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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89화 (89/380)

인조, 명군이 되다 89화

평안도 정주목定州牧은 남쪽으로 청천강 하류와 함께 황해를 끼고 북쪽으로는 산맥의 말단이 놓여 구릉지가 펼쳐진다.

고을이 이처럼 땅과 바다의 덕을 함께 갖추니 정주는 예로부터 사냥과 어염의 이익을 두루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록 말단의 백성들은 그 덕을 두루 누리기 힘들겠지만, 하는 일이라곤 쥐오줌 먹어 누렇게 바랜 책이나 뒤적거리는 것이 전부인 양반들에게는 아니었다.

이는 고을을 다스리는 목사도 마찬가지여서, 동헌에 매일같이 산해진미를 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 한때 이곳에서 목사를 지냈던 이신은 유난히 배가 주렸다.

……꼬르륵

본디 목사로 행세하는 동안 매일 육해공을 섭렵했던 이신이다.

그러나 횡음하고 패려하다는 혐의를 입고서 삭탈당한 뒤 유배까지 당하였으니, 하루아침에 권력을 잃고 나앉게 된 것만으로도 벅찰진대 친척들은 등을 돌리고 친우들은 모른척을 하였다.

그렇다고 일가의 씀씀이가 달라진 것은 아닌지라 이신이 한 줌 녹봉에 한 보따리 뒷주머니를 얹어 차곡차곡 모아온 재산은 놀라우리만치 빠르게 쪼그라들고, 끝내는 빚까지 지고야 말았다.

고향에서 근근히 살던 이신이 제 한때의 임지로 돌아오게 된 건 이 때문이었다.

뜻을 함께하던 사람들이 채무 탕감을 조건으로 대업의 최선두에 나서주기를 바랐으니까.

‘한양을 어수선하게 만들면 왕의 우행에도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지…….’

이신이야 잃을 게 많은 신세에서 잃을 것도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외관의 이익을 지키는 것도 자신이 외관이어야 의미가 있으니까.

그러나 목사의 경력까지 지낸 자신이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며 살 수는 없었기에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러니 한양에 붙여야 할 괴서들이 어째서 북인계 인사들만 노리는 것인지도 이신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껏해 봐야 서인계 외관들이 저들 수괴가 벌이는 수작을 자신에게 들이민 것이겠거니 했을 뿐.

그러나 괴서를 붙인 직후 벌어진 일은 이신의 짐작과는 달랐다.

서인 영수들이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들쑤셔대기 시작했으니까.

상황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자 이신도 몸을 내뺄 수밖에 없었다.

다만 급하게 나선 터라 수중에는 여유가 많지 않았고, 이신은 자신을 숨긴 채 한양의 소식이라면 밥 한 끼 정도는 아까워하지 않는 반가들을 전전했다.

특정한 목적지는 없었다.

다만 무작정 한양에서 멀어지다 보니 한때의 임지에 다다른 것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오랫동안 목사로서 군림했던 정주목이 무의식적으로 더 편안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치 물이 제멋대로 흘러가면서도 웅덩이에 괴이는 것처럼 정처없는 발걸음이 의아하게도 정주목에 다다른 것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신은 자신의 무의식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당장 배가 고팠고, 막 목사의 삶을 회상하면서 더욱 고파졌으니까.

‘이러다간 굶어 죽겠다!’

이신이 이전처럼 선뜻 반가에 참을 청하지 못한 건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선비도 사흘 굶으면 담을 넘는다던가?

사흘까지는 아니었지만, 세 끼를 연달아 놓친 이신의 인내심은 충분히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똑같다!”

이신은 저 들으라는 듯 외고서 발을 옮겼다. 한때 목사로 군림했으니 지리야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부려먹던 사람들이 어디에 사는지도.

* * *

“나가오!”

정주목의 향리인 박언은 때 아닌 불청객을 맞이했다.

누군가 찾아온다는 연통도 없었고, 하물며 간만의 휴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놈팽이가 자신의 귀한 휴식 시간을 방해한다는 말이냐.

박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 대문을 열었다.

“……?”

“언이, 자네 다행스럽게도 집에 있었군!”

삭탈관직과 함께 유배를 당해 사라졌던 상관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이신이 문간을 넘어서 박언을 끌어안자, 박언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저 돌처럼 굳어버렸다.

‘이 인간이 왜 거지꼴이 되어서 나타났지?’

몸은 굳었어도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그 다급함이 가히 수십 년 전 아비가 아끼던 도자기를 박살냈을 때보다 더했고, 여삼추 같은 찰나가 지난 뒤 박언이 반색했다.

