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90화
이신이 얼마나 질질 끌려왔을까.
보통 사람이었다면 어깨가 빠질 것 같다며 고통을 호소했겠으나, 찬물로 목욕하고 속도 찬물로 채운 이신의 몸뚱이는 무거운 만큼이나 무감각했다.
더욱이 이신의 정신은 자신이 호인들에게 붙잡혔다는 데 팔려 있었다.
만약 놈들의 소굴까지 닿게 된다면, 과연 사납고 막되먹은 오랑캐들이 자신에게 어떤 수모를 가할지 몰랐으니까.
그러나 이신이 꾀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는데 어떻게 날랜 호인들에게서 도망칠 것인가.
그저 두려워하고 근심하면서 질질 끌려갈 따름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호인의 소굴에서 이신은 내던져졌다.
그를 잡아온 호인들은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몇 마디 외고는 물러났으며, 상석에 가죽을 깔고 앉은 (아마도) 추장은 삐딱한 자세로 이신을 내려다보았다.
오랑캐에게 감히 그 같은 시선을 받을 줄 몰랐던 이신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당장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바, 그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속셈은 감춰두고서 고개를 파묻을 따름이었다.
이에 추장이 몇 마디 짖었다.
도저히 언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야만적인 소리였으니까.
‘내가 네놈들 말을 알아들을 것 같으냐?’
딴에는 어처구니없던지라 이신은 제 신세를 돌아보며 내심 비웃었는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전께서 말씀하시기를, 혹 이 땅을 염탐하러 온 간자냐고 하십니다.”
“……?”
주변과는 어울리지 않는 익숙한 조선어에 이신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전형적인 호인의 복색을 한 자가 무뚝뚝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나 오랑캐가 조선어를 배웠다기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조선인인가?”
이에 호인이 답했다.
“묻는 말에 답하시오. 쓸데없는 건 묻지 말고.”
이신은 호인과 추장을 번갈아 보았다. 호인은 여전히 무심한 눈빛이었고, 추장은 허리춤에 찬 칼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였다.
“……아니요. 실수로 강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까지 이른 거요.”
이신은 굳이 이것을 해명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당장 자신의 꼴만 봐도 분명하지 않은가.
통역은 조선인이면서도 몰염치하게 호복을 갖추고서 오랑캐의 말을 떠들었다.
추장과 몇 마디 말을 나눈 그는, 다시 콧대를 높이고서 이신에게 물었다.
“어전께서는 그대가 목숨을 구명하기 위해 그럴싸한 명분을 만든 게 아닌가 의심하고 계시오.”
“내가 왜…….”
“당신은 강 너머에 사는 다른 조선인들과는 생김새도, 차림도 다른데 무슨 사정이 있어 압록강에 빠졌다는 말이오?”
“…….”
“납득할만한 사정이 있으면 좋겠구려. 어전께서는 간자 따위로 오래 골치 썩이는 걸 원치 않으시니까.”
추장은 여전히 칼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이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최 상선이 말했다.
“이신은 압록강에 투신했다고 합니다.”
“…….”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지만, 투신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신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라고 투신까지 한다는 말이냐?
실제로 대면한 적은 없다지만, 내가 역사로서 기억하는 이신은 탐욕스러운 소인배다. 구차하게 살아남아 개똥밭을 구를지언정 스스로 목숨을 끊을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강물에 뛰어들 생각이었다면 청천강에 진즉 뛰어들었지, 왜 압록강까지 가서 뛰어들겠어?’
차라리 후금으로 건너가려다가 물에 빠졌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증언 역시 이신이 물살에 휩쓸려서 사라졌다고만 했지, 죽음이 확인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어쩌면 강 너머에서 살아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곤란한데…….’
썩어도 준치라고 당상에 준하는 목사까지 지냈던 이신이다. 멀쩡히 살아남아 후금과 붙어먹기로 했다면 유출할 민감한 정보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렇다고 압록강 너머 적지에서 이신과 술래잡기할 수도 없으니 곤란했다.
“전하, 대신 유응시는 확보하였으니 소란은 일단락되지 않겠사옵니까?”
가는 것이 있다면 오는 것이 있다고, 이신은 떠났지만 유응시는 붙잡혔다.
그리고 그가 한양으로 압송되었을 때는 매우 고분고분했다.
내시부에서 고문을 당할 때를 대비해 내시들을 훈련시킨다던데, 유응시도 훈련을 좀 해준 모양이지.
“이번 사건은……, 예. 일단락되겠지요.”
유응시는 괴서 사건의 주범이 아니라 그저 지령을 따른 끄나풀에 불과하다지만 그게 어디인가.
괴서가 조정을 어지럽히기 위한 조작이라는 증언을 받아냈고, 함께 괴서들을 붙이고 다닌 다른 수족들도 사로잡았다.
