언정 아래는 돌아보지 않았으니까.

어전에서 교차하는 시선은 둘뿐만이 아니었다.

제각기 민감한 사정과 입지를 가진 중신들은 경계와 연합의 의미로 무수히 눈길을 맞췄고, 용상의 위치에서 그 모든 광경을 봐야 했던 왕은 인상을 찌푸렸다.

“위관委官은 영의정께서 맡아, 직접 추국관을 선발해서 진상을 조사해주세요.”

“명을 받들겠나이다.”

이어서 왕은 여전히 한눈을 팔고 있는 신하들을 향해 일렀다.

“나머지는 자초지종이 확실히 밝혀지기 전까지는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유의하세요. 불순한 자들이 저지른 행위는 한없이 가벼우나, 그 죄과는 무거우니 부주의한 언행으로 얽혀드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건수 잡았다고 설치면 대가리를 깨버리겠다는 경고였다.

이에 대개는 왕이 이따금 그러하듯 성격이 지랄맞게 변한 줄로 알았으나, 조금 더 내밀한 사정을 아는 이들은 꼴깍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괄 등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좌의정 박홍구.

그리고 김자점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는 김류가 그러했다.

북인과 서인에서 각기 상당한 입지를 가진 인물들이 조심해준다면, 곧장 벽서 사건이 분화되는 일은 없을 터.

왕의 기대는 그러했다.

* * *

즉각 판윤 구굉과 서장관을 지냈던 유몽인의 추국이 있었지만, 특별한 혐의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어서 유몽인과 함께 언급된 그의 아들 유약柳瀹과 기자헌 등도 차례대로 호출되었으나, 그들 역시 억울해하기는 마찬가지.

추관을 맡은 이원익이 본인과 왕의 의향대로 국문을 온건하게 진행했으니 거짓으로 자백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흐름을 원치 않는 자들이 있었다.

-유몽인은 역괴에게 아첨하여 오래토록 전횡하였고, 기자헌은 왕의 부름에도 출사하지 않고 폐주에게 충성하였으며, 유경종柳慶宗은 폐모론에 참석하였습니다.

이외에도 함께 거론된 이광호, 한창국, 이광유, 허직 등은 관직과 세력을 잃어 원망하는 마음을 지니기 쉬운데 이 같은 자들이 함께 모여 작당하였다니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원익은 추관을 맡고도 죄인들을 엄하게 국문하기는커녕 도리어 편의를 봐주면서 형식적으로 이어갈 뿐이니, 이것이 국법을 능멸하고 인군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신이 바라옵건대……

“이런 상소들 때문에 승정원 문지방이 닳다가 불이 날 지경이랍니다.”

상황은 왕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밤중에 아무도 몰래 벽서를 붙이는 것과 다르게, 상소는 올리는 사람의 신분이 드러난다.

분명 경고가 있었음에도 호전적으로 사건을 키우는 건 겁이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출세를 위해 이판사판으로 노땅들을 다 죽이려 드는 건가.

“으음…….”

상소문을 받아든 영의정 이원익은 쓰디쓴 안색으로 자신을 규탄하는 글을 훑어갔다.

왕은 그런 이원익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개중에는 이번 사건을 일으킨 작자들도 있겠지요?”

“예……. 하나 걸러내기는 어려울 것이옵니다.”

이에 왕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상소를 올린 모든 사람들을 명단에 올려두고 싶어요.”

“……명단, 말이옵니까?”

왕은 혀끝까지 올라온 살생부, 라는 단어를 차마 뱉어내지 못하고 삼켰다.

이원익은 살아 남기 위해서는 필사적이어야 했던 박홍구나, 간신의 기질이 다분한 김류와는 사정이 달랐으니까.

광견병 걸린 개가 아니고서야 흉금의 독니를 드러낼 사람은 구분해야지 않겠는가.

“아무튼, 내가 참으로 골치 아픕니다. 영의정도 그렇겠지만…….”

이원익은 여부야 있겠냐는 듯 짧게 끄덕였다.

“나는 이게 윗물까지 번지지는 않을까 걱정되요.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김류나 이귀는 필사적으로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을 겁니다.”

“분란을 일으키기에는 좋은 상황임이 틀림없사옵니다.”

무려 내란의 고발이 있었으니.

“하오나, 두 사람이 무지하지 않거늘 정체도 모르는 이들에게 기꺼이 놀아나고자 하겠사옵니까? 혈기방장한 하관들에게 호응한다면 당장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겠으나, 훗날에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이 될 것이옵니다.”

“영의정.”

“예.”

“두 사람은 이미 각자가 원하는 것을 위해 목숨까지 걸어보았습니다.”

“…….”

왕은 침음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한쪽 무릎을 끌어안은 뒤, 묵은 숨을 토해내고서 덧붙였다.

“영의정만큼 훗날을 두려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걱정이에요.”

기실 두 사람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옭아매는 건 왕이 두 사람과 만들어둔 관계 때문이었다.

김류와 이귀 모두 왕과 소통하였고, 제 나름대로 자중할 명분을 얻었다.

김류는 궁극적으로 더 높은 지위에 올라, 오래도록 그 자리를 보장받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반대로 이귀는 여전히 왕을 반신반의하지만, 그래서 마음을 분명하게 정해두지 못한 채 일단은 주시하고 있다는 쪽이다.

“과욕은 이성을 뭉개고 사람을 무모하게 만드는 법입니다.”

두 사람이 제각기 자중할 명분을 꺾고 시류에 편승하기로 각오한다면, 그다음부터는 내리막길뿐.

김류와 이귀 모두 왕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묘책이 없겠습니까?”

왕이 물었다.

그 나름의 방편이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고견을 들어두어 나쁠 건 없었다.

이에 이원익은 오래전부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상책은 간밤에 괴서를 붙인 자들을 적발하여 죄를 묻는 것이옵니다.”

“하나, 그것은 범인들이 바보 천치여서 행적을 자랑하지 않는 이상 실현되기 힘든 일입니다.”

이원익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덧붙였다.

“중책은 김류와 이귀를 불러들여 도움을 구하는 것이옵니다.”

“두 사람을 말입니까?”

“예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두 사람이 그동안 자중해온 건 순전히 내가 그들을 압도했기 때문이에요.”

그간 왕이 김류와 이귀를 움직인 방식은 지령과 명령이었다.

일을 맡기기 전부터 왕은 큰 그림을 그려둔 채였고, 거기서 두 사람의 역할은 중간이나 마무리 등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맡았어도 무방한.

“이번 일은 다릅니다.”

달리 도움을 구할 사람이 없다.

벽서 사건을 통해 배후가 궁극적으로 얻어낼 이득을 짐작해보면, 그들의 정체가 서인의 말단 강경파라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김류와 이귀는 저마다 서인 분파를 이끄는 유이한 영수들로, 도움을 구하고자 한다면 이는 명령이나 지령이 아닌 요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두 사람을 압도해 온 왕의 위치가 요청을 통해서 낮아진다면, 당장은 몰라도 차후에는 더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왕은 이원익이 말한 중책이 미봉은 아닐까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원익은 대안을 말했다.

“하책은 진정한 범인을 적발해내지 못한 채 무고한 사람들에게 벌을 주거나, 혹은 최대한 흐지부지 무마하는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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