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93화
과연 손 벌릴 데가 호조만 있는 건 아니었다.
기타 관물官物을 다루는 관청도 많으나, 이들 규모로는 군대의 운영비에 비할 수 없다.
그나마 체급 맞는 곳이 중앙에서는 호조뿐인 것이고……,
‘응달에 걸친 곳까지 포함하자면 내수사가 있지.’
면세의 특권을 가진 내수사는 중앙에 세금을 내지 않는 궁방전宮房田들을 전국 팔도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거기에 마찬가지로 면세인 어전漁箭과 염분鹽盆을 거느리고 장리長利까지 놓으니 안에서 돌아가는 규모가 막대하다는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내수사의 관리는 보통 중앙의 사람은 쓰지 않고 내시부 환관들이 겸직하거나 그들, 혹은 왕이 신뢰하는 궁노宮奴를 천거하는 식으로 돌아가니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다.
이것이 김신국에게 내수사가 양지가 아닌 응달에 걸친 이유였다.
내수사가 완전히 음지의 존재도 아니지만, 호조의 재상인 그조차 내부를 알지 못하니까.
김신국은 이미 북방군 창설 때 내수사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피역자들을 안주부로 옮기는 과정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는데 호조에서도 사정이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왕이 딱한 사정을 헤아려 은자恩資를 베풀어주시니, 내수사가 막강한 금력에 더불어 전국팔도에 뻗은 세력을 동원하니 일말의 넘침이나 모자람 없이 피역자들을 안주부까지 이송해냈다.
그 유능함에는 선혜청 제조를 겸하는 이원익마저 보고 배워야 한다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
‘하지만 다시 내수사에 손을 벌리는 것도…….’
이원익의 말은 반성하고 우리도 발전하자는 의미에서 한 것임에도 그의 찬탄이 세간에 알려지자 새삼스럽게 대경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어떻게 대과를 당당히 급제한 사대부가 저열한 환관들을 보고서 배우냐는 것이다.
그만큼 선비들의 자존심이란 매우 강한지라, 여차하면 왕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데 재상이 이미 은자를 크게 입고도 또 내수사에 손을 벌린다는 것은 사대부 전체의 망신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그때는 전하께서 먼저 사정 어려운 것을 헤아려서 살펴주었지, 먼저 찾아가게 된다면 영락없이 거지가 문간으로 나아가 걸식하는 꼴이 아니냐?’
김신국은 속으로 탄식을 삼키고서 이귀를 바라보았다.
그가 참의를 지내고 있을 적에는 썩 사이가 데면데면하였다가, 근자에 들어서는 조금 익숙해졌나보다 하고 안도하였는데 죽을 길을 태연하게 권하는 걸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정녕 전하께 도움을 구하자는 말인가?”
그러자 이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될 게 어디 있답니까. 하물며 북방군을 창설한 것도 다 성지聖智에 의해서거늘, 응당 은전을 베푸시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북방군은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왕의 군대란 말이냐.
김신국은 그 점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자존심 강한 이귀와 주제에서 벗어난 논쟁을 지리멸렬하게 이어가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이귀가 그처럼 주장하는 것도 감정적으로는 이해됐다.
어쨌거나 군대 확장과 축소를 두고 날선 언쟁이 오갈 때, 병조의 손을 들어주고서 북방군을 신설한 사람은 금상 아니시냐.
병조로서는 그저 성지에 응하여 제 몫을 열심히 하고플 따름이라, 미편하게 되었다면 전하께서 보따리를 슬쩍 풀어주어 사정을 봐주었으면 하는 게 김신국의 진심이었다.
“판서께서 자신 없으시다면 소관이 나서겠습니다.”
“……아닐세.”
자신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어전으로 나아가 손을 벌린다면, 자신이 당할 망신과 여느 사대부들의 규탄은 둘째 치더라도 제 몸뚱아리 하나 보전하리라는 확신조차 없었으니까.
처음 금상이 보따리를 풀면서 어떤 당부를 내렸던가?
북방군의 일로 이부耳部(귀)를 다시 어지럽히지 말라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경고하기를, 경회루 기둥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어쩌면 이번에 그리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참판이 가면 될 일도 안 된다…….’
