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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96화 (96/380)

인조, 명군이 되다 96화

“저 벌레 같은 놈들이 눈치 보면서 도망치는 꼴을 보니, 속이 참으로 시원합니다!”

별장 김준룡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건 현장의 다른 군관들도 마찬가지여서, 반 시진을 넘게 꼬박 대치한다고 진이 빠졌던 사람들이 그새 기운을 차리고서 화기애애했다.

그러한 부산함도 차차 가라앉아서 진정되자 정충신이 말했다.

“놈들이 죽다가 싸울 각오까지는 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만약 작정하였다면 반드시 싸움이 벌어졌을 것이다.”

여러 군관이 침을 삼켰다.

“더욱이 저들이 크게 망신을 당하고서 돌아갔으니 당장 다음에 싸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

“절대로 방심하지 마라.”

군관들이 일제히 예, 하고서 답했다.

* * *

임시 부원수부로 귀환한 정충신은 고생한 군관 및 병졸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렸다.

분명 포상을 받은 병사들은 저들끼리 모여 찬을 안주삼아 주거니 받거니 난지도에서의 일을 허황되게 과장하리라.

평소라면 헛소문이 퍼지는 일 따위 엄금하였겠으나, 국경 상황이 칼끝에 선 듯 매우 위태로웠으므로 정충신은 사기 진작을 위해서 눈을 감아주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병사와 읍민들에게 기댈 구석을 만들어주어야 유사시에도 통제하기 쉽다.

“영감.”

부원수부에 달리 영감으로 불릴 사람도 없는지라, 정충신은 호명에 눈을 떴다.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별장 김준룡이었다.

“어인 일이신가? 더 쉬지 않으시고.”

“품의드리고 싶은 바 있어 왔습니다.”

정충신은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김준룡은 사양하지 않고 방석을 끌어 앉았다.

“말씀하시게.”

“난자도가 명나라와의 국경이라 하여 사람을 소개하고 포황抛荒한 지 스무 해가 넘었는데, 실상난자도는 오래전부터 아조가 다스려온 땅이고 예전 의주부윤 역시 유격에게 청하여 다시금 이를 공인받았으니, 지금처럼 빈섬으로 내버려 두는 건 옳지 않은 듯합니다.”

“거기에 목책이라도 세우자는 말인가?”

“그러합니다. 비록 경작하지는 않더라도 목책과 돈대를 세워 방비를 강화한다면 오랑캐도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침 소 홍이포도 있겠다, 돈대에 세워두고서 다가오는 배를 족족 쏴버린다면 오랑캐는 강을 건너지도 못하리라.

그런 상상이 정충신도 일순 들었다.

“내게는 권한이 없으니 도원수께 전달해 보겠네.”

은근한 반대였다. 살수조의 무기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적극적으로 중앙을 설득했으니까.

“영감께서는 동하지 않으십니까?”

“국경의 분위기가 지금같지 않았다면 별장의 의견에 동의했을 걸세.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적들이 보는 앞에 방어시설을 세운다면 어떻게 되겠나?”

아민이 조선을 치고자 한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다.

그런 아민이 당장 조선을 공격하지 않는 건 그가 주저하기 때문이 아니라 개전의 명분이 필요해서였다.

본인이 한은 아니니, 아무리 그 다음가는 사대패륵일지라도 함부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으니까.

그게 계속 도발을 걸어오는 이유다.

“별장의 제안을 따른다면 아민은 함박웃음을 짓겠지. 조선이 저들과 명백히 대적할 의도라고, 더욱 탄탄한 수비를 갖추기 전에 미리 공략해야 한다고 외칠 수 있게 되니까.”

그리고 그 같은 아민의 주장에 실리는 힘은 조정의 주전론자들이 떠벌이는 이중적인 외침과는 실리는 힘부터가 다르다.

후자는 누군가가 ‘꼬우면 너 혼자 가서 싸우던가’ 하고 빈정대었을 때 유구무언이 되겠지만, 아민이라면 ‘기꺼이!’라고 답할 테니까.

“그래도 내가 별장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게 이상한가?”

“……아닙니다.”

“자네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아. 하지만 노적의 대비라면, 넘치지는 못하더라도 부족하지는 않게 하고 있네.”

은전을 받아 무기교체의 예산을 확보한 게 바로 최근의 일이다.

