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98화
경운궁 즉조당에서는 때 아닌 윤대가 이뤄졌다.
보통 윤대란 특정 품급 이상의 관리들이 왕을 알현하고 함께 정무를 논의함을 의미하나, 이번 윤대는 평소와 달랐다.
무려 삼의정이 함께 배석했으니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논제는 아파태가 보낸 서신이었다.
그는 의주부 난지도에서 벌어진 충돌을 알고 있다며, 아민의 야욕이 충동적으로 발현되기 전에 먼저 수를 써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 수란, 후금으로 도망쳤던 전 정주목사 이신을 압록강변으로 끌어낼 테니 체포하라는 것이었다.
이신을 조선에서 어떻게 처분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일단 후금 땅에서 사라져주기만 하면, 아파태는 소문을 퍼뜨린다. 이신의 실종에는 조선이 배후로 있다고.
아민으로선 두 팔 들어 환호할 상황이다.
소문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없고, 어쩌면 이신이 술에 취한 채 강으로 나갔다가 빠져 죽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민은 그런 소소한 것들은 돌아보지 않으리라.
종복의 맹세를 한 이신의 실종과 때마침 퍼진 소문은 아민이 절실히 바랐던 침공의 명분이니까.
명분이 엉성하고 불투명한 건 상관없었다.
오히려 아민을 기쁘게 만들어주는 게 그런 부분이었다. 누르하치나 다른 패륵들이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신이 후금과 누르하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면 모를까, 아민의 배신陪臣에 불과하므로 후금 전체가 나설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 여타 패륵들에게는 더더욱 남의 일일 수밖에 없다.
아민 한 사람의 위신만이 걸린 일이기에 혼자서 조선과 부딪칠 당위가 된다. 필요한 건 이를 실현할 약간의 독단뿐.
조선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아파태의 지적처럼 아민은 확고부동한 조선 침공 야욕을 보유했으며, 인내심이 바닥나거나 그가 도발 수위 조절에 실패한다면 불시에 후금 전체와 맞붙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적절한 환경이 조성되어 오직 아민과 정람기만으로 적을 제한할 수 있다면 부담은 훨씬 줄어든다.
그렇게 미리 정람기를 거꾸러뜨려 둔다면 후금과의 일전에 앞서 적의 전력을 크게 축소하는 셈이다.
정람기는 팔기의 일축이니, 단순하게 계산해도 후금 전력의 팔분지 일이 사라지는 셈이니까.
나아가 팔기군이 후금에서 차지하는 군사적인 비중 못지 않은 사회, 정치적 비중까지 고려한다면 총체적인 성과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민이 교전 중 눈 먼 화살이라도 맞고 죽어버린다면 아주 곤란한 전개가 펼쳐지겠지만, 일부러 노려도 죽이기 쉽지 않은 게 지휘관이고, 조선은 후금을 불구대천不俱戴天으로 여기니 어차피 한 번은 붙어야 한다.
계획이 성공하여서 얻을 장 단기적인 이익과 비교하면 충분히 감수할만한 위험이었다.
‘그러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만.’
아민과 조선 모두 쌍수를 들고서 환영할 일이니까.
그런데도 섵불리 응하지 않는 건 아파태의 본업이 분쟁조정위원이나 행복전도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아민을 차도살인하고 패륵의 공석을 차지하기 위함이라지만, 또 어떤 복심을 가지고 있을지는 본인만이 알겠지.’
그리고 아파태의 제안이 겉모습만큼이나 달고 이로운 천당의 복숭아일지, 혹은 그저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할지 또한 누가 알겠는가?
이건 그럴싸한 계획을 직접 만들어 내놓은 아파태 본인도 모를 일이다.
놈이 누구 좋으랍시고 귀한 천당 복숭아를 내놓겠느냐만 계획이란 틀어지게 마련인지라 항상 결과와 일치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물며 서로 동떨어진 채 이해관계마저 다른 세 세력이 엉킨 상황에서야…….
그러니 아파태의 의도야 어떻건 대응만 적절하다면, 놈이 개살구를 내놓아도 천당의 복숭아로 취할 수 있다.
이것이 삼의정이 집결한 이유다.
의정대신이라면 간계나 음모 따위 질리도록 경험해보지 않았겠는가?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보면 더 비쳐보이는 게 있을 터였다.
좌의정 박홍구가 아뢨다.
“오랑캐의 수작입니다. 믿을 수 없으니 응하지 마시옵소서.”
이에 우의정 조정이 반박했다.
“아파태가 조선만 이로울 일을 도모하지는 않았겠으나, 이는 분명 귀중한 기회이옵니다.”
“어찌 저들의 속셈을 알고도 어울려주자는 거요?”
“중요한 건 저들의 속셈이 아니라 나라가 거둘 실효이기 때문입니다.”
