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95화
-종친 수백 명이 대궐로 나와 계청했다. 【전란 후에 법의 기강이 해이해져 종친이 외방에 산재하고서 멋대로 한가로이 보내며 관부官府에 출입하거나 역마를 함부로 타고 다니며 폐해를 끼치는 일이 많았다. 비로서 금대에 이르러 전하께서 궁방을 감액해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였는데 (종친들은) 반성치 아니하고 도리어 사의私意에 호소하였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김신국은 왕에게 은전을 호소한 일로 제관諸官의 규탄을 각오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폐모의 일로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던 종친들에게서 면세지를 감액시키고 그만큼 조정의 비용을 충당하니, 도리어 망신을 각오하고서 간언해 공을 이룬 참선비로 칭찬받게 된 것이다.
당사자인 김신국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얼굴은 뜨겁고 어안은 벙벙했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영웅담을 청했지만, 김신국은 금상은 물론, 백안시하고 저 씹어먹을 낯을 한 종친들의 눈치가 보였던지라 그저 공의公義 드높인 왕을 칭송했다.
-이 사람이 한 것이 무에 있겠소이까. 전하께서 용단을 내려주심에 망극할 따름이지요, 하하…….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이기도 했다.
김신국이 한 것이라곤 찌그러진 채로 어전으로 나아가 손바닥만 펼쳤을 뿐이니까.
그리고 종친부의 눈치도 아니 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제 공적을 과시하였다간, 이놈이 기어코 죄를 시인했다면서 몽둥이에 침 바르고서 달려들 게 뻔했으니까.
그러나 이러한 태도 때문에 도리어 김신국의 위망은 드높아지고, 전말은 과장되어갔다.
-궁으로 쳐들어가서는 곧장 종친들을 성토했다는데!
-그리고 간언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면 활로 쏘라고 했다더라!
-직접 활을 가져가서는 어전에 바치고서 죽을 각오를 했다면서 기개를 보여주었다던데!
-그것도 세자 앞에서 그랬다더라!
-세자 앞에서 전하를 면박주었다고?!
졸지에 죽고 싶어 안달이 난 인간으로 찍혀버린 김신국이었다.
본인이 아니라며 극구 부인하여도 세간이 그렇다며 못을 박아버리니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해명하는 입은 하나인데 벙긋거리는 호사가들의 입은 족히 수천 개는 될 터이므로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소문이 과장될수록 종친부의 적대감도 심해져, 이제는 행차하는 곳마다 종친부 사람이 분명할 사내들이 일그러진 면상으로 눈총을 보내왔으니까. 그들이 속을 터놓고 말하지 않아도, 건수만 잡힌다면 (물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두들겨버릴 의사라는 건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김신국도 결국에는, 일전의 왕이 노신들의 오해로 그러하였듯 수신할 수밖에 없었다.
-병조판서가 대궐로 나아가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 *
“탄핵 때문에 그렇습니까?”
김신국이 마음에도 없을 사직을 갑자기 청할 이유라곤 그뿐이었다.
조정에 은전을 내리며 출처를 드러내니, 종친들이 궁방전이 감액된 전말을 알고서 김신국을 마구잡으로 공격한 것이다.
“경 덕분에 남발된 궁방을 크게 축소했어요. 그리고 북방군에 필요한 예산도 확보했는데, 사직을 허락하겠습니까?”
그리고 김신국이 있어주어서 망정이지, 종친들이 화풀이할 구석을 놔두지 않으면 불만이 위로 향할 거다.
‘그게 인성군의 조건이기도 했고.’
궁방전이 감액된 직후 인성군은 김신국을 탄핵했다. 종친부의 불만이 엉뚱한 곳으로 향해 왕과 종실들이 자멸하는 일이 없도록 여론을 호도한 것이다.
“당분간 괴롭겠지만, 버텨주세요.”
김신국은 난처한 얼굴로 답했다.
“근신이라도 베풀어주신다면 신이 견디기 한결 수월해질 것이옵니다.”
“하하. 법의 기강은 신상필벌이 확실한 데서 나오는데, 어떻게 죄 지은 것 하나 없이 공만 있는 병조판서를 징계하겠습니까?”
사정이 어떤지 알 만한 사람이 말이야.
“정녕 경께서 징계를 받으셔야겠다면, 내가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경회루 기둥 위에다 세워드리겠습니다.”
“…….”
“그건 원치 않으십니까? 허어, 참. 징계를 골라 받으시겠다는 분은 경 이외에는 없을 거예요.”
한바탕 곯려주니 김신국이 질색했다.
하지만 그도 내게서 면피할 구색을 받아내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보다는, 대외적으로 자신이 몸을 사리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찾아왔겠지.