‘그중에는 유몽인과 기자헌을 처벌하라며 상소를 올린 놈도 있었지.’
내시부에서 나서기 무섭게 조짐을 느꼈는지 관직을 버리고 도망친 자였다.
그래서 내시부에서도 주시하고 있었고, 유응시의 입에서 호명되기 무섭게 곧장 체포됐지만 말이다.
덕분에 경운궁은 다시 조용해졌다.
역적을 주벌하자며 함께 목소리를 드높이던 자들이 도리어 역적으로 붙잡혔으니 어쩌겠나?
집구석에 얌전히 처박혀서 정화수나 떠놓고 제발 불똥은 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지.
이제 이놈들은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문제가 생겨서 그렇지요.”
아파태를 통하면 이신이 그곳에 있는지 수배할 수는 있겠지만, 아파태가 내 뜻대로 움직여줄지 의문이다.
일전의 건으로 고삐를 채워놓았다지만, 그 고삐를 유지하는 본질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체결되었다는 점이다.
아파태가 이신의 존재를 이실직고하는 것보다 자신이 이용하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거짓말을 하겠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을 수 없고, 잠재적인 적에게 정보만 내어줄 뿐이라면 무의미하다.’
고민이 필요했다.
* * *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아파태에게서 먼저 소식이 닿았으니까.
의주에서부터 전해진 밀봉된 서찰은 아파태가 후금 내부에서 확보한 최신의 동향을 담고 있었고, 그중 하나가 최근 골치를 썩게 한 이신과 관련된 소식이었다.
‘아마도 그럴 테지…….’
사대패륵 중 하나인 아민이 곁에 두었다는 ‘조선인 고문’에 달리 후보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고문이 조선에서 제법 높은 관직까지 지냈다는 아파태의 첨언은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어주었다.
‘이놈이 기어코 죽지 않고 후금까지 건너갔군. 게다가 원래 역사에서 조선을 노렸던 아민에게 들러붙었으니…….’
과연 이신이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렸을까?
‘절대로 아니겠지.’
마침 이신은 유배당하기 전까지 평안도에서 요직을 지냈다. 평안도가 요동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길목임을 생각하면, 이신은 조선 정복의 야욕을 품은 아민에게 쓸만한 정보를 많이 제공했을 거다.
그렇게 단물을 빨리고도 버려지지 않은 건, 이신이 훗날 아민이 압록강을 넘을 때를 위한 길잡이에 내정되어서겠지.
‘……곤란하군.’
아민이 가진 위험성은 그가 역사에서 보여준 행보로 증명된다.
그는 정묘호란 당시 조선과 후금이 화친을 맺었다는 것을 알고도 적대행위를 지속했다.
이는 조선 정복의 야욕과 미련이 컸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또한 상부의 권위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행동할 정도로 무절제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 인물에게 좋은 도구가 생겼는데 썩혀둘 리 있겠는가?
‘반드시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
그리고 그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아파태는 두 팔을 들고서 환영할 인물이다.
조선을 이용해 아민을 차도살인하고자 하니까.
‘정묘호란은 피해갈 줄 알았는데 결국에는 비슷하게 흘러가는군.’
이괄의 난은 난을 일으킬 당사자의 죽음으로 생략되었지만, 그 직후 역적이 강을 넘어가 후금에 들러붙었다는 전말은 달라지지 않았다.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난다는 건가?’
역사란 당대의 사람 모두가 만들어가는 거대한 흐름이다.
나비의 날갯짓이 바람을 만들고 끝내 태풍마저 일으키더라도 강과 바다의 흐름을 꺾지는 못한다는 거겠지.
‘나라고 억겁의 세월이 지금까지 이어지며 만들어낸 역사를 가볍게 여기는 건 아니다.’
다만 사소한 지류쯤은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
오직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고생해 왔다.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확인을 마친 밀서는 화로에 그슬려 태웠다. 남겨둬서 좋을 게 없는 물건이었다.
* * *
타타타탕!
총성과 함께 초연이 번지고, 포수들은 곧 구령에 따라 앉았다.
이어서 후열의 포수들이 구령에 따라 조총을 겨누고 격발하니 그새 장전을 마친 전열의 포수들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일사불란한 모습.
조총의 장전은 활과 비교하면 한 세월이라 칭하여도 과언이 아닌지라 윤방輪放(연속사격)은 이미 오래전에 고안되었다.
초기에는 2단으로 시작하였다가 빠르게 대오가 두꺼워져 채 50년 만에 5단까지 늘어나지만, 아직까지는 미래의 이야기.
“조총의 장전까지 워낙 많은 시간이 소요되니, 대열을 하나 더 늘린다면 더욱 빠르게 사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북방군 부원수 정충신의 제안에 도원수 장만이 답했다.