“그 실효를 쫓다가 도리어 낭패만 당할 수 있소이다.”
“실효를 쫓지 않고서 어찌 실효를 거두겠습니까?”
박홍구와 조정의 논쟁은 원론적으로 흘러갔다.
판단에 도움이 될만한 단서를 찾아내는 편이 훨씬 이로울 텐데, 서로 합의할 수 없는 부분으로 평행선만 달리 모아놓은 보람이 없었다.
과연 이원익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영상.”
호명과 함께 박홍구와 조정의 언쟁도 잦아들고, 두 사람 가운데에서 조용히 고막만 고생하고 있던 이원익이 입을 열었다.
“신이 사료하건대 만약 싸우게 된다면 신속함이 생명이 될 줄로 아옵니다.”
“그렇지 않은 싸움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특별히 강조할만한 이유가 있다는 건가.
이원익이 답했다.
“아파태가 노리는 것이 단지 패륵의 자리뿐일지, 혹은 그 이상일지는 중요하지 않사옵니다. 인간의 탐욕에는 끝이 없으며 하물며 배우지 못한 오랑캐라면 더욱 그러할 터인데, 만약 아파태가 저들 사이에서 공적을 쌓아 더욱 높은 자리에 이를 수 있다면 기꺼이 기회를 취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렇겠지요.”
“그러나 적이 신속하게 제압된다면 아파태는 물론, 다른 추장들이 끼어들어 어부지리를 노리고자 하여도 그렇지 못할 것이나, 반대로 싸움이 지지부진하여 어부지리를 취하기 좋은 형세가 된다면 추장들에게 본디 다른 마음이 없었더라도 끼어들고자 할 것인즉, 신속함이 생명이 되리라고 아뢴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원익의 깔끔한 정리로 쟁점은 ‘이익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것이냐?’는 다소 철학적이기까지 한 질문에서, ‘우군이 적군을 신속하게 격멸할 수준이 되느냐?’는 비교적 구체적인 의문으로 넘어왔다.
이에 박홍구가 말했다.
“신이 감히 아뢰옵건대 북방군의 전력은 이미 동수의 명군을 아득히 상회하옵니다.”
이제는 옛일이 되어버린 가도 정벌 때문이 아니다.
북방군은 그때로부터 경험과 사기를 얻었으며, 교범은 더욱 정교해졌다.
나아가 소 홍이포를 도입했고 극적으로 개선된 화약의 생산 및 보관법으로 실제 방포 훈련을 거듭하게 되었다.
해적이나 진배없던 탈영병 무리와는 수준이 이미 아득하게 벌어졌다.
박홍구의 발언은 그런 해적들 따위가 아니라 중원 본토의 명군과 비교하여도 북방군이 우위에 있다는 뜻이었다.
“더욱이 군사들은 지난 싸움처럼 잘 알지 못하는 외지를 방황하다가 갑자기 적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해박한 조선의 강토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쳐들어오는 적을 맞이하는 것이니 승산은 훨씬 높사옵니다.”
박홍구는 여전한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조정은 어떨까.
“우의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설령 반대로 이용하기 위함일지라도, 신은 오랑캐의 수작에 응하는 것이 여전히 탐탁지 않사옵니다.”
조정은 단호하게 선을 긋고서 덧붙였다.
“그러나 저들의 간악한 잔꾀를 되돌려 도리어 그들의 발등을 찍을 수 있다면, 어찌 부득불 반대하겠사옵니까?”
이어서 이원일을 마주하니, 그가 입을 열었다.
“남이공의 공로로 가도의 평정을 인정받고 전하께서 황제의 책봉을 받게 된 것은 무척 경하스러운 일이었으나, 명나라가 폐주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건 그만큼 경계하는 마음도 있기 때문이옵니다.”
명나라가 조선을 언제까지고 예속될 존재로 여겼다면, 후금이 조선에 사신을 보냈더라도 개의치 않았을 거다.
도리어 조선에 누명을 씌우고 트집을 잡아 어떻게든 이익을 쥐어짜내려 들었겠지.
‘누구 보라는 양 내가 먼저 침 발라놨다는 식으로 퍼줄 게 아니라…….’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명나라라도, 아직은 건재하다.
아민과 정람기를 패퇴시킴으로서 후금의 전력 약화만이 아니라 명나라의 조선을 향한 두려움과 경계심까지 종식시킬 수 있다면, 상국上國의 존재에 심리적으로 의존하는 여러 관리와 선비들에게서 큰 지지를 받아낼 수 있다.
어쨌거나 조선은 유교를 기반으로 한 나라였고 재조지은再造之恩의 개념은 아주 강력하니까.
설령 명나라가 망할지라도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다면, 국가의 위신과 사대부의 명예는 수호할 수 있는 셈이다.
