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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87화 (87/380)

인조, 명군이 되다 87화

이원익은 세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먼저 상책.

최선이나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낮다.

그러니 교토삼굴의 의미를 되돌아보지 않고 나의 신앙심을 시험한다면, 그러니까 상책이 이뤄지기를 기도만 한다면 도리어 패망의 지름길이 되겠지.

얻을 것도 있으나 잃을 것도 있는 중책.

얼핏 보기에는 공정한 거래지만, 훗날 어떤 후폭풍이 일지 모르니 무턱대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눈 뜨고 코나 베이자는 식의 하책.

이건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상책에 기대는 것이 저도 모르게 파멸로 향하는 길이라면, 하책을 선택하는 건 지옥문을 향해 급발진하자는 수준이니까.

‘그러니 이원익은 세 가지 방법을 말했지만, 실질적으로 상책과 하책은 환상인 셈이지.’

실제로 고려할 수 있는 건 중책밖에 없었다.

이원익은 나의 지위와 결정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우회적으로 권한 거겠지.

아마 이런 말이 생략되어 있지 않을까?

내가 봐도 뾰족한 방법은 없고, 당장 실효를 거둘 수 있는 건 김류와 이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뿐이라고.

‘따로 대안을 생각해두어서 다행이지.’

그나마 선택의 여지는 있으니까.

유몽인과 기자헌 등 환국으로 몰락한 북인 잔당들을 거론해 쓸어버리려 한 건, 원래 역사의 유몽인사柳夢寅事와 상당 부분 동일하다.

놀랍지는 않다.

그야, 이 시점에서 가장 만만한 존재가 끈도 연도 없는 북인 부스러기들이니까.

그런 그들에게 덮어씌우기 좋은 죄목도 현재 살아 있는 그들의 옛 주인을 다시 옹립하려 든다는 것만큼 만만한 게 없었다.

‘그러니 이즈음 간신배들이 누군가의 시체를 밟아서라도 부와 권력을 얻고자 한다면 이런 구성이 되는 건 기정사실이지…….’

단지 나의 치세에서도 인조 때의 유몽인사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게 치욕스러울 뿐.

당시 인조는, 아주 당연하지만, 유몽인사를 좋게 해결하지 못하고 무고당한 관련자 태반을 그냥 죽여버린 뒤 쉬쉬하는 식으로 덮었다.

이원익이 말한 하책을 정확히 따라간 것이지.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내가 기대하는 건 이번 사건과 유몽인사의 유사성이다.

지목된 대상도 전개도 유사하다면, 일을 꾸민 배후도 유사하지 않을까?

‘유몽인사가 어전까지 배달되는 과정에는 이귀와 김자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귀가 이번 사건을 주도했을 가능성은 작다.

나의 치세를 관망하던 그가, 조짐도 없이 둘 중의 하나는 끝장을 볼 수밖에 없는 싸움을 걸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김자점은…….’

시체다.

그가 인조처럼 변탕지옥에서 삶아지며 환생의 사술을 익힌 게 아니라면, 그래서 고전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무덤에서 반쯤 썩은 채 솟아난 게 아니라면 김자점은 배후가 될 수 없다.

‘두 사람을 제외하고 주범이라 할 만한 인물은 전 용강현령인 유응형…….’

그 역시 지금은 시체다.

외관들의 불법적인 이익에 방해가 되는 개혁에 맞서, 흥안군을 통해 인성군과 유몽인을 포섭하려다 어느 쪽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발각됐으니까.

그가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는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구광만이 알겠지.

‘이놈은 어떻게 이생이고 저 생이고 하는 짓이나 노린 사람이나 똑같냐.’

어쩌면 인연은 실재할지도.

‘그리고 유응형과 함께 변란을 고발한 인물이 형제인 유응시柳應時와 이신李愼이지.’

원래 역사에서 행적을 따져보면 수준이 피장파장인 인물들이다.

유응형은 친척들을 팔아 출세한 탓에 욕을 잔뜩 먹었는지 금세 사직했고, 함께 고변한 유응시는 끝내 관직을 얻지 못했다.

이신은 정묘호란 때 병사로 제수되었으나 뚜렷한 공적이 없다.

그리고 나중에 유응형과 함께 고변을 당하고 유배되었다.

