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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88화 (88/380)

인조, 명군이 되다 88화

최근 김류에게 경사스러운 소식이 있었다.

바로, 이조참의에서 이조참판으로 승차陞差한 것이다.

왕은 단순히 반정에 참여했다고 높은 관직을 내리지 않았으므로, 과거 김류는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뿌듯한 성취감의 원천이 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번 승차는 오롯이 능력으로 쟁취했다는 의미니까.

그래서 김류는 친척과 친우들을 불러모아 조촐하기 진급을 축하하는 연회를 가졌다.

혹자는 제가 당사자라는 듯 관작이 참판에 그친 것을 아쉬워했으나, 벅찬 가슴에 희희낙락한 김류는 개의치 않았다.

반정을 거든 공로가 있고, (순전히 본인 평가이나) 재주는 새로이 제수된 직품조차 능히 능가하니 머잖아 육경의 반열에도 오를 것이 명약관화했으니까.

탄탄대로를 걸어가기만 하면 될 뿐 성급해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직후 벌어진 벽서 사건이 찬물을 끼얹었다.

김류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대문 밖을 주시한 지도 한참.

“이 녀석이 돌아올 때가 됐는데.”

녀석은 오지 않고 쌀쌀한 바람만이 방안을 맴돌았다.

소매를 걷어 자신의 팔뚝을 확인한 김류가 방문을 닫으려는 그때.

대문이 열리며 심부름 보낸 아들이 나타났다.

“송구합니다, 아버지.”

김경징이 대문 밖에서는 내지 않았던 발소리를 내며 뛰어왔다.

그 얄팍한 정성에 김류는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꾸짖기 전에 먼저 물어볼 게 있었다.

“귀환이 늦었구나. 설마 길이라도 잃어버린 건 아닐 테지?”

“아니옵니다. 병조참판이 답서를 작성한다고 잠시 기다렸습니다.”

“……답서?”

김류는 자신의 청각을 의심했다.

답서를 작성했다는 건, 받아든 자리에서 편지를 확인하고 곧장 붓을 들었다는 의미다.

‘말로 전해주면 될 것을.’

굳이 필적까지 남기다니.

김류가 시선을 깔고 고민에 잠기자, 김경징이 눈치껏 덧붙였다.

“소자가 찾아갔을 때 참판은 이미 문방사우를 펼쳐두고 있었습니다.”

“음, 그 인간이 내게도 서찰을 보내려던 참이었나 보구나.”

김류는 이귀가 완고하게 답서랍시고 마저 써 보낸 서찰을 펼쳐 들었다.

그 내용은, 나눠야 할 말이 있지 않냐는 짧은 서문에 덧붙여진 초청이었다.

“참, 못 말릴 인간이구나.”

김류가 보낸 서찰의 내용도 대강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응하지 않고 도로 초청을 보낸 건 자신의 거처를 호랑이 소굴쯤으로 여겨서일까?

혹은, 직접 행차하기엔 제 발걸음이 더 비싸니 네가 오라는 뜻인가.

어느 쪽이건 김류로선 어처구니없을 따름이었다.

“괘씸한 늙은이가 사람을 부리려 드는구나. 채비해라. 얼마나 잘 대접해 주려고 이러는지 봐야겠다.”

“예, 아버지.”

김경징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나자, 김류는 서찰 한가운데 손가락을 놓고서 종이를 와락 접었다.

* * *

보통, 김류가 사람과 만날 일이 있다면 상대방이 찾아오는 편이었으므로 이런 목적의 출타는 실로 간만이었다.

김류는 길을 아는 아들을 앞세운 채로 말했다.

“네가 이전에 병조참판을 본 적이 있더냐?”

“계해년 반정 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거의 일 년 동안 얼굴을 못 봤구나.”

“예.”

김류는 내심 세월이 이렇게도 무상하구나, 생각하면서 아들의 안목을 시험했다.

“그래, 오래간만에 본 참판은 어떤 인간으로 보이더냐?”

“가혹스러울 정도로 고지식한 인물로 보였사옵니다.”