“느긋하게 쉬다가 가세요. 한참 버티고 있다가 나간 걸로 알려져야, 경의 마음도 조금이나마 놓일 터이니.”
“……망극하옵니다.”
* * *
한양에서 전해진 내막은 정충신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왕은 도랑치고 가재 잡으며, 병조판서는 명성을 얻었고, 자신은 고대하던 바를 실현하게 되었으니 모두에게 잘 된 셈이었다.
다만 병조판서가 종친들에게 심하게 구박을 받게 되었다니, 보답할 길이라곤 북방군을 더욱 조련하고 강화하여서 변방을 튼튼히 지키는 것밖에 없었다.
그것이 북방군을 이끄는 지휘관의 당연한 역할이지만, 동시에 병조판서의 수고를 무위로 돌리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으니까.
그 외에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원수 영감.”
별장別將 김준룡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다소 긴장한 모습.
“무슨 일인가?”
“난자도蘭子島에 호병들이 침입했습니다.”
난자도는 의주부 맞은편, 압록강의 중하류의 퇴적섬이었다.
본디 바로 옆의 위화도威化島와 함께 조선이 개국이래 영토로 여기고 관리해 왔으나 현재 (원칙적으로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이는 새삼스럽게 선조 말 국경분쟁이 발생한 것이 원인으로, 이에 선조와 조정은 ‘땅은 잃어버릴 수 있어도 상국과 다툴 수는 없다’는 이유로 섬의 경작을 금지시키고 이를 명나라에 보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두 해 뒤 의주부윤에 부임한 구의강具義剛이 맞은편 명나라 땅을 다스리는 유격에게 요청하여 난자도가 조선의 경계라는 비석을 세우게 되었으나, 조정에서는 분쟁이 재점화되는 것을 꺼려 따로 조치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게 오늘날까지였다.
“침입한 호병의 수는 얼마나 되던가?”
“일백 안팎으로 보입니다.”
“길을 잘못 들 만한 숫자는 아니로군.”
하물며 강 한가운데 놓인 섬이다.
강이 얼지 않은 한 배를 타야만 하는데, 호인 몇 명도 아니라 병사만 일백이다?
“놈들이 본격적으로 긁어대는구나.”
강 너머에서 심상치 않은 소식이 들려온지도 꽤 되었다.
사대패륵 중 하나인 아민이 조선 땅에서 죄를 짓고 도망친 전 목사 이신을 거느린다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그 의도가 이신을 길잡이 삼아 내려오기 위함이라는 것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며, 이를 증명하듯 밤이 되면 의주 맞은편에서 무수한 불빛이 돌아다니고는 했다.
그러다가 후금의 병사들이 아예 조선의 섬으로 쳐들어왔으니, 저들이 침입의 이유야 어떻게 대건 본질은 도발의 수위가 높아졌다는 것이었다.
“접촉했나?”
“관망중입니다.”
그렇겠지.
난지도에 주둔한 병사가 있었다면 대치라도 했겠지만, 선조 말엽의 일로 섬은 비워졌다.
그 탓에 법을 피해 도망한 자나 밀무역하는 공상工商 따위는 더러 있을 법하였으나 그들에게 조선과 후금의 다툼이야 남일에 지나지 않을 터.
“쫓아갈 터이니, 먼저 가서 퇴거를 요청하게.”
“순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체포한다고 해야지.”
“……영감, 감히 말씀드리건대 오랑캐들이 권유만 받아서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을 듯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네만, 가벼이 충돌을 일으켜서는 안 되네. 그것이야말로 저들이 바라는 바이니까. 별장께서는 오랑캐놈들의 뜻대로 움직여줄 생각인가?”
김준룡은 침음을 흘렸고, 이에 정충신이 가벼워진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내가 쫓아간다는 거야. 놈들을 물리지는 못하더라도 어디 튀지만 않게 붙잡아두기만 해도 충분하네.”
“알겠습니다.”
김준룡은 대답과 함께 꾸벅,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
오랑캐들의 처단이야 어찌 자신이라고 바라지 않겠는가?
하물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갈수록 기고만장해지니, 명령만 떨어진다면 당장에 칼을 빼들고 노추의 목을 취하러 뛰쳐나가리라.
그러나 적들이 갈수록 방자해지는 데는 그만한 연유가 있고, 강적은 기세만으로는 물리치지 못한다.
다만 와신상담할 따름이다.
오늘날 조선이 마주한 오랑캐는 임진년 왜구들을 물리친 명나라마저 감당하지 못했다. 성급했다간 도리어 낭패만 보기 쉽다. 전하께서도 노추의 목을 떨어뜨리기 위해 거병이 아닌 고취의 금지를 명하시지 않았던가.
