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99화
남이공은 북방군 원수들 상대로 설치지 말라는 옛 친우의 뜨거운 배웅을 받고서 한양을 떠났다.
그리고 남이공이 의주부에 도착했을 때, 변경과 북방군은 이미 임전태세를 갖춘 채였다.
적이 언제 어디서 쳐들어올지 모르므로 국경과 인접한 진보 및 봉수마다 인원을 충당하고서 그 사이마다 순찰하는 기마를 뿌려놓으니, 당장 의주 거리에서도 말발굽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압록강의 섬마다 첨병을 보내 적의 도강을 감시하게 했으니 불시에 침공이 발생하더라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소이다.”
북방군 도원수 장만의 설명이었다.
“아…… 음.”
남이공은 입술만 적시고서 입을 닫았다.
한양에서 압록강까지 가는 데 적잖은 시일이 소요되었으므로, 그동안 적적함을 달랠 겸 몇 가지 훈수거리를 품고서 온 남이공이다.
그러나 북방군은 이미 제 몫을 빈틈없이 해두었으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신경 써주니 고맙구려.”
“……아닙니다.”
남이공은 민망한 얼굴로 주변을 의식했다.
도원수 장만 외에도 여러 사람이 막 부임한 순찰사를 맞이하러 온 참이었다.
부원수 정충신,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수일, 의주부윤 이경직李景稷, 정헌대부 김충선 등.
이경직은 몰라도 정충신이나 이수일은 가도 정벌에도 참여했던 사람이고, 항왜들의 지휘관을 맡게 된 김충선 역시 전장의 경험이라면 오히려 두 사람을 아득히 능가했다.
이러니 비전문가가 바늘 하나 꽃아놓을 틈이 있으랴.
남이공이 돌아보니 자신이 체찰사體察使나 도순찰사도 아닌 그냥 순찰사라는, 은근히 관품 떨어지는 자리에 제수된 데는 그만한 의중이 있는 듯했다.
‘후추(김신국) 이놈이 어디서 들은 말이 있었나 보구나.’
남이공은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임란 때만 하더라도 정이품 도원수 위에 정일품 도체찰사가 네 명이 있었다는 정신나간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당시 본인마저 ‘중앙에서 군무를 감독하고자 파견하는 사람은 적당한 위치에 한두 사람이면 족할 것을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내심 비판했던 만큼, 어쩌면 이게 정상이었다.
“사소한 일이라도 좋으니, 맡길 일이 있다면 맡겨주십시오.”
원수들의 부담이나 덜어줄 요량으로 청하니 장만이 허허 웃었다.
“그래도 되겠소이까? 순찰사로, 그것도 막 오셨는데.”
“무방합니다.”
남이공은 단호하게 답하며 의기를 드러냈다. 말이야 꿔다놓은 보릿자루라지만 정녕 하는 일 없이 겉도느니 사소하게라도 보탬이 되는 편이 백배는 나았으니까.
“어떤 일이라도 좋으니 미안해하지 마시고 편하게 맡겨주십시오.”
남이공이 재차 강조하자 장만이 안도한 얼굴로 주변의 제장을 돌아보았다.
마침 까다로운 일거리라도 있던 참일까?
남이공이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각오를 다지니 장만이 말했다.
“우리가 마침 강 너머에서 사람 하나를 데려와야 하는데, 맡길 적임자가 없어 곤란하던 참이었소이다.”
“누구를…….”
강 너머에서 데려온단 말인가.
“순찰사께서도 알고 계실 사람이요. 예전에 정주목사를 지냈다가, 괴서 때 강 너머로 도망쳤던 자라고.”
“아.”
남이공은 탄식하고서 물었다.
“그놈이 다시 돌아오기라도 바란답니까?”
“아니요. 그놈이…… 강변에 온다는 첩보가 있어서 그렇소. 아조로서는 반드시 잡아들여야 할 죄인인데, 때마침 알짱거린다니 외면할 수 있겠소이까?”
남이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암. 관직까지 지냈던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모자라 오랑캐의 개가 되었으니, 마땅히 잡아다가 엄벌에 처해야지.
장만이 덧붙였다.
“비록 죄인 하나를 잡을 뿐이지만, 반드시 성사해야 하는 일인데 반해 적지를 오가는 위험이 큰지라 여의치 않던 참이었소이다.”