국문 와중 유응형이 자신의 부인과 불륜했다는 증언까지 늘어놨고.

‘이것들이 고작 이렇게 살려고 사람 목숨을 팔았나 싶지.’

하지만 그들은 고작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유응형은 죽었지만, 유응시와 이신은 아직 살아 있다.

‘유응시는 유몽인사 때 유응형과 말을 맞췄던 형제고, 이신은…….’

형제는 아니다만 유응시와 마찬가지로 유몽인사 때 유응형과 말을 맞출 정도로 밀접한 관계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강한 동기가 있으니, 바로 유응형이 숙청되었을 때 (비공식적으로) 연루되어 삭탈 당하고 유배되었다는 점이다.

권력이 없으면 끼칠 해악도 없는지라 적당한 시점에서 해배되었다.

‘예상이 틀렸을 수도 있겠군…….’

그러나 지금의 두 번째 예상이 옳다면, 이원익이 말한 상책을 실현할 수 있다.

이래서 사람은 역사를 배워둬야 한다.

악질적인 혼령에 걸려 과거로 보내졌는데 아는 게 없다면, 얼마나 곤란할까.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조사해 보고자 하니, 시간을 더 끌어주셨으면 합니다.”

“하명하시옵소서.”

“……아니요, 이건 내시부를 통하겠습니다.”

이원익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벽서 사건과 관련된 일이라면 의금부에 맡기는 편이 빠르고 확실할 텐데 왜 내시부에 맡기냐는 거다.

“아직은 어렴풋한 짐작에 지나지 않고, 또 쥐가 사람을 보면 도망칠 수 있으니 세심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내시부가 각 처에 흩어져 있는 내수사 재산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눈과 귀 노릇을 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드러내놓고 말할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니 이원익은 새삼스레 호기심을 드러내는 대신 침묵했다.

“성과가 있고 여건이 갖춰진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만약 여기서 대담을 매듭짓는다면 예의상 고견을 물어보았으나 당신의 중책이 내 복심만은 못하니 이게 잘 풀릴 때까지 기다려보아라, 하는 꼴이었다.

천기누설과 직결된 부분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복심의 머리와 꼬리는 다 알려주어야지 않을까.

어쨌거나 영의정도 나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니까.

“만약 조사가 성과를 거두어 상책이 실현된다면, 김류나 이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아랫사람을 똑바로 관리하지 않은 죄를 물어 압박할 수 있겠지.

“내가 두 사람에게서 우위를 점하려는 건 권력을 전횡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

“무수한 이권이 얽힌 정책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먼저 두 사람을 구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작년, 선혜법을 강원도에 확대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극렬한 반발이 있었던가?

무려 외관들이 종친과 대신을 매수해 반대 여론을 결집하려 들었다.

‘음지 단계에서 수습되어 망정이지.’

“분명, 드러나지 않았지만 두 사람도 선혜법 때 적지 않은 반발과 회유를 겪었겠지요?”

“그럴 것이옵니다.”

이원익은 확신을 가지고서 말했다.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리라.

“세수에서 비중이 작은 강원도만으로 이럴진대, 충청도나 다른 하삼도까지 선혜법을 확대하려면 또 얼마나 강한 반발에 부닥치겠습니까.”

원래 역사에서 인조는 백성들에게 환심을 사고자 무턱대고 삼도대동법을 저질렀다가 반발이 강하자 도로 철폐해버렸다.

그렇게 한 번 꺾인 개혁은 쉽사리 다시 불이 붙지 않아서, 하삼도에 대동법이 시행되는 건 무려 효종과 현종에 이어 숙종의 치세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니 개혁은 세심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

“무턱대고 저지르기 전에, 발언권을 가진 사람들을 구슬려둬야 그들이 지주와 유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지주와 유지들에게 개혁을 강변해주겠지요.”

그 차이에 따라 개혁이 추진되느냐, 좌절되느냐가 갈라지겠지.

이원익은 내가 자신의 중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궁극적으로 여기 있었다는 데 썩 감명받은 기색이었다.

“성상께서 밝은 정치를 펼치고자 하시는데, 어찌 늙고 편벽한 신하가 사소한 사정을 다 알고자 하겠습니까.”

내가 편의를 구하면서도 핵심은 생략한 채 훗날의 계획만 거론하는 이유를 알아챈 이원익이었다.

