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00화
남이공은 혀를 내둘렀다.
별장 일행이 배를 찾아오고 있음을 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되어버렸으니 가벼이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준룡이 막상 저들보다 먼저 배를 찾아내더라도, 갈대숲 한가운데 처박힌 배가 과연 빠르게 달아날 수 있을까?
남이공은 노를 붙잡았다.
결심이 서는대로 달아나기 위해서였다. 객관적으로 보면 김준룡의 각오에 응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러나 노를 붙든 손은 공연히 힘만 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고, 제기랄! 늙어서 마음이 약해졌나?’
남이공은 내심 부들대면서도 끝내 도망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오랑캐들의 소란과 불빛은 훌쩍 다가와 있었으니, 남이공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실상은 별장 일행을 기다리기 위한 시간벌이라는 것을 못내 느꼈다.
자신의 진심이 그러하다면 왜 마음에도 없을 갈등에 시달리고 있을까?
남이공은 괜히 붙들고 있던 노에서 손을 놓고, 활 시위를 잡았다.
혹여 눈에 들어오는 오랑캐가 있으면 바로 쏴 죽일 생각이었다. 활재주가 무부만은 못하겠으나 육례六禮를 연마한 선비로서 활 정도는 다룰 줄 알았다. 늙어 힘은 쇠하였으나 갑주로 가리지 못한 면상에 화살을 꽂아놓으면 천하의 항우일지라도 버티지 못할 터이므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훌쩍 다가온 오랑캐들의 홰가 갈대숲을 비쳐왔다. 빛나는 갈대들 사이로 무수한 인영이 교차했다. 오랑캐들은 고함을 치다가도 이따금 비명이 섞였다. 별장 일행은 여전히 항전하며 도망치는 중이다. 남이공이 외쳤다.
“여기일세!”
굳이 효시를 날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과연 오랑캐들 고함 사이로 반색하는 조선어가 들렸다.
그러나 오랑캐들은 생각이 달랐는지, 갈대숲 너머에서 효시가 올라왔다. 어렴풋한 거리에서 말발굽 소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순찰사 영감!”
“여기일세!”
갈대 부러지고 밀쳐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다급한 다리들이 첨벙거리면서 물살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등장한 김준룡과 무인들은 반색하고서 남이공을 맞이했다.
“먼저 가실 줄 알았습니다!”
무관 하나가 헐떡이면서 쪽배에 올라탔다.
뒤이어 무관들이 배에 들러붙는 동안, 남이공은 횃불을 향해 시위를 놓았다.
퉁!
그러자 횃불이 추락해 사라졌다. 자신감을 얻은 남이공은 다시 화살을 재어 다른 횃불을 향해 날렸다.
곧장 응사가 날아왔다.
남이공은 귓전을 가르는 바람소리에 철렁했으나, 그새 남이공 앞에는 무관이 서서 반쯤 몸을 가려주고 있었다. 미안하고도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상급자를 지키려는 무관의 직분인지라 남이공은 새삼스러운 소리를 하는 대신 시위를 놓았다.
퉁!
갈대밭을 두고 화살이 오가는 동안, 쪽배는 나아갔다.
남이공은 어련히 누가 노를 잡고서 강바닥을 밀어내다보다, 하고 치부하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제 올라오십시오, 별장 어른!”
“아니야!”
남이공이 슬쩍 고개를 돌아보니 김준룡이 선미에서 배를 밀어내고 있었다.
확실히, 노로 강바닥을 밀어내는 것보다 그편이 확실했다. 그러나 불안해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벌씨 김준룡의 가슴께까지 물이 차 있었으니까.
“뒤다!”
한 무관의 외침과 함께 수 발의 화살이 김준룡의 머리 위로 교차했다.
적에게 적중했는지 갈대밭 사이로 첨벙대는 물소리와 함께 고함과 비명이 뒤석였다.
쪽배 위에서도 가장 뒤를 지키던 무관이 숨을 삼키며 흘러내렸다. 가슴팍에는 수 발의 화살이 틀어박힌 채였다.
“별장 어른!”
여전히 김준룡은 후미에서 배를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배가 이미 갈대숲에서 멀어졌으므로 이제는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그것을 김준룡도 모르지 않음에도 배에 타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막 화살이 오간 동안인지 그 전부터인지 등판에 몇 개의 화살이 틀어박혀 있었다. 이래서야 힘을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한 무관과 남이공이 김준룡의 팔을 한 쪽씩 붙들고서 끌어당겼다.
“어이쿠!”
남이공이 나동그라지며 쪽배가 뒤흔들렸지만, 다행히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반쯤 건져진 김준룡은 물에 젖은 고슴도치 꼴이 되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더욱 멀어진 갈대숲에서는 언제 붙었는지 모를 불이 번져가고 있었다.