중임을 맡을 만한 사람들은 이미 중임을 맡고 있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짬을 내어 적지를 오가려다 다치거나, 만에 하나라도 사로잡힌다면 얼마나 난처해지겠는가?
이러한 차에 때마침 중앙에서 순찰사를 보내주니, 기실 장만은 손님을 맞이하기 전부터 일 맡길 생각부터 했었다.
“순찰사께서 나서주신다면 이 사람이 아주 망극하겠습니다.”
장만이 빙긋 웃으면서 청하니 남이공은 속으로 철렁하였다.
가도와 명나라에 이어서 이제는 후금까지 다녀와야 하는 것인가!
고작 강 너머일 뿐이라지만, 가도나 명나라 때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곳이다.
더욱이 만에 하나라도 적에게 붙잡힌다면 또 어떻게 될 것인가.
‘군신君信(강홍립)은 적지에서 죽지 않고 사로잡혔다는 이유만으로 역신으로 낙인찍혔으니…….’
그러나 막 해둔 말이 있던 남이공으로서는, 난처함에 질색할지언정 차마 가지 못하겠다고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일 맡길 각오를 하였던 장만 역시, 순찰사의 면면에 당혹감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도 말을 거두지 않으니, 끝내 남이공은 제안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고맙소이다!”
남이공은 그저 난처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부원수?”
“말씀하시옵소서.”
“순찰사께 필요한 도움을 드리게.”
“예.”
환대를 겸한 떠넘기기가 완수된 만큼, 장만은 빙긋 웃고서 일어났다.
“순찰사께는 미안하지만, 이 사람이 일이 많아서 염치 불고하고 당장은 일어나야되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순찰사께 훨씬 감사드리오. 자, 그럼 부원수 빼고 다들 따라오시지요.”
장만은 제장에게 덧붙이고서 물러났고, 그렇게 사람이 썰물처럼 우르르 빠져나가자 자리에는 남이공과 그에게 임무를 알려줄 정충신만이 휑하니 남았다.
‘이런……. 조졌군!’
그러나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다는 듯 정충신이 곧장 말했다.
“따라오시지요. 지도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 * *
늦은 밤.
구름마저 짙게 끼어 강변에는 깨질 달빛조차 없이 수렁처럼 어두웠다.
그리고 그 위를 고요하게 나아가는 쪽배 한 척이 있었다.
남이공은 작전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주지한 채 며칠 속으로 끙끙 앓아왔다. 막상 적지를 들쑤시려니 갖은 생각이 다 들었다. 이게 바로 노인학대인가 싶었다. 아무리 중요한 임무라지만 환갑이 다 된 늙은이까지 현장으로 데려간단 말인가?
‘시부랄, 시부랄, 시부랄…….’
남이공은 쪽배 한 구석에 처박힌 채로 염불하듯 열 개의 불알을 찾았다. 부담감 때문인지, 고작 강을 건너는데도 배멀미가 느껴졌다.
“영감.”
무관이 낮게 속삭였다.
별장 김준룡金俊龍으로, 부원수가 남이공에게 붙여준 사람이었다.
질색하던 남이공이 반개하고서 김준룡을 마주하자, 김준룡은 몸을 돌려 뱃머리를 가리켰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도 수면 위로 나온 갈대들의 숲이 어렴풋이 비쳤다. 벌써 강 반대편에 다다랐다는 뜻.
남이공은 묵은 숨을 토해내고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동승한 별장과 휘하의 무관들도 바짝 긴장한 채 저마다의 무기에 손을 얹었다.
쪽배는 갈대숲을 차르르 헤치며 나아갔다. 그 소리가 남이공에게는 마치 천둥이 치는 것처럼 들렸다. 늙은 심장이 연신 쿵쾅거리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려야겠습니다.”
“더 들어가지 않고?”
“한계입니다.”
김준룡이 툭 튀어나온 노를 가리켰다.
이미 갈대숲에 들어올 때부터, 갈대의 저항 때문에 노로 강바닥을 밀어내며 나아갔다. 지금은 수심이 더욱 얕아져 더 들어가면 나올 때 힘들 수 있었다.
“음.”
남이공이 침음과 함께 일어서자, 김준룡이 고개를 저었다.
“죄인은 저희가 잡아오겠습니다. 영감께서는 배를 지켜주십시오.”
“……그래도 되겠나?”
“밤이 짙어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우니, 모두가 나서면 배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아야 한다면 순찰사께서 남는 게 좋습니다.”