그 공효를 보기도 전에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도 너무 성급한 행동 아니겠는가.

“……영감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소관이 드린 말은 없던 것으로 해주십시오.”

“그러지.”

김준룡이 풀이 죽어서 고개를 떨어뜨렸고, 정충신은 마치 외면하듯이 고개를 돌렸다.

바깥으로 통하는 창호는 어둠을 머금고 검게 물들어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

“……예에. 소관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아닐세. 원래 이쯤되면 별장을 부르려고 했거든.”

김준룡이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자네와 이 사람이 난지도를 다녀오는 사이, 선지(김충선) 대감께서 완성된 장창들을 보내셨더군. 일개 사司를 능히 무장할 수 있는 수량이었네.”

“……그렇게나 많이 말입니까?”

사司는 군사 편제의 단위로, 120명 전후로 이루어진 초哨가 다섯 개 모여 이루어졌다.

대략 600명 안팎이 되는 셈.

김준룡이 여전히 놀란 얼굴로 물었다.

“고작 며칠 사이에 그만한 수량의 장창을 만들 수 있습니까?”

“대감께는 편지로 감사를 겸해 사정을 물어본 참이네만, 이 사람이 짐작하는 바로는 대감께서 먼저 장인들에게 삯을 주고서 미리 만들고 있던 게 아닌가 싶네.”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는 중앙의 대답이 회의적이리라 예상하는 사람이 많았다.

국경이 혼란스럽다는 건 중앙에서도 알겠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건 아니었고, 또 가도 정벌 때 괄목할 성과를 낸 만큼 무기 교체에 절박하지도 않을 테니까.

“전하께서 은전을 베푸셔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대감께서는 사비만 쓴 셈 아닙니까?”

“처음부터 그럴 각오가 아니셨겠는가.”

재상인 정이품에 올라서도 모두가 마다하는 북방 근무에 십여 년이나 자원한 김충선이다.

그런 그라면 북방군에 반드시 필요한 무기를 사비로 지원해주는 건 고민까지 필요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그렇다면 선지 대감께서는 진정으로 참선비겠습니다.”

“출신이 선비의 자격을 부여하는 건 아니지.”

비록 태생은 미천하였으나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정식으로 무과에 급제한 정충신이었기에 확언할 수 있었다.

오랑캐들의 땅인 열도에서 태어난 게 대수랴?

조선 태생인 어지간한 사람보다도 충성심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한 김충선이다. 김준룡의 말처럼 그렇다면, 하고 전제할 필요도 없이 김충선은 이미 참선비였다.

“본래 사를 이끄는 건 파총把摠의 역할이지만, 살수들이 새로 다루어야 할 장창은 지곤의 것과 생김새는 물론 용법도 크게 다르네.”

양식은 왜창에 가깝지만 동일하지는 않았으며 사용법은 완전히 달랐다.

그런데 기존의 무기들처럼 교범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구상으로만 어렴풋이 그려지는 운용법을 구체적으로 정립해야 하는지라 사실상 신무기나 마찬가지였다.

“장차 모든 살수들이 익혀야 하는데 그대로 파총에게 맡길 만한 일은 아니지. 마침 별장이 열의를 가지고서 적을 경계하는 마음을 보여주었으니, 믿고 맡길 수 있겠군.”

김준룡은 감격한 얼굴로 답했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 * *

신형 장창을 다루게 된 김준룡은 이것이야말로 진짜 적을 막을 목책이고 돈대임을 깨달았다.

중무장한 살수들이 단단하게 땅을 딛고서 두어 장에 달하는 장창을 치켜세우니, 그 광경을 정면에서 보면 도저히 파고들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금성탕지가 마치 이러할까.

일말의 과장 없는 표현이었다. 금성탕지金城湯池란 쇠로 된 성과 끓는 못(해자)이라는 뜻인데, 장창방진은 실로 쇠로 된 성이었으며 그 앞에서 적은 녹아내릴 테니까.

“단점은 진형을 갖춘 상태에서는 기동이 거의 불가능하고, 병사들의 밀집도가 높아 대포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김준룡이 보고했다.

“상관없네. 장창방진의 의의는 적의 철기들이 대오를 무너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데, 기동하는 상황에서는 기병들의 난입에 더욱 취약해지니 문제될 건 없지.”

