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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92화 (92/380)

인조, 명군이 되다 92화

살수조의 훈련이 시작되자 일대의 읍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보통 구경꾼들이 선호하는 훈련은 포수조의 실사격이었다.

포수들이 거듭된 훈련으로 일사분란한 윤방輪放을 펼치는 가운데 야포가 불을 뿜어내는 모습은 박력이 넘쳤으니까.

그러나 의주부에서는 예외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고을 자체가 압록강을 두고 후금과 면한터라 근래 군사들의 움직임으로 인한 백성들의 동요가 더욱 심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의주부사가 팔아먹을 수 있는 오랑캐의 남방한계선도 없었던 탓이다.

이러한 의주에서 가도의 해적들을 단숨에 무찔렀다는 북방군이 위명에 걸맞은 정예로운 모습을 보여주니, 위안을 얻고 싶은 의주의 백성들로서는 안주부에서처럼 뻥뻥 터뜨리는 게 없더라도 훈련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사정은 정충신도 잘 알았고, 또 의주부사가 임시 주둔지를 내어준 만큼 갚아야 할 빚도 있는지라 구경꾼들은 최소한으로 통제했다.

“무언가가 날아다닐 일 없는 살수조 훈련이어서 가능한 조처입니다.”

정충신은 손으로 주변에 빼곡하게 들어선 의주 읍민들을 아우르면서 덧붙였다.

“사수조나 포수조 훈련이었다면 당연히 더 물렸겠지요.”

지금이 예외적인 상황이라는 설명에, 의문을 드러냈던 김충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이런 식으로 훈련하는 줄 알았지 뭔가?”

“하하. 보통은 이렇게 훈련하지 않습니다.”

의문을 해결한 김충선은 다시 훈련에 집중했다.

척계광이 고안한 진법에 따라 살수조는 다양한 무기로 무장해 각 무구의 장단점을 강화하고 보완하는 식으로 교전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방식은 경무장하고 난전을 벌이는 해적들을 소탕하는 데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규율을 갖춘 대규모의 군사가 격돌하는 회전에서도 같은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여러 무기가 어지러이 뒤섞이며 서로 보완한다는 것도 말로만 쉬울 따름이다. 군사들이 하나의 정신을 공유하는 집단지성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상적인 협동이 이루어지겠는가?

하물며 낭선狼筅처럼 난삽한 무기는 정렬되지 않으면 도리어 우군만 상하게 하는데, 반대로 후금의 전술은 철기를 앞세워 대오를 분쇄하는 것이었다.

“부차富車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후금의 철기가 흙먼지 이는 한 순간에 들이치니, 바람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좌영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폐조 초기 간행된 병서인 연병지남練兵指南에 따르면 살수조는 적기가 들이칠 때 거마작拒馬筰을 들어올려 방어한다고 되어 있지만 막상 실전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후금군이 돌격에 앞서 빈 말들을 내몰아 거마작을 무력화한 탓이었다.

어쨌거나 말 위에서 태어나 말 위에서 죽는다는 북쪽 오랑캐들인데 거마작 하나 돌파할 비책이 없었겠는가.

실전을 경험해보지 못하고서 얕은 꾀를 부려 적의 장기를 봉쇄할 줄로 철석같이 믿었다가 도리어 제 발등만 찍은 셈이었다.

“내가 왜에서 종군하였을 때 가장 많이 편성되었던 무기는 창이었네.”

전국시대의 왜군은 봉건적으로 구성되어 소부대부터 대부대까지 구성이 제각기였지만, 대체로 창을 가장 많이 두었다.

“그러면 철기는 쉽게 막아낼 수 있었습니까?”

“그건 아니었네. 자네도 알다시피, 왜창은 너무 길어서 늘어뜨리거나 찌르는 게 쉽지 않았거든.”

꼭 장창이라고 찌르기 힘든 건 아니었다.

기원전 마케도니아군의 주력 병종 페제타로이는 짧게는 4m에서 길게는 6m까지의 장창을 내질렀으니까.

왜창이 그처럼 싸우기 어려웠던 건 양산형 장창이 일부 8m까지도 늘어났던 반면 균형추 역할을 할 물미는 달지 않았던 탓이었다. (숙련도가 부족해 물미로 우군을 때리는 경우가 잦아서였다.)

“하지만 오롯이 치돌만을 막고자 한다면, 그런 용도에 걸맞은 창을 만들 수는 있겠지.”

김충선의 제안에 정충신은 상상력을 발휘했다.

