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조, 명군이 되다-97화 (97/380)

인조, 명군이 되다 97화

김준룡 별장은 호랑이처럼 달려가 병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체중 실은 날라차기에 병졸은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졌고, 김준룡은 그런 병졸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이 달려드는 것조차 견뎌내지 못하면 기병은 어떻게 막아낸단 말이냐?!”

이어서 김준룡 별장은 다른 병졸들에게도 달려들어 일일이 걷어찼다.

대개는 견디지 못하고 나뒹굴었으나 일부는 휘청거리거나 쓰러질지언정 두 다리는 땅에 붙은 그대로였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누군가 이 같은 모습을 본다면 단체 기합이라도 주는 줄 알겠으나, 아니었다.

살수조가 아무리 사수와 포수의 원호를 받더라도 적의 유격에는 취약했다.

만약 적기들이 달려들기를 포기하고 멀리서 화살만 날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북방군은 사수와 포수 전력도 막강하니 적이 유격을 펼쳐도 녹아내리기는 매한가지겠으나, 그동안 살수조는 맞고만 있어야 한다.

이미 지적된 문제였으며, 이는 살수들이 두정갑을 한 벌 더 껴입음으로써 해결하기로 했다.

모든 살수가 두 벌씩 입을 정도로 갑주 수량이 넉넉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아니었다.

투사체가 날아오는 방향은 보통 대오의 정면이므로 꼭 모든 살수가 갑주를 껴입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이에 따라 살수조에서도 갑주를 더 껴입고 전열에 설 정예병을 선발할 필요가 생겼다.

기준을 세우는 건 쉬웠다.

이들의 역할은 적의 사격만 아니라, 적 기병의 돌격 역시 가장 먼저 받아내는 것.

충분한 담력과 완력에 검증되어야 했는데 그렇다고 실제 말과 맞붙일 수는 없으니, 대신 지휘관이 달려들어 걷어차는 것이다.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합격.

그러나 말이 좋아서 합격이지, 합격하면 북방군에게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게 된다.

한 약삭빠른 병사는 훈련을 빙자한 이 시험이 전열에 설 인원을 차출하기 위함을 깨닫고, 일부러 탈락했다.

그러나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연기였고 별장 김준룡은 얼굴이 대추처럼 붉어져서 외쳤다.

“새끼……, 원 위치!”

그리고 병졸들에게 일러 병사를 좌우로 붙들어놓은 뒤, 체중에 감정까지 실어 날라차고는 두 발이 붙어 있다며 강제로 합격시켰다.

* * *

“믿고 맡겼더니 망신만 당하고 돌아왔군.”

아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맞은편에는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난지도를 침입한 장본인이 있었다.

계급은 장경章京. 후금군에서 75인을 이끄는 소부대의 지휘관으로, 하늘 같은 패륵의 총애를 입는다면 금세 몇 단계는 출세할 위치였다.

장경은 그러한 야망을 꿈꿨다.

자신이 속한 정람기正藍旗의 주인이자 사대패륵의 일원인 아민의 눈에만 든다면, 더는 지금의 직급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과업을 맡았을 때는 반드시 출세의 단초로 삼겠노라 결심했다.

비록 목숨마저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임무였지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또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기회였다. 패륵의 제안을 거절했다간 어떤 보복이 있을지 두려웠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실패자가 되어 아민의 앞에서 대죄하게 된 장경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과욕을 부릴 게 아니라 제 재주에 걸맞은 지금의 자리에 안주해야 했었다.

하지만 후회란 항상 늦는 법.

장경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서 처분만을 기다릴 따름이었다.

“네놈이 망신당하는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나의 명령을 수행하던 중에 망신을 당한다면, 나 또한 망신당하는 것임을 몰랐더냐?”

“주, 죽여주십시오…….”

장경이 떨면서 고했다.

“요청하지 않아도 응당 그리 될 것이다.”

아민은 인상을 찌푸린 째 바깥쪽으로 손을 튕겼다.