“목사 영감 아니십니까!”

박언은 애처롭게 들러붙은 옛 상관을 밀어내고서 물었다.

“이 먼데까지는 어인 일이십니까?”

“그게……, 이런저런 사연이 있었네.”

이신은 멋쩍은 낯으로 배를 문질렀다.

“미안하네만 내가 식사를 거르고 찾아온지라 매우 시장하네. 염치 불고하고 한 끼만 얻어먹을 수 있겠는가?”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사람을 시켜 바로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자, 안으로 듭시지요.”

박언은 이신을 별채로 안내하고서 편하게 쉬라는 당부와 함께 물러났다.

그리고 즉각 사랑방으로 돌아와 서안을 끌어당기고 문방사우를 펼쳤다.

-언 삼가 글 올립니다.

금일 미시 초에 전 목사 신이 일언반구 없이 찾아와 걸식하였는데 어찌된 요량인지 알지 못하니 지극히 황망합니다.

죄과가 탄로나 유배되었던 사람이 옛 임지를 찾아온 데는 반드시 사연이 있을진대 추궁하여도 숨기기만 할 뿐 드러내지 않으니 혹 부정을 저질렀을까 짐작만 할 따름입니다.

일단은 상을 내어주고서 별채에 붙들었으니, 목사께서 친히 행차해주신다면 고을에 후과가 미치는 일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필휘지로 서찰을 완성한 박언은 바람을 불어 종이를 말리고는 노복을 불렀다.

“시급한 상황이니 서둘러서 목사 영감께 전해드리거라.”

노복의 고개가 별채로 향하자 박언이 다그쳤다.

“그쪽이 아니다!”

* * *

서찰을 받아든 노복이 허둥지둥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 다급한 모습을 지켜보던 이신은 불안감이 치고 올라왔으나, 허기진 마당이라 도망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다만 이곳에서 동헌까지 노복이 달려가고, 또 사람이 찾아올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속으로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문간에 밥상이 놓였을 때 이신은 서둘렀다.

수저는 장식처럼 내버려 두고서, 타고난 신체를 이용해 밥과 찬을 허겁지겁 입에 밀어넣었다.

덕분에 수시로 목이 메었으나 국을 그릇 째 기울이니 대강 넘어가므로, 이신은 밥상을 눈 깜짝할 사이에 초토화하였다.

그러고도 얼마간의 밥과 찬이 남았다.

평소처럼 식사했다면 무리없이 뱃속에 다 담았겠으나, 제대로 씹지 않고 소화될 틈도 없이 위장을 채워버린 탓이었다.

이신은 미련을 품기 무섭게 좋은 생각이 났다며 잔반을 밥그릇으로 모았다.

그리고 밥그릇 하나만을 쥔 채로, 방문 너머를 확인하고는 곧장 빠져나갔다.

* * *

정주목사 정호서丁好恕가 박언의 집을 찾아왔을 때는, 이미 이신이 달아난 뒤였다.

“아주 개판을 쳐놨군.”

음식물을 여기저기 튀겨놓은 채였고, 남기고 달아나기엔 미련이 컸는지 밥그릇은 아예 사라져 있었다.

“소, 송구합니다. 영감.”

이신이 달아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박언은 민망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전직 목사쯤 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추태를 벌일 줄이야?

“시급에 달아난 것을 보니 배소에서 탈출한 모양입니다.”

박언이 조심스럽게 추측하자 정호서는 고개를 저었다.

“전 목사는 몇 달 전에 해배됐다.”

“그럼…….”

“최근 한양에 북인계 인사들을 공격하는 괴서가 나돌았지. 그런데 서인 영수들이 당여들을 들쑤신다는군.”

그런데 때마침 전 목사가 거지꼴이 되어서 찾아왔다가 배만 채우고서 달아났다.

두 사건 사이 명백한 연관은 없으나 매우 의심스러운 상황.

정호서는 박언과 대동한 향리들에게 일렀다.

“모든 인력을 동원해서라도 이신을 찾아내야 한다.”

의심이 옳다면 이신은 평화로웠던 조정에 분열을 일으킨 대죄인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감사께도 전해라!”

* * *

정호서의 단호하고 신속한 대응으로 소란은 곧 평안도 전체로 번져나갔다.

감사의 명령으로 정주목 일대의 수령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동원된 병사들은 탄식을 내뱉었으며, 한동안 살만 찌웠던 군마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이 같은 소란에 반응한 건 이들만이 아니었다.