“오직 대기병만을 위한 창이라면 적어도 왜창 못지 않은 길이를 갖추어야겠지요?”

적의 기마도 마찬가지로 창을 가져올 수 있고, 또 적기가 창에 꿰어 무력화되어도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관성으로 달려드는 적기를 몸으로 받아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창이 그렇게 길어진다면 김충선의 지적처럼 늘어뜨리기 힘들어질 거다.

“하지만 단병전을 벌일 게 아니라면, 물미를 땅에 댄 채로 늘어뜨려도 되겠군.”

“그러면 무게 상당부분을 땅이 대신 받아줄 테니 부담도 덜하고, 균형 잡기도 쉽겠습니다.”

“적기와 부딪쳤을 때 충격도 크게 상쇄되겠지.”

척계광이 장창으로 철기를 잡으려다간 부러진다고 한 것은, 장창수가 무기를 휘두르는 경우를 상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창을 말뚝처럼 땅에 대고서 단단히 받쳐들어도 그저 맥없이 부러지고만 말 것인가?

장대가 견디지 못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장창 역시 철기가 육중한 무게로 달려드는 힘을 그대로 날카로운 끝에 실어 철갑을 관통할 터이니, 사람이건 말이건 헤집어놓을 것이다.

이만하면 능히 장창으로 철기를 감당한 셈 아니냐.

반대로 적이 단병전을 걸어온다면 크게 위험해지겠으나, 북방군은 살수조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살수들이 창벽을 세워둔 채로 사수들이 끊임없이 화살을 쏘아대어 경무장한 적을 쓰러뜨리고, 포수가 철기와 갑주 입은 자들을 저지한다면…….”

정충신의 머릿속에서 창벽을 마주한 적들이 분명히 달려들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서 쏟아지는 화살과 총탄 앞에 추풍낙엽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하지만 적들이 창벽에 달려들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일세.”

김충선의 지적에 아차 싶었던 정충신이었으나, 이내 그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적이 달려들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할 비장의 수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홍이포입니다.”

비록 소형화하면서 원판 같은 박력은 사라졌다지만 장기인 엄청난 사거리는 여전했다.

“멀리서 포탄을 계속 쏘아댄다면, 적은 군대를 아예 물릴 것이 아니고서야 결국에는 달려들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 * *

훈련을 마치고 귀환한 정충신은 곧바로 김충선 및 휘하 장수들과 모여 구상을 구체화했다.

다른 장수들 역시 현재 살수조의 난잡한 무기 구성과 기마돌격에 취약한 원앙진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던 터라 정충신이 제안한 장창방진에 큰 매력을 느꼈다.

“방진 맨 앞에 서는 병사들은 적의 유격에 취약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등패수들처럼 갑주를 두 겹으로 입히면 되지.”

“문제는 역시 장창의 수급이겠습니다.”

“안 그래도 그 때문에 어렵게 모신 분이 있잖은가.”

정충신의 말과 함께 제장 모두의 시선이 김충선에게로 향했다.

“어음.”

“한 말씀 해주시지요, 대감.”

“……원래 나는 철포부대 지휘관이었네. 물론, 창도 다룰 줄은 알지만……,”

“오오.”

누군가의 감탄에 김충선은 난색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다뤘던 창은 기병창과 대신창大身槍(큰날창)이라고, 족경들이 쓰는 장창과는 종류가 달라.”

제장마다 얼굴에 실망감이 서리자 김충선이 못 이기겠다는 듯 덧붙였다.

“……그래도 장창이 어떻게 되먹었는지는 알아.”

이에 정충신이 물었다. 기실 이것이 김충선을 압록강까지 불러낸 이유였다.

“그만한 길이의 창을 병사들마다 들려주려면 목재의 수급이 매우 어려웠을 텐데요.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특별한 비결까지야 되겠느냐마는…….”

김충선은 조선군이 장창의 소재로써 관성적으로 고집해온 이년목을 대체할 방법으로 잡목에 대나무편을 덧붙여 강화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품이 더 들어가는 만큼 제작이 수고로워지긴 하겠으나, 진귀한 이년목을 품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마다할 게 아니었다.

김충선은 왜창의 구조가 대강 그러하다는 것만 알고 정확한 제작법은 모른다고 했지만 이만해도 어디인가.

