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94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김신국에게 내 결정을 말해주기에 앞서, 먼저 세자의 의향을 물었다.
“부원수의 제안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비록 제안은 합당하나 곧장 실현할 재원을 마련하기 어려우니, 점진적으로 적용해나갔을 것이옵니다.”
왕도적인 답변이었다.
물론, 뻔한 대답이어도 더 사고할 구석은 넘쳐났다.
예를 들자면, 노적의 위험성과 기존에 편성된 예산 항목들의 중요도를 비교하여 어떤 부분을 감액해 얼마나 빠르게 북방군의 무구를 전환해낼 것인지도 고민해 볼 문제니까.
원래 ‘적당히’라는 게 말만 쉽고 실천하기는 가장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파고들지는 않기로 했다.
중요한 건 주어진 상황과 자료로 나름의 최선을 도출해보는 연습이지 정말로 세자에게 그럴듯한 방법을 추궁해내는 게 아니었으니까.
“떠오른 것이 있으니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세자에게서 문서를 받아 건네니, 김신국이 망극한 낯으로 받아들었다.
* * *
요 한동안은 눈에 띄는 일 없이 얌전히 지내왔다.
그도 그럴 게, 가도의 동강진을 분쇄한 뒤 모문룡과 떨거지들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몇몇 사람들이 아주 기겁했으니까.
영의정 이원익이 그랬고, 또 좌의정 박홍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우려한 건 왕의 변화였다.
즉위 초 건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가 차차 망가진 군주는 광해군만 있는 건 아니다.
조선 왕조 희대의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 역시 즉위 초반에는 제법 멀쩡했으며, 고려의 사실상 마지막 왕인 공민왕 역시 재위 절반까지는 퇴락한 나라의 재건과 개혁에 힘썼다.
그러나, 제각기 변곡점을 지나서는 끊임없이 추락하고 몰락했다.
가까운 역사만 돌아보아도 이처럼 삐걱대다가 한순간에 맛이 가버린 사례가 여럿 존재하니, 즉위 초반부터 틈틈이 기행을 일삼은 내게 노신들이 노파심을 발휘하는 것도 기이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왕은 젊고 자신들은 연로하니, 아무리 가는 데 순서 없다지만 어지간해서야 자기들이 먼저 눈을 감을 텐데 그 뒤로 엉뚱한 왕이 어디까지 튈지 누가 알겠는가.
사소한 조짐에도 호들갑 떨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이원익과 박홍구를 위시한 우려가 부상하니 나는 그저 수신修身할 수밖에 없었다.
행동 아닌 말만으로 꺼트릴 수 있는 걱정이 아니니까.
‘다행히 지금은 다들 진정했지.’
잔존 북인계를 향한 사화로 번질 수 있었던 괴서 사건이 잘 수습된 덕이었다.
탐욕과 당쟁에 매몰되어 가짜 옥사를 일으키고자 기군망상까지 한 죄인들을 모조리 도살하지 않은 데 실망감을 드러낸 사람이 적잖았으나, 노신들에게는 아니었다.
과거 노신들이 경험했던 선조는 비슷한 상황에서 일부러 사건을 키워 양당을 돌아가며 찍어 내린다는 선택을 했고, 광해군은 지지세력을 노골적으로 감싸고 지원하여 친위대로 만들었다.
각기 방법은 달랐어도 조정의 균형과 건전함을 해쳐서 왕권을 쉽게 강화하는 편법이라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대신 적당히 관대한 처벌로 마무리해 당쟁이나 옥사로 번질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다.
‘이런 결말이 죄인들에게는 오히려 최악이었겠지만 말이야.’
애초에 연좌제를 묻는 건 처벌이 될 수 없는 죄인들이다.
괴서를 붙이는 건 쉽사리 대역죄로 번질 수 있는지라, 가족이나 가문의 안위를 신경 쓰는 사람이 저지를 만한 짓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인들은 죄상이 밝혀졌을 때부터, 살아남지 못한다면 차라리 신속하고 확실하게 죽기를 바랐을 터인데 그들이 당한 형벌은 외딴섬에 유배하는 절도안치絶島安置였다.