오히려 장점으로 봐도 무방했다.

적의 철기가 정면에서 달려드는 모습이란 얼마나 위협적일까?

훈련과 경험이 부족한 병사라면 곧바로 무기를 내던지고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진형을 갖춘 상태에서는 움직이지 못하니 설령 도망치고자 하더라도 쉽지 않다. 차라리 그대로 창대에 의지해 버티고 서는 편이 더 안정감을 줄 거다.

“그리고 적의 대포는, 훨씬 뛰어난 우리 쪽 대포가 먼저 상대하면 되네.”

소 홍이포의 사거리와 명중률은 놀라운 수준이다.

아무리 후금군이 명군을 거듭 격파하고 요동까지 차지하면서 화약 전력을 갖추었다지만, 저들의 구형 화포들이 소 홍이포에 비하겠는가.

정충신은 감탄한 얼굴로 별장을 바라보았다.

“훈련한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 정도로 숙련된 모습을 보여주니 놀랍군. 고생 많이 하셨네.”

“……아니옵니다! 부원수께서 먼저 병사들을 정예하게 조련해 두셨으니, 소관이 한 일이라 병사들에게 다른 무기를 들려준 것뿐이지 어찌 고생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것치곤 정성을 많이 들이셨는데?”

정충신은 병학지북兵學指北이라 쓰인 책을 들어보았다.

다분히 기존의 병법서인 병학지남을 의식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제법 구색은 그럴싸하였는데, ‘병학지남兵學指南’이 남병南兵을 조련한 병학兵學(병법)을 정리한 병법서라면 병학지북은 북병北兵(북방군)을 조련한 병학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장창으로 무장한 살수조에 대한 내용뿐이지만, 사수조와 포수조까지 포함시킨다면 제대로 된 병법서가 만들어질 걸세.”

“이미 병학지남이 있는데 소관이 방자하게 만용을 부린 건 아닐지 송구스러울 따름이옵니다.”

“새로운 병법서를 만드는 건 꽤 필요한 일이야. 이미 북방군의 교리가 병학지남의 것과는 크게 동떨어졌으니까.”

척계광이 남병을 조련한 방식은 난잡하게 단병전을 걸어대는 왜구에 최적화된 데 반해, 북방군의 주적은 압도적인 기마전력을 위시한 후금군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교리가 달라졌으면 교범도 달라져야지. 계속 고생해 주시게.”

정충신은 김준룡에게 병학지북을 건네주었다.

“망극하옵니다.”

정충신은 빙긋 웃었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거창한 이름에 비해서 내용이 여러모로 어설프기는 했다. 현실성과 크게 동떨어지는 부분이 많은 건 그만큼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경험이야 머지않아서 질리도록 하게 될 테고, 그때까지 부족한 부분은 자신이 메워주면 될 일이었다.

완성도에 목을 매지 않는 건 교리가 매 순간마다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랑캐라고 다 바보 멍청이들만 있는 건 아닌지라, 장창방진에 몇 번 깨지다 보면 놈들의 방식도 달라지지 않겠는가?

그리되면 응당 이쪽의 방식도 달라져야 하는 법이라 실전에 들어가면 지금의 교리도 금세 구식이 된다. 병서의 의의는 더 나아가기 전에 기반을 철저하게 다지는 데 있지, 순간의 교리를 세세하게 박제하는 것이 아니었다.

“장창의 건은 이 사람이 예상했던 대로였네. 대감께서는 북방군에 장창이 반드시 필요해보이셨다는군.”

“아…….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동감일세. 그리고 조만간 사司 하나를 더 장창으로 무장시킬 수 있을 거야. 사 두 개를 별장이 다 직접 관리하기는 벅찰 테니 파총을 추천해 주시게.”

“알겠습니다.”

김준룡은 부원수의 신뢰와 일임이 이처럼 후하니 중군中軍의 자리가 멀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막상 중군이 될 생각을 하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고작 한 자급 오른 채 도원수의 곁에서 일하게 될 바에야, 별장으로 남더라도 부원수 곁에서 일하는 편이 성취도 보람도 훨씬 많을 테니까.

그러나 어느 쪽이라도 아직까지는 이른 선택이었다.

정충신은 김준룡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돌아갔고, 김준룡은 그간 진형을 유지하느라 녹초가 된 병사들에게 외쳤다.

“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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