한성이 시끄러워지자 일의 전말을 밝혀내려던 내시부와 서인들의 시선이 평안도로 향한 것이다.

* * *

불빛과 말발굽 소리를 뒤로하고서 이신은 달아났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정처 없는 발걸음이었으나, 번져오는 추격을 등진 그는 분명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신은 커다란 강을 마주했다.

‘여기는…….’

터덜터덜 나아간 이신은 자갈밭에 무릎 꿇은 채 압록강 물을 떠다 마셨다.

한바탕 목을 축이고서 진정한 이신은 수면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추격을 따돌리느라 차림새는 엉망이 된 지 오래.

몰골이 이러하니 반가에서 대접받을 수도 없게 되어, 최근에는 야심한 밤 민가의 부엌에 숨어들어 허기를 달래왔다.

그러니 지금은 아무리 보아도 전직 목사는커녕 방황하는 걸인으로만 보일 따름이다.

‘이놈의 신세야……!’

이신은 절망하면서 책망했다.

병사들은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처럼 악착같이 쫓아오는 것인가.

그리고 목사 시절 많이 괴롭히고 부려먹었기로서니, 고작 밥 한 끼 내어주기 싫다고 그새 일러바친단 말이냐.

이신은 대의 운운하면서 자신을 위험한 일에 밀어넣은 옛 동무들도 원망스러웠고, 자신을 한 줌 빚에 팔아치우고서 (본인의 선택이었지만) 뒤에서 호의호식하고 있을 가족 역시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이신이 한탄하는 동안.

문득 뒤에서 자갈 밟는 소리가 다가왔다.

그들은 그저 물가에 주저앉은 거지가 궁금하여서 구경 온 것에 불과하였으나,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이신은 곧장 압록강을 헤치면서 나아갔다.

“어어? 이봐!”

“사람이 물에 빠졌다!”

허둥지둥 나아가던 이신은 뒤늦게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지만, 강물은 가슴께까지 와 있었다. 철렁한 이신이 발을 돌리는 순간, 물살이 그를 밀어뜨렸다.

“으악!”

이신은 비명과 함께 압록강으로 빨려들어 갔다.

* * *

야심한 시각.

이신이 몸을 내던졌던 강변에 수십 개의 횃불과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각기 복식과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 어렴풋이 무리가 갈렸는데, 실제로도 저마다 소속이 달랐다.

그러나 공통된 목적을 위해 이곳 한 점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들었으며,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같았으므로 분쟁보다는 동행을 선택하게 되었다.

오직 근처 마을에서 붙들려 온 사내들을 제외하고는.

“여기서 제 발로 뛰어들었다는 말이냐?”

“예, 예에…….”

이신의 최후를 목격했던 사내들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처에 하나만 있어도 눈치를 보게 되는 양반님네들이 이렇게 떼거리로 몰려다니고, 또 일부는 허리에 칼마저 차고서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니 사내들이야 그저 고분고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할 말이 많지 않았다.

간만에 등목이나 할 생각으로 강변으로 왔다가, 강변에 무릎 꿇고 있는 거지를 발견한 게 전부였다.

“제가 아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예, 저희가 어떻게 감히 선비님들을 속이겠습니까?”

사내들이 질색하고서 시인하니, 선비 중 하나가 횃불을 돌려 압록강을 밝혔다.

그러나 불빛은 채 반 장도 퍼져나가지 못하고 물결따라 깨지니,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일렁이는 검은 바탕에 부평초처럼 떠다니는 반사광 파편이 전부였다.

* * *

압록강처럼 커다란 강에 휩쓸린다면, 보통은 그 강이 당사자에게는 삼도천과 마찬가지였다.

건너고 나면 망자가 되어 북망산을 앞두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이신이 처음 든 생각은 여긴가 저승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육체를 벗어두고 온다는 저승치고는 온 몸이 젖은 나무토막처럼 무겁고 딱딱하였으며, 춥고 또 호흡이 힘들었으니 도저히 저승 같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이신은 자신이 붙들랜 채로 끌려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승차사?’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무릅쓰고 고개를 치켜드니, 좌우로 어깨를 붙든 사내들은 이신이 생각하는 저승차사와는 크게 달랐다.

주변의 횃불들은 반지르르한 대머리와 함께 얇게 땋아내린 변발을 비추었고, 또 복색은 호복胡服과 진배없었으니까.

“으, 으으……?”

차차 정신이 돌아온 이신은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이곳은 삼도천 너머가 아니며 저승은 더더욱 아니었다.

바로 압록강 맞은편, 후금의 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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