‘하지만 도발이 갈수록 강해지는 건 골치로군.’
싸우자고 벌이는 짓이라 계속 참아준다면 종내에는 싸움이나 다름없이 될 것이다. 맺고 끊음이 확실해야 했다.
그렇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다면 상처만 더 입고서 부하와 백성들에게는 원망만 당할 테니까.
* * *
“이곳은 조선의 영토다.”
난지도에 도착한 정충신이 통사를 빌려 말했다.
“그대들은 이미 조선의 영토를 침입한 지 오래되었으니, 즉각 퇴거하라. 불응한다면 체포하겠다.”
별장이 이미 했던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난지도에 버티고 있던 호병들이라, 정충신의 경고에도 코웃음만 치고 말았다.
그 광경에 조선의 군관 여럿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명령만 떨어진다면, 호병들의 목을 잘라내어 식은 몸뚱이라도 체포할 기세였다.
선두의 호병이 말했다.
“양해를 구하려고 했는데 섬을 지키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오. 그러니 그대들의 땅이 맞는지 긴가민가하지만…….”
호병은 실소와 함께 덧붙였다.
“탈영병이 여기로 도망쳤다는 보고가 있었소. 놈을 잡아내면 지체 없이 물러나지.”
말은 번지르르하였으나 그동안 탈영병은 찾지 않고 대응하러 나온 조선군과 대처하고 있었으니 진위는 굳이 의심해 볼 필요도 없었다.
정충신은 단호하게 말했다.
“반 시진의 시간만 더 주겠소.”
“탈영병을 찾으면, 알아서 물러난다지 않았소?”
정충신은 답하지 않았다. 어디, 그게 가능할지 시험해보겠냐는 투였다.
호병은 입꼬리를 말고는 무어라 외치면서 손을 저었다.
마치 공격을 명하는 듯하여 조선군은 반쯤 무기를 빼 들고서 긴장하였으나,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호병들은 어수선거리며 흩어질 따름이었다.
정말로 탈주병을 잡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러나 제대로 뒤져보는 자는 하나도 없고, 죄 주변만 어슬렁거리며 잡목을 걷어차거나 건성으로 나무기둥 너머를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정충신이 말한 반 시진의 시간은 차츰 닳아갔다.
“영감.”
기울어져가는 그림자를 의식하던 별장 김준룡이 조용히 속삭였다.
정충신 앞에서 보고할 때부터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던 김준룡이다.
그런데 부원수가 친히 거동하여 이름에도 오랑캐 조무래기들은 방자한 언행을 일삼으니, 적과 싸우는 것보다 자신과 싸우는 게 더 힘든 지경이었다.
그러니 이즈음이면 반 시진이 지나겠다 싶던 참에 정충신을 부른 것이었고, 정충신은 그런 수하의 다급함을 뒤로하고서 말했다.
“반 시진이 다 되었소.”
“음?”
이에 호병이 엉뚱한 얼굴을 하고서 되물었다.
“나는 분명 탈영병을 잡은 뒤에 물러나겠다 하였소만?”
“나는 반 시진만 더 주겠다고 했소. 이건 마지막 경고요. 물러나지 않겠다면 체포하겠소.”
“하! 어디…….”
호병이 파안대소를 터뜨리던 순간이었다.
정충신이 와락 달려들어서 호병의 팔을 꺾고 허리를 틀어버리니, 눈 깜짝한 사이에 벌어진 일에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던 다른 호병들은 나서지도 못하고서 눈만 동그랗게 된 채 굳었다.
“…….”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정충신은 제압한 호병의 관절을 흔들었고, 한계까지 꺾여있던 호병은 곧장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멈춰! 멈춰!”
“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따위 짓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어련히 죽여줄 것인데, 굳이 서두를 필요가 있느냐?”
“끄어어어……!”
“병사들을 물려라. 아니면 병신으로 만들어주마.”
“……꺼어!”
정충신이 인체의 한계를 시험시켜주고서 살짝 풀어주니, 제압된 호병은 그새 갈라진 목소리로 무어라 외쳤다.
조선군이 다 긴장하고서 저마다 무기를 부여잡은 가운데, 호병들은 질색한 얼굴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렇게 거리가 벌어지자 정충신은 제압했던 호병을 내던졌다.
“커흑!”
볼썽사납게 쓰러진 호병은 발끝으로 땅을 밀치며 조금 물러나서는, 숨을 몰아쉬면서 외쳤다.
“이 수모는 반드시 갚아주마!”
정충신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호병이 퉤, 가래 한 방 뱉고는 부축을 받으며 물러나는 모습을 사납게 주시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