‘나아가 명나라에서도 조선을 옛 송나라가 펼친 연려제요聯麗制遼, 연려제금聯麗制金 정책처럼 북방 유목민을 견제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쐐기로 여기게 되겠지.’
자연히 조선이 동북아에서 가지는 위상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조선이야 원래 명나라의 전통적인 우방으로 본래 가진 위상이 낮다고는 못하지만, 임진년 때 대단한 추태를 보이면서 명나라에 충격적인 실망감을 안기지 않았던가?
반대로 북송 시절 고려는 제국에 준하는 위상을 보유했다.
만약 명나라에서도 조선을 당시 고려처럼 여기게 된다면, 위상의 회복을 넘어 상승까지 노릴 수 있다.
이에 우의정 조정이 말했다.
“영의정의 지적이 합당합니다.”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시야를 넓혀서 보니, 과연 명나라 상대로 얻을 이익이 작지 않사옵니다.”
좌의정은 당연히 찬성.
여기에 우의정도 찬성.
영의정은…… 가타부타를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위험성보다는 조선이 확실하게 이익을 취할 방법과 간과했던 명나라에서의 이익을 조명해주었다.
이만하면 찬성이라 보아도 되겠지.
“아파태의 제안에 응하겠습니다.”
왕으로서 결단은 내렸다만, 공론이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으니 실상은 종지부를 찍은 데 불과하였다.
“백관 모두에게 알린다면 반드시 불필요한 언쟁으로 조정이 시끄러워질 것이니, 제공께서는 의정부에서 병조판서와 호조판서를 불러 오늘의 결정을 자세히 알려주도록 하세요.”
“예에.”
그러면 병조판서와 호조판사가 저마다 전쟁을 앞두고 필요한 준비를 미리 해둘 거다.
“또한 북방군에도 나의 결정을 전할 사람이 필요한데, 누구를 보내는 게 좋겠습니까?”
박홍구가 답했다.
“남이공이 북변의 지리에 밝으니 그를 보내시옵소서.”
“그렇게 하세요.”
논의가 대강 마무리되어 나는 과자 상자를 돌렸다.
이즈음 과자를 돌리는 건 의례처럼 되어버린지라, 세 사람은 가볍게라도 사양하는 일 없이 저마다 내키는 과자를 집어서 입을 채웠다.
* * *
“왜, 또 이 사람인가?”
남이공은 억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을 밖으로 보낼 일이 있으면 항상 자신만 보내졌으니까.
“환갑이 다 되어 그런지 무릎에도 바람이 드는 마당에……, 이번에는 압록강까지 가라니!”
남이공의 탄식에 맞은편에서는 김신국이 미소를 잔뜩 머금었다.
“나라에서 불러주지 않는다고 탄식할 때는 언제고? 자네 입맛에 이 일은 아닌가 보지?”
“크흠.”
남이공이 멋쩍게 헛기침했다.
친우의 말처럼, 이런 임시직이 아니라 번듯한 정직正職으로 복귀하고픈 마음이 컸다.
하지만 첫 단추를 잘못 꿰어서일까?
외방을 다녀오면 늙은 몸에 고생했으니 푹 쉬라며 한동안 불러주지 않고, 그러다가 잊을만하면 푹 쉬었느냐며 다시 외방으로 보내버리는 판이었다.
남이공이 신세 글렀다며 입술을 툭 내밀자 김신국이 장난스럽게 다그쳤다.
“설사雪蓑, 이 사람아. 순찰사에 제수되었으면 전하께서 나를 크게 신임해주시는구나, 하고 백배 감읍할 것이지 선비가 일을 가려받지 못했다고 투정인가?”
“쩝.”
“쥐구멍에 볕들 날 있다고 하였으니, 수인사修人事하고 대천명待天命하시게.”
엄살 한 번 부렸다가 늘그막에 잔소리나 듣게 된 남이공은 술잔을 비우며 투덜거렸다.
“누가 뭐 싫댔나…….”
정직에 들지 못하고 또 부림이나 당하게 된 건 내키지 않았지만, 별개로 정예한 북방군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니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또한, 변방의 분위기가 더욱 위태로워져 언제 싸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하므로 오랑캐들에게 선비의 기개를 보여주마 기대 섞인 각오도 하고 있었다.
이미 정유년 재란 때 당시 체찰사를 지냈던 현 영의정, 이원익의 종사관으로 복무했던 몸이다. 기대감만큼 불안감도 슬쩍 느끼지만 옛 생각이 나 감회가 새로웠다.
김신국이 말했다.
“거, 그렇다고 훈공 하나 세워보겠다며 쥐뿔도 안 되는 식견으로 원수들 하는 일에 훼방은 놓지 말고.”
“이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