보나마나 자신에게처럼 다 왕의 지시가 아니었냐며 강짜를 놓을 텐데, 한 번도 이귀에게 당해주지 않고 역으로 조리돌림이나 놓았던 왕이라면 그저 망신이나 되돌려주고 말 터였다.
“이 건은 내가 상주드리지.”
김신국이 병조참지 앞으로 가 있던 문서들을 끌어모으자, 이귀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십시오.”
……이러니 어찌 믿고 맡길 수 있을까.
자신이 경회루 기둥에 서서 백척간두를 실현하더라도, 직접 어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 * *
“우변右邊이요!”
과녁을 확인한 내시가 백색 깃발을 흔들었다.
“모함이다!”
“……?”
내가 보기엔 제대로 맞췄는데 우변이라니.
감히 세자의 활 실력을 음해하는 내관을 대동하고서 직접 과녁까지 나아갔다.
“이거 봐.”
“예.”
“사슴 구레나룻을 정확하게 맞췄네.”
나는 화살이 뚫고 지나간 가리켰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이 보기에는 거기까지 털이 그려지지 않은 듯합니다.”
“화살이 파고들어서 가려진 걸세. 원래 여기까지 털이 있다니까?”
“……설령 털이 그러져 있더라도, 어찌 화살이 터럭 스친 것을 관중이라 칭할 수 있겠사옵니까.”
“맞춘 건 맞춘 것이지! 터럭이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나? 내관은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말도 모르나? 털도 엄연히 신체의 일부일세!”
내관에게 유학을 강변하고 있으니 세자가 다가와서 말했다.
“아바마마, 소자의 눈으로는 우변이 맞는 듯합니다.”
“…….”
화살을 날린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할 수 있을까.
“과녁이 아니라 활이 문제였구나.”
“아바마마…….”
“그래, 알았다. 화살이 조금만 더 왼쪽으로 들어갔다면 충분히 관중이 나왔을 텐데 아쉬워서 그렇다.”
“다음에는 꼭 관중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화공에게는 과녁을 조금 더 크게 그리라고 일러두마.”
세자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나도 이런 농담을 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었다.
보통 왕과 신하가 함께 활을 쏘는 대사례大射禮는 무대인 사단射壇에서 과녁까지 간격이 90보다.
다른 활쏘기들과 비교하면 조금 좁은 편인데, 무과 과목에서 정확도를 시험하는 목전木箭은 간격이 240보까지 늘어나고, 근력을 시험하는 철전鐵箭마저 80보 간격이니까.
그러나 대사례에서 활을 쏘는 사람은 무인이 아니라 왕과 문인들이라는 점에서 90보는 썩 적당한 간격이다.
하지만 나는 아예 활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세자가 궁시弓矢를 연마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 발 걸쳤다가 연신 허공만 관중시키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한 번은 과녁에서 10보나 떨어진 핍乏(가림막)을 관중했으니 세자가 화살촉에 미리 과녁을 붙여놔야겠다고 놀려대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세자가 그러지는 않았지만…….
“어디, 그러면 나는 절반 거리에서 쏴야겠다.”
“이러면 화공이 품을 더 들이지 않아도 과녁이 커진 것과 마찬가지군요.”
“……크흐흠!”
아무튼 원라 간격보다 절반쯤 거리에서 시위를 당기는데, 한 내관이 다가왔다.
“병조판서가 입시를 청했나이다.”
나는 당겨놓은 시위를 내려놓고서 답했다.
“들라고 하세요.”
병조판서라는 방문자의 정체도 그러했지만, 조회나 윤대가 있음에도 따로 찾아온 걸 보아 논제가 사사롭지 않을 듯했다.
그러니 세자가 들을 만한 이야기냐는 것은 고민해봐야겠지만…….
“소자는 물러나 있겠사옵니다.”
“아니다. 있거라.”
세자의 경험을 위해서.
누대의 왕들은 세자를 준비된 후계자로 만들고자 힘쓰면서도, 필요 이상의 정보와 권한을 공유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개국 초반에는 동시에 두 명이나 존재했던 상왕이, 더는 볼 수 없어졌을까.
