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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91화 (91/380)

인조, 명군이 되다 91화

고작 얼마 전 평안도에서 기병이 내달리고 보졸이 들쑤셨는데 이제는 아예 북방군의 과반이 압록강으로 나아간다니 도민들은 전쟁이 벌어지는 게 아닌가 수군대었다.

마침 나라를 거의 망국의 지경까지 몰아붙였던 임진년의 왜란이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었던바, 벌써부터 깔고앉은 자리가 불편해진 사람이 많았고 심한 이는 아예 짐을 꾸려 이른 피난을 시작했다.

그렇게 고을마다 으슥하게 불안이 번져나가자 더 불안해진 건 각 읍 수령들이었다.

목민관의 업무인 수령칠사守令七事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농상성農桑盛과 호구증戶口增이었다.

이름 그대로 농업을 흥성하게 하고 주민의 숫자를 늘이는 것인데, 이처럼 사람들이 전전긍긍하여서는 농사에 집중하지 못하고 심하게는 아예 떠나버리기까지 하니 어떻게 수령칠사를 성사할 수 있겠는가.

물론, 수령칠사가 수령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행해야 하는 일생의 대업은 아니다.

하지만 다 고과인데 건성으로 방기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

덕분에 수령들은 간만에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친히 동요하는 읍민들을 진정시키고 횡행하는 헛소문을 다스렸다.

어쨌거나 최근에는 북방군이 가도의 해적들을 말끔하게 다스린 성과가 있었던지라 오랑캐는 압록강조차 넘지 못할 것이며, 설령 들어오더라도 여기까지는 쳐들어오지 못한다고 공약公約을 남발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수령들이 각자 읍이 압록강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에 따라 주장하는 오랑캐들의 남방한계선이 제각기 달랐다는 앙증맞은 실수가 벌어졌지만, 읍민들은 일상을 회복했으니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수령들은 북방군이 또 한 번 일을 잘 해주어서 자신들이 내건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전락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마당의 흐드러진 벚꽃이 바람따라 휘날리며 정취를 일구어낼 때면, 노인은 일순 고향으로 돌아온 듯해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 땅은 본디 노인이 나고 자란 땅이 아니요, 역사의 격량에 휩쓸린 끝에 떠내려온 이국이다.

기억 속 형제들의 젊은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낡아 부스러져가는 자신의 몸뚱이를 생각해 보면 벅차오른 감정도 썰물처럼 가시고 씁쓸한 기분만이 들었지만, 이제 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이미 이곳에서 일가를 이루고 드높은 자리에 올랐는데 어떻게 다 저버리고서 맨몸이 되어 이미 저버렸던 가족을 찾아간다는 말이냐?

고향으로 돌아가면 정작 이곳 생각에 잠을 청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일 터라, 노인은 이것이 무의미한 미련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검을 닦는 손이 멈춘 것은 어째서인가.

벚나무 뒤흔들던 세찬 바람도 멎고, 삼십 년 허리춤을 지켜온 칼에 기름 먹이는 것도 끝났다.

작업을 마친 노인이 칼을 칼집에 집어놓고서 다시 좌대에 얹어놓을 즈음 고요하던 마당에 발소리가 울렸다.

“들여라.”

노인의 허락에 마당을 쓸어내던 노복이 대문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들어선 손님은 젊은 무관이었다. 그는 대청에 선 노인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소관 김준룡金俊龍이 위망 높으신 대감을 뵙습니다.”

“젊은 무부께서는 이 늙은이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 찾아오셨나?”

“북방군 도원수께서 대감께 면대를 청하셨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서찰에 있으니 살펴주십시오.”

김준룡이 서찰을 받쳐들고 나아갔다.

그것을 노인이 받아 펼치니 서찰에서는 직접 찾아가지 못하고 이렇게 사람만 보내 여청을 청하는 것의 미안함과 함께 부디 행차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담고 있었다.

그러니 막상 호출의 사유는 서찰에 담기지 않았던 셈이나, 일군을 이끄는 도원수가 한때 칼밥 먹고 살았던 전직 왜장에게 면대를 청할 이유야 그리 헤아리기 어렵지 않았다.

김충선은 서찰을 접어 도로 돌려주고는 말했다.