그러자 아민 좌우로 중무장한 전사들이 사색이 된 장경을 좌우로 붙들었고, 그대로 바깥으로 향했다.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장경이 뒤늦게 애걸했으나 아민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으로 향한 뒤였다.

‘어떻게든 싸움을 일으켜야 한다…….’

아민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사대패륵이라는, 한 다음의 위치는 객관적으로 보아 절대로 낮지 않다.

하지만 아민 자신이 사대패륵에 들어간 건 혈통이나 능력보다도 균형추의 역할이 더 강했다. 애석하지만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한 누르하치가 아닌, 그의 동생 슈르하치의 자식이니까.

하물며 슈르하치는 누르하치와의 분쟁 끝에 수감되었다가 죽었다.

그 후손인 아민으로서는 사대패륵의 일원임에도 여타 패륵들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서로 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과연 누르하치는 제 자식과 가둬죽인 동생의 자식 중 누구의 편을 들어줄 것인가?

그러니 공식적인 서열은 대패륵 다이샨의 바로 다음이라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한 셈이다.

아민 스스로도 자신의 서열에 어색함이 느껴질 정도인데 다른 패륵들이라면 얼마나 이상하게 여기고 있을까?

그러나, 누르하치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을 이 자리에 올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에 혈통은 당연히 아니고, 능력 역시 아주 객관적으로 보자면 가능성이 낮으니 유일하게 남은 것이 바로 균형추의 역할이었다.

현재 후금의 주인은 누르하치이나, 그가 확고부동한 주인은 아니었다.

제 자식들이 머리가 굵어질대로 굵어져서는 누르하치를 모셔야 할 주인이자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이 다음 대 후금의 주인이 되어야 할 명분쯤으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누르하치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한 자식이 압도적인 권력을 그러모으고서 형제들을 복속한다면, 그 다음에는 자신의 등을 찌를 게 분명했으니까.

수 년 전 누르하치가 자신이 사망한 후 후금의 운영을 패륵들의 합의제로 규정한 것만 보아도, 이를 다분히 의식했음을 알 수 있다.

권력이 잠재적인 후계자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걸 막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자식들이 서로 치고받으며, 자신을 찌르는 대신 총애를 갈구하게 될 테니까.

거기서 아민 자신의 역할이 균형추인 것이다.

패륵들 사이에서 두 번째의 서열을 가지고 있지만, 절대로 후금의 차기 주인은 될 수 없는 자.

이리 치받고 저리 치받는 누르하치의 자식들 사이에서 허울뿐인 서열로 완충 역할이나 하라는 거다.

아민이 조선을 노리는 건 이 때문이었다.

요동에서는 허울뿐인 서열만 가진 채로 절대 군림할 수 없지만, 조선을 정복하여 독립한다면 달라지니까.

단순히 야망 때문만이 아니다.

이것은 자구책이기도 했다.

지금 당장이야 누르하치의 안배로 허울뿐인 서열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의 자식들 중에서는 아민 자신의 위치에 의문은 물론 나아가 불만까지 가진 자들도 많았다.

만약 그둘 중 하나가 차기 후금의 주인이 되었을 때 자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자격 없이 공연히 드높은 지위를 차지한 인물로 여기고 숙청하려 들 게 뻔했다.

그리고 높이 올라섰을수록 추락은 치명적인 법이다. 숙청되면서 곱게 죽는다면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리라.

그런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민은 독립이 절실했다.

타개책은 오직 하나뿐.

조선과 전쟁을 일으켜 양남기를 이끌고 남하하는 것.

‘제대로 싸울 명분이 필요해…….’

아민은 착 가라앉은 눈을 하고서 고뇌에 빠져들었다.

* * *

아민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누르하치의 7남으로, 공적도 재주도 뚜렷하지 않아 아직 패륵으로 인정받지 못한 자.

그래서 자신을 제치고 진즉 사대패륵에 봉해진 세 살 터울의 손아랫동생을 노골적으로 질투하는 자.