그런데 민가의 숫자가 손에 꼽히는 작은 해도海島에서 과연 시문時文만 익힌 선비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풍월을 얼마나 잘 읊건 간에 그저 식충이에 불과할 따름이고, 졸지에 그 식충이의 숙식을 책임지게 된 보수주인保授主人(민간에서 선정된 감시인)의 마음이란 불 보듯 뻔했다.
그러니 보수주인이 잡일이라도 맡겨 밥값이나마 하게 한다면 양호한 축이었다.
군식구를 떠안은 데 분개하여 죄인에게 분풀이를 일삼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으니까. 심하면 보수주인이 죄인을 집에 아예 들이지 않고 처마 밑이나 마당에서 살게 하기도 했다.
이런 환경을, 과연 저 잘난 맛에 취해 역적질까지 도모한 죄인들이 견딜 수 있을까.
‘말 그대로 죽느니만 못한 신세겠지.’
하지만 당사자들의 심경이야 어떻건, 피는 뿌려지지 않았고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서 옥사라는 글자는 지워졌으며, 늙은이들은 안도했고 북인계 인사들은 철렁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만하면 모범적인 군왕으로서 사태를 잘 수습해 냈지.
그러나 내가 무릎을 꿇은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다.
“인성군仁城君.”
“예에, 전하.”
선조의 일곱 번째 아들.
그러니 위로 형들이 많을 것 같지만, 현 시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선조의 장남 임해군. 광해군 1년 때 사사됐다.
차남 광해군. 인조반정으로 축출되어 유배됐다.
삼남 의안군과 사남 신성군은 젊은 나이에 요절.
오남 정원군. 인조의 아버지. 광해군에게 집을 빼앗기고 막내 능창군은 옥사에 연루되어 자결하자 홧병으로 사망.
육남 순화군. 어려서부터 광패하였으나 선조 말년이 되어서야 사복시정司僕寺正 이수준李壽俊의 집에 안치. 그곳에서 중풍을 얻어 사망.
형들의 명운이 이러했던지라 현 시점에서 선조의 가계로 가장 나이가 많은 종친은 칠남 인성군이다.
종친부에서 최고 어른이라 할 수 있었고, 그가 광해군 때부터 인조대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되기 전까지 갖은 풍파에 시달린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따지자면 아비와 형제들 때문에 팔자가 대단히 꼬인 셈이다.
그러니 참으로 기구하였으나, 종친부에 볼일이 있으니 불쌍한 사람이어도 불러낼 수밖에 없다.
“종실의 분위기는 요즘 어떠합니까? 흥안군이 죄를 지었다가 천벌을 받아 죽은 뒤로 많이 뒤숭숭해지지 않았습니까.”
“성상께서 자애로써 다스리시니 제내제군在內諸君 모두가 평안하옵니다.”
“평안하다니 다행입니다. 마침 제궁諸宮과 제방諸房을 크게 감하려던 참이어서요. 인성군이 도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성군의 입에서는 맥빠지는 바람 소리만 흘러나왔다.
일부 별궁別宮, 그리고 궁가宮家와 누구 대군방大君房이나 공주방公主房이라는 것들은 종친들이 하는 일 없이도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도록 생계와 복지를 담당했다.
이러한 궁방들을 축소함은, 아무리 종친의 부와 권력이 다 왕에게서 나온다지만 가정으로 따지자면 아버지가 자식 쓰라며 떼어준 용돈을 도로 거두어가는 격이다.
그렇게 치자면 자식들 대표로서 장남쯤 될 인성군이 쉬이 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본인 생각이야 둘째 치더라도, 제 대답 따라 용돈을 줄줄이 떼이게 될 동생들의 원망은 어디로 향할까.
“신은 다만 식견 짧은 종실들 사이에서 우애가 손상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우려될 따름이옵니다…….”
목숨에 여분이 있지 않고서야 공공연히 궁방의 삭감을 토로할 종실이 있겠느냐마는, 예로부터 없는 곳에서는 나랏님 욕도 한다고 했다.
대강 눈치를 살파다가 마음 맞는 종실 두엇이 모이면 작게라도 성토하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러다가 걸려서 공론화까지 되는 경우다.