“채비할 테니 잠시 기다려주게.”

“……바로 출발하십니까?”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무얼 지체하겠나.”

김충선은 마당 건너편의 별채를 가리키고서 덧붙였다.

“가서 볕이나 피하고 있게.”

“예!”

김충선은 안쪽으로 발을 옮겼고, 김준룡은 그런 김충선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본디 왜인이라는데 우리말에 능숙하구나.’

만약 일대가 항왜들이 사는 항왜촌이 아니었다면 김충선은 그저 이원익처럼 유난히 키 작은 (조선) 사람으로 여겨졌으리라.

하기야, 항왜들이 귀화하고서 꼬박 스무 해가 넘게 흘렀는데 정헌대부正憲大夫까지 오른 김충선이 어떻게 (조선) 말을 구사하지 못할까.

김준룡은 제가 시답잖은 데 연연했구나 치부하며 별채의 그늘로 향했다.

김충선이 사랑채를 나섰을 때는 반 각쯤 지난 뒤였다.

그새 의관을 정제하였는지, 김충선은 한양 북촌에서 흔히 보이는 지체 높은 양반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당장 망건에 달아놓은 관자만 하여도 정이품 대신만이 착용가능한 도리금관자를 하고 있었으니 설령 한양에 데려놓더라도 십중팔구는 먼저 허리를 숙이게 될 터였다.

그러나 허리춤에 찬 칼만은 흔히 보이는 호신용 환도와는 판이하게 달라서, 김충선의 출신을 말해주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칼을 닦고 있었는데 곧바로 차고 나오게 될 줄은 몰랐군.”

김준룡의 시선을 의식한 김충선이 한 마디 하고서 섬돌을 내려오자, 김준룡이 멋쩍은 낯으로 답했다.

“안내하겠습니다.”

* * *

김충선은 북방군이 주둔하였다는 안주부에 이르렀으나 여정이 끝나지는 않았다.

그를 부른 사람이 도원수 장만이기는 하였으나, 기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압록강까지 나아간 부원수 정충신이었으니까.

“차라리 본의 그대로 알려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조금 더 고생하게 된 김충선이 마침 술도 들어갔겠다 유감을 드러내자 장만이 난색으로 답했다.

“대감께서 여기까지 행차하도록 청하는 것도 미안한데, 하물며 압록강까지 나아간 부원수가 청하였다면 발걸음 해주실지 근심하여서…… 염치불고하고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다 같이 나랏일 하는 신세인데 폐를 끼치고 말 게 있겠습니까?”

후금의 준동은 이미 폐주 때부터 경계하고 있던 김충선이다. 그래서 북쪽의 변방을 자원하여 십여 년 동안 지켜오지 않았던가.

그 공로로 정헌대부에 올랐으나 부름이 없어 늙은 무부가 대개 그러하듯 퇴물의 신세가 된 줄 알고서 동포들과 말년을 흘려보내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렇게 잊지 않고 불러주니 김충선으로서는 고마울 노릇이었다.

그러니 김충선이 괘씸하게 여기는 것도 장만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제가 마치 부름이 있어도 한 몸 옮기기 귀찮다고 사양할 소인배로 여겨진 것이었다.

“오히려 도원수께서 이 사람을 두고 그 같이 근심하였다니 황망합니다.”

그러나 김충선의 이 같은 열정이 장만에게는 의외였다.

오래전부터 도원수 자리는 더 유능한 사람에게 떠넘기고서 뒷방으로 물러나 뱃가죽이나 긁으며 말년을 보내고 싶었으니까.

그러니 이해가 될 리 없어서 장만은 미안함에 멋쩍게 웃어버렸다.

“하하하…….”

부원수 감으로 이괄이나 이서를 꼽았던 안목이 여전하다면 여전한 셈이었다.

장만은 미안함에 사과했고, 한 번 유감을 드러냈던 김충선은 받아들였다. 어쨌거나 사소한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었으므로 원망까지 품을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김충선은 극잔한 접대를 받으며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계절은 여름으로 나아가는 중이었으나 김충선은 갈수록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 * *

그리고 도착한 의주부에서.

“명망 높은 선지善之(김충선) 대감을 뵙습니다.”