그래서인지, 제가 늙고 편벽하다는 앓는 소리가 이래서 안 알려주는 게 아니냐고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

‘부탁하는 처지인데 당연히 알려주고 싶지…….’

그런데 박수무당 점지하는 것도 아니고, 보통 사람이라면 존재도 모를 유응시와 두각조차 없었던 이신이 의심되니 뒷조사를 해보겠다고 할 수는 없잖아?

하물며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유응형은 음지에서 까불다가 그대로 응달에 묻혀버렸는데.

이건 못 알려주지.

“영의정께서 말씀하신 상책을 실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

많이 삐진 것 같군.

* * *

왕과 영의정이 만나 한 사람은 삐지고 다른 사람은 전전긍긍할 동안.

벽서 사건과 특유의 성정 및 북인을 향한 평소 태도가 맞물려 폭풍의 핵으로 부상한 이귀는, 마치 폭풍의 핵이 그러하듯 본인은 평온했다.

“어르신…….”

노복의 부름에, 이귀는 방문 너머에서 도끼눈을 한 채로 고개를 돌렸다.

상전의 지독한 성격이야 모르는 노비가 없었다.

그러나, 노복으로서는 각오하고서 자신의 안위를 시험할 수밖에 없었다.

“소인 아내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고뿔에 시달리고 있는데, 환자 있는 방이라도 문을 닫아놓으면 안 되겠습니까요?”

노복이 간청과 함께 뒤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곳에서 행랑은 모든 방문이 활짝 열린 채, 곳곳에서 기침과 코 먹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최근 철 지난 꽃샘추위와 다가오는 여름이 뒤엉켜 기온이 광년이 널뛰기하듯 요동치고 있었다.

새벽부터 아침까지는 얼음장처럼 추웠다가, 점심부터 오후까지는 무덥고, 해가 떨어지면 다시 추워졌다.

그러니 빈한하게 사는 행랑 식구들에게는 더없이 가혹하여 환자가 양산되고 있는데, 집주인은 여전히 고루한 가법을 고수할 따름이었다.

“날이 덥고 추운 것은 천지의 조화에 따른 것인데, 어찌 하늘의 뜻을 받들고 사는 인간이 되어서 덥고 추워지는 것을 마다하고 고작 고뿔에 엄살을 부린단 말이냐?”

그래서 이귀는 평소 방문을 열어놓고 지냈다.

더울 때라면 환기라도 되니 무방하겠으나 추울 때도 어지간해서는 예외가 없고, 한겨울쯤 되어야 다 같이 얼어 죽는 꼴은 면하고자 방문을 닫게 해줄 따름이었다.

그러니 노복들로서는 집의 의의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집이 고작 비바람이나 비하고자 있는 것이라면 구들장은 왜 있으며, 이불은 왜 깔아놓는단 말인가?

동굴에 처박혀 살지.

그러니 노복들로서는 주인이 언젠가 나라님에게 들었다는 욕설이 참으로 정확한 평가구나, 저들끼리 고개를 주억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지금처럼 저들이 아쉬운 지경이 되면 주인에게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간청드리겠습니다요.”

“노비가 되어 이렇게 약해 빠져서야 어디에 써먹을 수 있겠느냐?”

“면목 없습니다.”

이귀는 이 못난 노비들을 어떻게 계도해야 하나, 고민하였으나 서안에 놓인 문방사우를 보고는 때가 적절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한 번 행랑을 의식하니 기침하고 코를 빨아들이는 잡음이 고막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닫아라.”

“망극합니다요.”

덕분에 아내와 여러 사람 살리게 된 노복은 연신 허리를 숙이고서 물러났다.

이귀는 그제야 붓을 다시 들 수 있었고,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다시 붓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심부름꾼은 이귀의 앞에 이르러 따가운 눈총을 받았으나, 세간에서 이귀의 품성은 정평이 나 있던지라 심부름꾼은 별 의아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보낸 서신입니다.”

김경징이 두 손 고이 받들어 서신을 내밀자 이귀는 앉은 자리에서 낚아채고는 곧바로 내용을 살폈다.

얼마나 대단한 소리를 하려고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해쳤는지 보겠다는 투였다.

그러나 이내, 이귀는 별다른 말 없이 서신을 접어놓고서 붓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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