“내 지위가 높다고 뒤에 남겨둘 필요는 없네.”
새삼스럽게 호승심을 부려보는 남이공이었지만, 김준룡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영감의 무위가 제일 약하니 배를 맡기려는 것입니다.”
“……그렇군.”
너무 단호하게 말하니 남이공은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준룡은 동개에서 화살 한 발을 꺼냈다. 활이라면 남이공도 무장하고 있는지라, 의아하게 보자 김준룡이 촉을 보여주었다.
보통 화살촉이 아닌 둥그스름한 머리가 달려 있었다.
“효시입니다. 응급한 상황에서 쓰십시오.”
김준룡은 화살을 혼동하는 일이 없도록 효시를 반대로하여 남이공의 동개에 넣어주었다. 반사적으로 손이 닿았을 때 깃이 아니라 특유의 촉이 만져진다면 효시인 것이다.
반드시 필요한 구분이었다. 설령 위급한 상황이라도, 효시를 쏘게 되면 적이 알아차릴 것이니 자신은 물론 배를 나선 김준룡과 이하 무관들도 위험해진다.
그러니 김준룡이 언급한 ‘응급한 상황’이란, 기실 그냥 응급한 상황이 아니라 ‘매우 매우 매우 매우 응급한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
“알겠네.”
“만약 효시가 한 번 울린다면 혼자서라도 배를 타고 떠나시고, 두 발이 울린다면 마찬가지로 효시를 쏴 주십시오. 찾아가겠습니다.”
적에게 발각된다면 보통 저들이 먼저 효시를 쏘아올릴 테니까.
김준룡이 마찬가지로 효시를 쏘아올린다는 건 탈출에 자신이 있을 때였고, 그렇지 않아 침묵한다면 혼자서라도 빠지라는 의미였다.
“……알았네.”
“다녀오겠습니다.”
남이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준룡도 굳은 얼굴로 끄덕이고는 배에서 내렸다.
사람이 한 명씩 빠져나갈 때마다 배가 휘청거렸다.
김준룡과 휘하의 무관들은 무릎까지 적셔오는 강과 갈대숲을 헤치며 어둠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고작 반의 반 각도 안 되어 배 주변은 고요해졌다.
남이공은 귓전에 손을 말았다가, 인기척은 없이 벌레 우는 소리만이 가득하자 묵은 숨을 토해냈다. 그래도 여전히 폐부에는 돌이 앉은 듯 무거웠다.
남이공은 활을 꺼내 화살 한 발을 시위에 재어두었다. 그리고 다시 귓전에 손을 말았다.
* * *
상황이 반전된 것은 한 식경쯤 지났을 때였다.
남이공이 긴장도 풀려 손에서 활을 늘어뜨리고 별장 이하의 귀환을 기다리는데, 멀리서 어렴풋이 소란이 이는 게 아니겠는가?
고개를 돌려 소란이 도는 방향을 주시하니 갈대들 사이로 불빛들이 깜빡거리므로, 사람들이 홰를 들고 돌아다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별장의 일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게 돌아간 모양이었다.
‘아직 효시는 울리지 않는구나.’
마침 떠오른 효시 생각에 남이공은 김준룡이 제 동개에 꽂아놓은 효시를 확인했다.
다행히 효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오랑캐가 배를 찾아내면 어떡하지?’
남이공은 갈대들 사이로 오랑캐들이 나타나 왁 달려들지는 않을까 근심했다.
그러나 정신이 팔리는 것도 한 순간이요, 문득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밤하늘을 아득하게 가로질렀다.
휘이이이이……
상념을 찢는 소리에 남이공은 자신의 효시를 손가락으로 잡았다.
김준룡 일행이 연달아 효시를 쏘아 올리면,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효시는 없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 한 발의 효시가 허공을 갈랐지만, 아무래도 김준룡이 아니라 적의 것이 분명했다. 일전의 것보다 훨씬 가까웠다.
‘잠깐, 그렇다면 별장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상황이 여의치는 않아도 어떻게든 탈출을 모색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김준룡은 첫 효시가 울렸을 때 대응이 없으면 혼자서라도 빠져나가라고 당부했다. 순찰사 신분에 적에게 붙들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냉정하게 보자면 그게 맞았다.
하지만 김준룡은 그리 말하고도 만의 하나를 기대하고서 이쪽으로 오는 중이었다.
무수히 많은 적을 달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