항왜촌에 수배하여 이 같은 제작법을 아는 사람을 수배한다면 한두 명 쯤은 구해질 법 하였고, 장인으로서 우대를 약속한다면 동포들 곁을 지킨답시고 마냥 범부처럼 사는 것을 고집하지 않을 터이므로 정충신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걱정되는 게 있다면, 제법 구상은 그럴싸하였으나 군제의 한 축을 완전히 뒤바꾸는 것이었으므로 여러 사람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먼저 (크게 어렵지는 않겠으나) 도원수부터 설득해야 했고, 다음에는 (매우 어렵겠으나) 중앙을 설득해야 했다.

특히 후자가 난감한 것은, 무구를 총체적으로 교체한다 함은 연한이 남은 무구를 대체한다는 의미인지라 중앙에서는 기물 제작이 들어간 예산을 땅바닥에 버리는 것으로 여길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살수조의 무구를 장창으로 교체했을 때의 효용은 재물로서 환산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비록 이항복 밑에서 수학하였다고는 하나 본질이 무부인 정충신으로서는 꼬장꼬장한 중앙의 늙은이들을 설복할 자신이 거의 들지 않았다.

살수조의 무기를 교체하는 것은 대적을 방비하기 위함이니 고생길이 훤히 보인다고 물러서지는 않겠지만…….

* * *

‘뭐를 또 자꾸 해달래…….’

병조판서 김신국은 원주부 원수부에서 날아온 문서에 질색했다.

살수조의 무구가 난잡하여서 장창으로 통일하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별첨으로 척계광의 말과는 달리 장창으로 철기를 막아내는 방법과 함께 살주조가 장창으로 무장하였을 때의 용법과 효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김신국은 이것이 원수부의 직인이 찍혔지만 부원수 정충신이 추진하는 것임을 짐작했다.

‘빨리 체차해달라던 도원수 대감이 이처럼 공을 들여서 일을 벌이지는 않을 터이니…….’

더욱이 비슷한 내용을 담은 선지善之 대감의 서찰도 시의적절하게 날아오니, 정충신이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는 게 아님을 알았다.

김신국은 의아해하는 하관들에게도 문서를 돌렸고, 먼저 일독을 마친 참판 이귀가 말했다.

“실효성은 서면이 아닌 실전으로 검증되어야 확실해질 테니 일부 도입이라면 소관은 찬성이지만, 과연 호조에서 협력하겠습니까?”

문건은 참의와 참지에게도 돌아갔으나 그들의 의견도 매한가지였다.

군무를 관장하는 병조이니, 말단이 중앙을 위협할 정도로 강화되는 것만 아니라면 군병의 개선이야 응당 찬동할 일이었다.

더욱이 근거도 없잖아 있고, 증명이 필요하더라도 참판의 말처럼 점진적인 개혁으로 입증해나가면 된다.

다만 문제는 뭐든지 다 그렇듯이 예산이었다.

원칙적으로 국가의 공물公物을 관장하는 기관은 호조지만, 호조 안팎으로도 공물을 다루는 자잘한 기관이 많았다.

이는 둔전의 경영으로 운영비를 충당하는 병조도 마찬가지라 자체적으로 예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덕분에 관청마다 자기 장부를 하나씩은 가진 채로 저마다 쓰고 벌면서 서로 꾸어주고 갚으니 국가 재정의 운영이 매우 어지러웠지만, 이 상태에서도 호조의 위세가 인사권을 가진 이조에 버금가므로 가벼이 장부의 일통을 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거나, 병조도 위세로만 따지자면 호조 못지않았으나 군대의 유지비는 둔전 경영 따위로 다 충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에는 호조에 아쉬운 입장이 될 수밖에 없는지라, 호조에서 반대한다면 병조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호판인 이광정은 예전에 꾸준히 군축을 주장했던 사람이니…….’

북방군이 가도의 해적들을 소탕하자 매우 통쾌하게 여겼으면서도, 병조에서 아쉬운 소리를 할 때마다 공과 사는 구분하자면서 매우 인색해지니 난감했다.

그렇다고 김신국 역시 호조의 사정을 아예 모르지는 않는지라 군대를 먹여야 하니 아랫돌 빼어 윗돌 괴언달라 마냥 억지를 부려대기도 민망했다.

판서씩이나 되어서 알만한 사람이 이러냐는 핀잔을 들을 수는 없잖은가?

“도와주기 힘드니 알아서 해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세간에서 조명받는 부원수가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서 협조를 청하는데 상급기관이 되어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리는 것도 부끄러운 짓이었다.

김신국이 난색을 짓자 병조참판 이귀가 말했다.

“손 벌릴 데가 호조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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