이귀에 대한 평판은 이미 정평이 나 있던지라 김류는 곧바로 물었다.

“이유는?”

“볕이 따스하다고는 하나 아직 바람이 차가운데, 사랑의 방문을 모조리 열어두고 있었사옵니다.”

“그 인간이 아직도 그러고 사는구나.”

김류는 옷고름을 더 조이고서 말했다.

“잘 보았다. 만약 네가 세간의 평판이 그렇다고 답했다면 실망을 금치 못했을 것이야. 여론을 좇는 건 안목이 아니다.”

김경징이 고개를 숙이자 김류가 덧붙였다.

“하지만, 외부의 평판도 간과하여서는 아니 된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도 있으니까.

대표적인 인물이 금상이었다.

세인들에게 왕은 이따금 따가운 발언을 내뱉을지라도, 평소 신하들을 존중하고 백성들을 걱정하는 자애로운 군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내밀하게는 필요에 따라 과격한 수단도 비밀스럽게 동원하니 괄시나 화액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대전과 편전에서 각기 취해야 할 태도가 달랐다.

“사람을 대할 때는 상대방의 품성을 고려하되 시기와 환경을 살펴 유연하게 처신해야 한다. 참판은 그렇지 못했기에 수차례 망신당한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김류가 가르침을 끝맺을 무렵, 두 사람은 이귀의 거처에 다다라 있었다.

“이리오너라!”

김경징이 부친을 대신해 외쳤고, 이내 문간이 열리며 직전 보았던 노복이 인사했다.

“또 어인 일로…….”

노복의 의문에 김류가 앞장서며 답했다.

“네 주인이 불러서 왔다.”

노복이 채 사실을 확인하기도 전에, 김류는 대문을 마저 밀쳐내고서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맞은편 사랑채에는 이귀가 방문을 활짝 열어둔 채 퉁명스러운 눈빛으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잘 쳐줘도 환대라고는 못할 집주인의 태도에, 김류는 놀랍지도 않다는 태연히 뜰을 가로질러 사랑방으로 향했다.

김경징은 부친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아 방에 들어섰다.

그리고 버릇처럼 방문을 닫으려 하자, 이귀가 팔을 뻗었다.

“가만히 둬라.”

김경징은 멋쩍은 얼굴로 물러났고, 김류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잠시 쫓다가 말했다.

“참판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이귀는 그런 빈정이 아니꼬워 콧방귀를 끼었다. 그가 생각하기로 김류는 기고만장할 자격이 없었던 탓이다.

“어째서 분란을 일으키신 게요?”

“분란이라니…….”

뜬금없는 추궁에 김류는 설마, 하고는 도리어 따졌다.

“지금 이 사람이 괴서를 붙였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붙이지 않았고, 들어본 적도 없으니 당연히 이조참판께서 벌인 일이 아니겠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음해입니까. 의심받을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 아니라, 병조참판이지요!”

“내가 왜 의심을 받는단 말이요?”

이귀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묻자, 김류는 제가 더 어처구니없다며 답했다.

“병조참판께서는 오래전부터 조정의 북인들을 마저 없애기를 원하셨으니, 무턱대고 논란부터 만들 사람이 따로 있겠습니까?”

“이보시오!”

노구의 호통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그새 이귀는 얼굴이 붉어져서는 숨을 몰아쉬었고, 김류는 고막이 쨍하게 울리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요.”

“무슨 모함을 더 들으라고!”

김류는 서둘러 손을 저었다.

당장 이 오해를 해소하지 않으면, 돌아갈 때쯤에는 귀 아래로 검붉은 피딱지가 흘러 있을 테니까.

“병조참판께서 벌인 일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는 이귀를 의심했으나, 도리어 이귀가 자신을 추궁하는 모습에 생각이 달라졌다.

이귀는 한결같은 인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무모하고 포악할지언정, 자신의 행위를 부인하고자 뻔뻔하게 남을 의심할 정도로 비열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왜 의심한 게요!”

“억울해서 그럽니다.”