정충신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 태도에서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을 멀리서 불러내었다는 데 미안한 감정이 느껴졌으므로, 김충선은 가볍게 농을 던졌다.

“명망이야, 다 늙어빠진 나보다는 부원수 영감이 훨씬 더 높지. 가도의 해적을 정벌한 것이 오롯이 그대 공로라는 말이 있던데.”

“대업이 어찌 한 사람의 공로만으로 성사하였겠습니까. 소관의 업적이야, 그저 병사들의 분전과 선현들의 업적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입니다.”

“하하. 말은 잘 하네만, 이 사람을 불러낸 게 고작 겸양이나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니겠지?”

“몰염치하게도, 그렇습니다.”

정충신은 살수들을 훈련하며 떠올린 고민을 밝혔다.

“서신으로도 나눌 수 있는 고민이겠으나, 대감께서 군사 훈련에 직접 참관해 주신다면 더 확실한 평가를 내려주실 수 있을 것 같아 면대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옛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지 않았던가.

조선의 군사는 임란부터 지금까지 개혁과 퇴락을 거치며 지극히 문란해졌다.

거기에 변방은 중앙과는 사정이 달라 여전히 구식을 운용하는 곳도 많은데, 여기에 한동안 왜에서 종군했던 김충선의 역사까지 더해지면 글자만으로는 소통이 불분명할 수 있었다.

단적으로, 같은 장창이라도 조선 전기의 양식인지, 임란을 거치며 변화된 양식인지, 척계광의 전술에 따라 도입한 명나라 양식인지, 아예 왜국의 장창인지 어떻게 분간하겠는가?

고향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말년을 보내던 상급자를 국경까지 불러낸 건 지극한 결례겠으나, 정충신이 보기에 결례의 대가는 오롯이 자신만 지는 사소한 고충이요, 군사의 개혁은 국가의 안위와 직결된 대업이므로 감히 주저할 게 아니었다.

십중팔구는 이 같은 발상에 융통성이 없다며 학을 떼겠지만 김충선은 아니었다.

“나라를 지탱하는 북방군의 부원수가 나의 자문을 바란다는데, 어찌 늙은 무부로서 사양할 수 있겠는가?”

김충선이 요 한동안 고향 생각만 하며 적적했던 것은 달리 정신을 쏟을만한 일이 없었던 탓이 컸다.

나라에서야 공로가 많은 사람이 늙기까지 했으니 여생은 편하게 보내라며 내버려 둔다지만, 본디 무사武士란 칼로써 살고 칼로써 죽는 법이다.

조정의 의도가 배려라는 건 잘 알지만, 무사로 태어나 한평생 무사로서 살아온 김충선은 쓸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하던 차에 최근 대승을 거두었다는 명장이 늙은 무사를 잊지 않고 불러주니 영광 아니겠는가?

김충선은 도리어 늙은이 옹고집으로 한 조언에 북방군의 전력이 퇴화하지는 않을까 걱정될 따름이었다.

“달리 하던 일도 없었으니 조언이야 부담 갖지 말고 얼마든지 구하시게. 그저, 이 늙은이의 간섭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주지만 않으면 좋겠구먼.”

김충선이 쑥스럽게 말했다.

“민망한 말씀 거두어주십시오. 대감께서 지금의 지위에 오르신 건 다 상응하는 공적을 세우셨기 때문인데, 어찌하여 스스로를 낮추십니까.”

“흐흠……, 그런가.”

김충선이 멋쩍은 얼굴로 중얼거리자 정충신이 화색으로 답했다.

“대감께서 겸양하시면 저는 얼굴을 땅에 묻고 다녀야 해서 그럽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몸인지라 이쯤에서 용서해 주십시오.”

명장인 정충신이 이처럼 띄워주니 김충선은 자기가 영 죽지는 않았나보다,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늘그막의 체면에 아주 망신을 뻗칠수는 없는지라 소매로 꿈틀대는 입을 가리고서 괜히 헛기침하였다.

“……크흐흠! 그래. 나도 이쯤할 터이니 부원수께서도 그쯤하시게.”

정충신이 더 띄워주었다간 안면근육을 주체하지 못하여 아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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