아파태였다.

“형님.”

“무슨 일이냐.”

무뚝뚝한 인사와 추궁에 가까운 질문이 오갔다.

아민은 죄인의 혈통임에도 서열 2위의 패륵이다.

아파태는 누르하치의 혈통임에도 패륵 말석에조차 끼지 못했다.

두 사람은 혈통과 지위라는 각자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상대방을 시샘했다.

실상 두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건 각자가 가진 혈통과 지위의 공허함임에도 말이다.

그러니 각자 마음을 터놓고서 고충을 교환한다면 서로에게 큰 위안이 되겠지만, 물론 두 사람이 그럴 일은 없었다.

아파태가 말했다.

“난지도에서의 일이 잘 안 된 모양입니다.”

아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이제 막 내 심기를 거스른 놈을 없애버린 참이다. 그런데 네가 그새 어찌 알고서 나를 찾아왔구나?”

“아민 형님의 일인데 당연히 일거수일투족 관심이 가지요.”

“네가 나를 존경할 줄은 몰랐는데.”

“과찬이십니다.”

아파태는 진심으로 과찬이라 여기는 듯 공손하게 허리숙였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그러했고, 실제로는 아민이 저도 모르게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냐는 추궁에 잘도 알아채지 못했다며 빈정댄 것이었다.

그러나 아파태가 아민의 처소를 방문한 이유는 고작 시비나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던 만큼, 그는 연이어서 본론을 꺼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좋은 생각은, 내 심기가 더 뒤틀리기 전에 당장 달아나는 것이다.”

“설령 제가 조선과 전쟁을 일으킬 방법이 있다고 해도요?”

아민은 곧장 답하지 못했다.

아파태가 무언가 수상한 의도를 가지고서 방문했으리라는 건 짐작했지만, 이런 발언은 예상치 못했으니까.

아민이 조선을 노린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최근에는 조선땅에서 도망쳐 온 죄인도 길잡이로 삼고자 거두지 않았던가?

그러니 아파태의 발언이 의외였던 건 새삼스럽게 자신의 야망이 거론되어서가 아니라, 아파태가 자신에게 협조할 이유가 없는 탓이었다.

‘하지만 물어본다고 곧이곧대로 답하지는 않겠지.’

그저, 딴에도 대가리를 굴려 음험한 계획을 세워두었겠거니 치부할 따름이다.

하지만 아민은 개의치 않았다.

조선을 정복하고 그 땅에 자신만의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면, 누르하치와 그의 자식들과는 모조리 적이 될 테니까.

그런 상황에서는 아파태가 제 알량한 두뇌를 얼마나 혹사시켰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내심 계산을 마친 아민이 말했다.

“내가 원하는 전쟁은 단순히 금 전체와 조선 간의 전쟁이 아니야.”

누르하치와 그 뒤를 이을 후계자에게 땅 한 점 더 물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조선을 상대하는 건 나 혼자로 족하다.”

강 너머로 무작정 싸움을 걸지 못하고 세심하게 도발 수위를 조정하는 건 이 때문이다.

싸움은 반드시 벌어져야 하지만, 너무 커져서도 안 된다.

딱 자신이 지휘하는 정람기만 나설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야, 죽 쒀서 개 주는 일 없이 자신의 부하들만 모아 강 너머로 내달릴 수 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만약 쉬운 일이었다면, 한참 골머리 썩이다가 같잖은 사촌이 걸어오는 수작질에 어울려주고 있지도 않았겠지.

“네가 진정으로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 가졌다면, 내 흉중의 고민이 가볍지 않다는 것도 알 거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아파태가 당당하게 말했다.

막 자신이 처한 상황이 녹록치 않음을 드러낸 아민이었기에, 사촌 동생의 과도한 자신감은 도리어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어디, 들어나 보자.”

별 시답지 않은 발상으로 자신을 모욕한 것이라면, 사지 하나쯤은 부러뜨리고 돌려보내겠지만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