“나는 벌이지 않았는데, 그대 역시 벌이지 않았다면, 그럼 괴서가 허공에서 생겨나 알아서 벽에 붙었다는 말이오?”

“방금 참판께서는 억울하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방금 경험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계속 이 사람을 의심하십니다.”

“…….”

“분명하게 말씀드리지요. 이 사람 역시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이귀는 수긍하는 대신 김류를 빤히 바라보았다.

“바로 얼마전에 승차하였는데, 그 기념으로 괴서나 붙이고 다녔겠습니까?”

누군가를 무고하는 게 축하하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이 사람 소견으로는 당여 중 누군가가 불만을 품고 괴서를 붙인 듯합니다. 상上을 독대해 본 적이 없으니 이런 사고도 칠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음.”

이귀가 이성을 되찾고 생각해보니 과연 그랬다.

얼핏 알려진 왕은 유약해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무고라는 얄팍한 잔꾀로 이익을 노려보겠다는 것도, 직접 왕을 만나보지 않아야만 가능한 짓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상소를 올려대는 자 중에 범인이 있겠구려?”

“속단할 수는 없지요. 귀 얇은 바보들에게 바람만 불어넣고 물러났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음…….”

“그러나 그들이 우리의 의향을 먼저 물어보지 않고 독단적으로 찬동하고 있는 건 죄지요.”

“옳소.”

이귀 역시, 김류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서인의 성세는 전적으로 자신의 공이라 여겼다.

그러나 마냥 오만은 아닌 것이, 반정 전까지만 해도 서인은 폐주의 탄압으로 거의 사멸에 다다라 있었다.

만약 궁지에 몰린 쥐 몇 마리가 죽기를 각오하고 고양이를 몰아내지 않았다면, 오늘날 과욕에 취해 북인들을 이참에 다 죽이자고 설쳐대는 자들이야말로 지금쯤 다 죽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숨을 돌릴 만하니 천지사방이 눈에 뵈지 않는 것이지요.”

김류의 말에 이귀가 동감한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해둔 방법은 있소? 대책도 없이 나를 부르려던 건 아닐 테고.”

“대단한 방법은 아닙니다. 먼저 병조참판의 방도를 듣고 싶군요.”

“…….”

“…….”

“…….”

어색한 침묵 끝에 김류가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생각해둔 건 단순합니다.”

* * *

벽서의 사건은 들불처럼 번져나가 화마 같은 기세로 타올랐다.

경운궁, 즉조당 앞.

“역신 유몽인과 적신 기자헌을 참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참하여 주시옵소서!”

“임금을 기만하고 죄인을 보호한 이원익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벌하여 주시옵소서!”

경관京官 중에서 목소리 좀 크다 싶은 인물들은 모조리 왕의 처소 앞으로 나와 밤낮으로 고성방가를 저지른 지도 며칠째였다.

아무리 인자한 사람이라도 밤잠을 설치게 되면 성격이 나빠질 수밖에 없는바, 왕은 시위들을 부려 시위꾼들을 쫓아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시위들에게 육모방망이 하나씩 들려주면 안 되겠습니까? 뚫린 입이라고 나불대는 저것들을 잘 다져놓으면 좀 조용해질 텐데요.”

왕이 문틈 너머를 살피며 물어보자 곁을 지키던 상선이 답했다.

“전하께서 명하신다면 그리되겠습니다만, 감히 아뢰옵건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서 더 시끄러워질 것입니다.”

“저 치들이 하는 꼴을 보면 저들도 그리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인내심을 조금만 더 발휘하시지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상선은 확언했으나 왕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유응형이 제거된 뒤 일개 유생(이라지만 그저 지천에 널린 양반들 중 하나에 불과한) 유응시나 삭탈관직 당한 이신 모두 초야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21세기라면 신상만 알고 있어도 CCTV나 결제내역 따위로 추적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조선 시대.

물어물어 찾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마땅치 않은데 이마저도 내시부를 통해 은밀하게 주문하였으니 사람 찾기가 그야말로 서울에서 김 서방 찾는 수준이었다.

‘이번 일은 생각보다 쉽게 풀리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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