나아가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광해군을 상대로 허울뿐인 양위 파동을 거듭하면서 왕과 세자의 관계를 아비와 아들이 아닌 권력의 경쟁자들로 전락시켰고, 이는 인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두 놈처럼 권력에 도착적인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선조와 인조가 자식 상대로 공공연히 기싸움을 걸어댄 건 먼저 본인들의 무능과 무책임함으로 실정과 파행을 거듭하면서 스스로 왕권을 대단히 실추시켰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수습한답시고 선조와 인조는 제 자식 상대로 인간언저리 같지도 않은 짓을 거듭했던 셈인데 나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렇다면 세자를 견제할 이유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셈이었다.
“세자도 군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지.”
곧, 병조판서 김신국이 입시했다.
“전하…….”
김신국은 허리를 숙이고서 소극적인 걸음으로 나오다가, 고개를 들더니 기겁했다.
“허억?!”
……이건 또 무슨 광대짓일까.
제가 입시를 요청해놓고는 정작 앞에 이르러서는 귀신이라도 본 듯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그런에 위아래로 까딱까딱 움직이는 동공을 보니, 그가 무엇을 의식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설마 내가 이걸로 판서를 쏠 것 같아서 그럽니까?”
활을 들어보이자 짐작이 맞았는지 김신국이 움찔거렸다.
“아, 아니옵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반응만 보면 이미 화살 몇 방 맞아본 적 있는 수준인데.
“……참나.”
활을 내관에게 넘기자 김신국은 그제야 안심했는지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 괘씸한 모습에 다시 경회지에 밀어 처넣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으며 사유를 물어보니, 김신국이 도둑마냥 제 발을 절어댄 이유가 있었다.
“북방군에 새로운 장비를 지급하고 싶은데 예산이 부족하다고요?”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병판께서는 예산 부족의 문제를 어전에서가 아닌 지금 개인적으로 찾아와 아뢰시는군요.”
무슨 의도인지 뻔히 보인다고 꼬집어주니 김신국의 얼굴이 붉어졌다.
“송구하옵나이다.”
“……하지만 병조판서께서 아무런 자신감도 없이 나를 찾아오지는 않으셨겠지요?”
내수사의 재산은 무턱대고 찾아와 내어달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김신국도 그쯤은 당연히 안다는 듯, 소매에 넣어두었던 여러 장의 문서를 꺼내 바쳤다.
“안주부의 원수부에서 보내온 첩정牒呈이옵니다. 그러니 직인은 원수부의 것이오되 세목을 살펴보면 실질적으로 구상한 사람은 부원수로 사료되옵니다.”
“이건 무엇이지요?”
이질적인 편지 한 장이 섞여 있었다.
“김충선이 신에게 보낸 서찰이옵니다. 김충선은…….”
“누구인지 압니다.”
“예에.”
일독을 마친 문서는 세자에게 넘겼다.
“보아하니 부원수가 작정한 모양입니다.”
첩정을 머리말로 삼고 별첨의 내용을 더 보강한다면 아예 병법서가 하나 만들어질 정도였으니까.
그저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하고 운이나 띄우겠다고 이렇게 정성을 들일 사람은 없다.
정충신도 병조는 물론 중앙의 사정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걸 잘 알기에, 반려될 각오는 하고서, 그럼에도 반려되었다고 후회할 일은 없도록 최선을 다한 것이다.
‘신하가 이렇게까지 진심을 보여주는데 가볍게 넘어갈 수는 없지.’
그리고 정충신의 제안은 제법 매력적이었다.
장창벽을 굳건히 세워두고서 총포의 화력으로 적을 제압하겠다는 건, 지구 반대편 유럽 군대에서도 표준이 된 파이크 앤 샷 전술과 맥락을 같이 했으니까.
다만 이 즈음 파이크 앤 샷 전술은 네덜란드의 장군 마우리츠Maurits van Nassau가 총포의 구성과 화력을 극대화한 선형진을 가지고 나오면서 점차 구식으로 밀려나게 되지만, 기병 중심의 후금군이 전열보병을 들고 나오지는 않을 것이므로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정충신의 제안은 병장기 교체에 들어가는 막대한 예산이 문제일 따름이지, 예산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마다할 구상은 아니었다.
말처럼 쉽지는 않아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