감히 인군을 뒤에서 비방하다가 적발되었으니 엄벌을 피할 수 없는데, 종실은 본디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지하는 집단이다.
괜히 역대 왕들이 종친들을(제 지배권을 위협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대해 온 게 아닌지라, 이들을 숙청하게 된다면 도리어 제 살을 깎아먹는 셈이다.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라 하였는데 자기 집안조차 잘 다스리지 못하는 군주가 과연 나라와 천하는 잘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궁방의 삭감은 피할 수 없습니다.”
북방군을 개혁할 예산이 필요했으니까.
중앙의 허리띠를 더 졸라매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도 한계였다.
반드시 집행되어야 할 다른 예산까지 삭감해서 예산을 만들어버리면 밑돌을 빼어 윗돌을 괴는 격 아닌가.
그러나 어디서든 돈은 만들어내야 하는데, 내 눈에서 가장 비효율적으로 허비되는 예산이 바로 종친들의 품위유지에 들어가는 궁방들이었다.
그리고 궁방을 없애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임란 와중 나라가 거의 망할 지경이 되어 왕권이 외핵을 뚫고 내핵을 탐험하자, 차라리 없느니만도 못한 존재가 된 선조가 가까운 종친들에게 면세지를 살포했다.
그들 중 하나라도 선조를 걷어찰 생각을 하면 당장 왕이 바뀔 테니 재산으로 지지를 매수한 것이다.
그렇게 나누어진 면세지들은 오늘날 난립하기 시작한 궁방전의 모태가 되었으며, 이들 궁방전들은 임란 직후부터 면역과 면세의 특권을 앞세워 무자비하게 확장하다가 백여 년도 더 지난 1695년에야 을해정식乙亥定式으로 제한된다.
과연 국난 상황에서 극소수 특권층의 부와 안락만을 위한 궁방전들을 존속할 이유가 무엇인가?
더욱이 궁방전이 국토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작지 않아서 세금을 내는 농지 대비 5% 규모에 달했다.
다르게 말하면 종친이 국가 생산량의 5%를 잠식한 셈이다.
선조가 흘러내리는 왕권을 주워담고자 조선의 경쟁력과 미래를 팔아넘겼으니, 나는 그것과 정반대로 하려는 거다.
“기타 궁방을 모조리 철폐하고 기존 면세지들은 출세실결出稅實結(세금을 내는 땅)로 전환하는 방법도 있어요. 백관이 모두 쌍수를 들고서 환영할 겁니다.”
관료들은 종친들을 존중하지, 존경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흥안군의 죄상은 죽음으로 흐지부지되었을 뿐 제대로 끝맺어진 게 아니었다.
흥안군 역시 인성군과 마찬가지로 선조의 아들로서 제법 등급이 높은 종친이었고, 또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아니겠나?
시일은 다소 흘렀다지만 조선에는 공소시효라는 개념이 없는지라, 수 년 전의 잘못을 나중에 끌어와 숙청하는 일은 국초부터 흔했지만 반대로 종친이 왕과 중신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도 살아남은 사례는 없었다.
“인성군이 이러한 사정을 종실들에게 잘 알려준다면, 그들도 납득할 겁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서로 힘 뺄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뜻이다.
물론, 감액된 궁방전은 정당한 원 소유주가 갖게 되겠지만, 종친들이 오판하여 출세실결로 전환되더라도 상관없다.
이건 내 배를 불리자고 하는 게 아니라 북방군 개혁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다만 감액을 권하는 건, 이쪽이 조정과 군대에 나의 영향력을 더 투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같더라도 밥이 나오는 호주머니가 나의 것이냐, 중앙의 것이냐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입장도 생각이 다를 테니까.
“대신, 인성군께서 종실들을 설득하는 데 필요한 도움이 있다면 나 역시 전력으로 협조하겠습니다.”
인성군에게는 그저 병 주고 약 주는 꼴에 불과하겠지만…….
명분이나 우위야 어떻건 종친들이 크게 마음 상할 일인 건 맞으니까.
그 상처를 덜 입힐 방법이 있다면 도의상 수고를 감내할 생각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