“대열이 늘어날수록 명령도 더욱 복잡해지는데 아직은 시기상조 아니겠나?”
“이미 실전을 겪은 군대입니다. 훈련도 치열하게 하고 있고요.”
“흐음……, 그럼 일부 부대만 선발해서 3단 윤방을 시험해보세.”
……5단 윤방도 그리 멀지는 않은 미래였다.
화약의 보관법은 물론 생산법마저 크게 발전하면서, 북방군은 사치스러운 실제 사격 연습을 통해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소형화된 홍이포까지 틈틈이 세워놓고서 방포 연습을 하니, 조선 전기 때 거의 소실되었던 육군의 화력火力이 다시 되돌아온 듯했다.
그러나, 후금이 자랑하는 기마부대를 조총과 야포만으로 저지할 수는 없었다.
사르후 전투 때도, 모래먼지가 불어닥치자 포수들이 무용지물이 되어 끝내 참패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지속적으로 화살을 흩뿌리는 사수의 역할도 막중했고, 또 최전선에서 적의 기병이 파고들지 못하도록 창검과 방패를 내세운 살수들의 역할 역시 막중했다.
‘하지만 죽기를 각오하고서 달려드는 적의 기병대를 이 정도로 막아낼 수 있을까.’
정충신은 임진년 때 질리게도 보았던 왜창을 떠올렸다.
왜창은 조선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도 더러 있었으나, 대개는 병사가 제대로 겨눌 수조차 없이 길었다.
오죽하면 왜창을 다루는 왜구들도 창을 직접 내지르지는 못하고 높이 들었다가 후려치는 전법을 사용했을까.
하지만 사나운 오랑캐들이 괜히 꼴사나운 전법을 고수하는 게 아니어서, 당대의 살수들은 왜병들에게 파고들기도 전에 머리나 어깨가 깨져나갔고 기병들은 켜켜이 세운 왜창의 벽을 파고들지 못하고 피해야만 했다.
‘척계광은 장창으로 철기鐵騎를 막아낼 수 없다고 했지만…….’
척계광이 대안으로 제시한 대봉大捧(송곳을 단 봉)과 협도는 기실 치돌馳突을 막는 게 아니라 부닥치고서 난장이 벌어진 와중 말의 머리나 다리를 공격하는 무기였다.
과연 둔중한 대봉과 협도로 무장한 살수들이 난입한 적의 기병을 쫓아 함께 대오를 헤집는 것이 효과적인 대응법인지를 생각해 보면, 정충신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처럼 장정이 썩어나는 것도 아닌데 인의 장막으로 에워싸 철기를 잡는다는 건 무리다. 아예 적기가 다가오지 못하게 창날의 벽을 세우고서 막강한 화력을 퍼붓는 게 사람이 덜 상하는 비결 아닌가?’
그러나 인가는 차치하더라도 과연 다수의 살수를 장창으로 무장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장창을 만들기 위해서는 길고 곧으며 내구성까지 좋은 나무가 필요한데 전통적으로 장창 제작에 사용해온 이년목二年木은 워낙 진귀하여서 국초부터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니까.
‘명국에서는 가檟나무(개오동)으로 창대를 만든다고 하던데, 가 역시 이 땅에서는 거의 나지 않으니.’
참으로 곤란했다.
‘항왜들에게 자문을 구해볼까?’
왜국이 조선보다 덥고 습하여서 나무가 빨리 자란다고는 하지만 그처럼 다수가 왜창을 장비하려면 반드시 나무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을 터다.
그러니 왜구들이라면 오래전부터 고민해보았을 터라, 어쩌면 그들에게서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데엥- 데엥- 데엥- 데엥-
안쪽의 진영에서 네 차례 징을 울렸다.
북은 전진을 의미하고 징은 퇴각을 의미하는데, 두드리는 횟수에 따라 시급함이 달라 네 번은 싸움에서 물러섬을 의미했다.
지금은 훈련 상황이니 그것의 종료를 의미하겠지만.
“살수들 훈련할 때부터 말이 없어지던데, 고민이라도 있나?”
“……대봉과 협도는 다룸이 난삽하여서 실전성이 떨어지고, 또 적의 철기가 파고든 다음에야 뒤늦게 대응하는 무기이니 차라리 장창을 더 많이 쓰는 게 어떨까 고민해 보았사옵니다.”
“아직 확신은 들지 않는 모양이로군.”
“예.”
장창을 더 무장하려면 신경 쓸 게 많다는 것쯤은 장만도 알고 있었다.
그는 정충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받아든 권자를 내밀었다.
“압록강으로 군사를 옮기라는 명령이네. 장창 문제는 올라가면서 차근차근 논의해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