이따금 주변에서 참방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아, 아무렇게라도 화살을 갈겨대는 모양이었으나 불 때문인지 금세 멎어버렸다.
악에 받인 고함들이 야밤을 쩌렁쩌렁 울려댔다.
그리고 그마저도 멀어져 아득해지고, 갈대숲을 쓸어가는 불빛만이 번쩍거렸다.
그동안 휴식을 겸해 정신을 차린 김준룡이 마저 배에 올라라탔다. 검붉은 갑주에서는 차가운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으어어!”
김준룡이 다 죽어가는 신음과 함께 배 구석에 틀어앉자, 남이공이 물었다.
“자네는 내가 혼자서 갔으면 어쩌려고 배를 찾아왔나?”
“갔을 줄 알았지요.”
“으음?”
“그냥 죽어줄 수는 없어 항전하면서 도망치다 보니 이르게 되었습니다. 순찰사께서 떠나면 떠난 대로, 계시면 계시는 대로 안도하려고요.”
“기개가 대단한데.”
남이공이 촌평하였으나, 무관들은 아는 게 달랐는지 한 사람이 따져물었다.
“아니, 언제는 순찰사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라면서요?!”
“그걸 믿어? 순진한 사람 같으니, 하하.”
“…….”
하기야, 확실하게 배를 타고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처음 적이 효시를 올렸을 때 함께 울려 신호를 주었으리라.
“……어휴!”
어쨌거나 목숨은 구명하였으므로 무관은 탄식하고 말았다.
추격 당하는 와중에도 갑주는 벗지 않은 덕에, 김준룡과 무관들은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갈대숲을 벗어나는 동안 저 혼자서 화살을 다 맞았던 후미의 무관도 그러했다. 부상이 심하기야 했으나, 죽지는 않았으니 그만이었다.
그리고 배에는 남이공이 탑승을 인지하지 못했던 승객이 하나 있었다.
머리를 깎은 것까지 포함해 차림새는 영락없이 호인이었으나, 면상은 그들과는 다소 달랐다. 단순한 죄인에서 역적으로 진화한 전 정주목사 이신이었다.
그의 존재를 확인한 남이공은 단번에 뺨따귀를 올려붙었다.
철썩!
가죽 때리는 경쾌한 소리가 압록강에 울렸다.
* * *
남이공 이하가 강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치료받는 동안, 소식을 전해들은 장만이 찾아왔다.
“고생하셨소이다, 순찰사!”
예상치 못한 등장에 남이공이 물었다.
“이 늦은 시각에 아니 주무시고 어인 행차십니까?”
이신을 확보하는 건 아민을 끌어들이기 위한 모든 계획의 단초였다.
다만 오랑캐의 제안에 응하여 국운을 시험하였다는 것이 떳떳하지는 않았던지라 내색하지 않았다뿐, 남이공 일행이 출발한 뒤로 내내 결과를 기다리며 전전긍긍해 온 장만이다.
그런데 좋은 소식이 들렸으니 어찌 환대하지 않겠는가.
“순찰사께서 막중한 임무를 띄고서 떠났는데, 이 사람만 편하게 잠들 수 있겠소이까? 참으로 고생하혔소이다!”
“고생을 아니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소관보다야 동행한 무관들이 훨씬 고생하였지요.”
남이공이 함께 휴식하던 김준룡과 이하를 돌아보았다.
자신이야 배만 지켰을 따름이다. 이들의 수고에 비하자면 자신의 고생은 일말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김준룡이 답했다.
“아닙니다. 만약 순찰사가 배를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소관은 물론이고 수하들까지 다시는 조선의 땅을 밟지 못하고 이국에서 숨을 거두었을 것입니다.”
그 역시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장만의 눈에는 함께 고생한 남이공과 김준룡이 공을 서로에게 양보하는 것으로 비쳐 뿌듯했다.
“순찰사와 별장 이하의 공훈은 이 사람이 조금도 가감하지 않고 조정에 그대로 전달할 것이니, 다른 데 신경쓰지 말고 푹 휴식과 치료를 취하시오.”
“감사합니다.”
장만은 빙긋 웃고서 발길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홰를 앞세운 북방군이 오와 열을 갖춘 채 진군하고 있었다.
죄인을 잡아오는 것이 조용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건 아까웠지만, 지나간 일에 미련을 두어서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중요한 건 앞으로 무엇을 얻느냐지.
부원수의 수고로 북방군의 전력은 가도 때보다 훨씬 강화되었다.
다소 회의적이었던 장창방진도 직접 두 눈으로 보니 위세가 사뭇 놀라웠다.
아민이 저들의 자랑스러운 철기를 앞세워 조선 땅에 쳐들어온다면, 철과 창날로 이루어진 벽으로써 맞이하리라.
그리고 그대로 밀어내어 저들이 건너왔던 압록강에 고스란히 처넣어버리면 되겠지.
‘그러면 나는 체차遞差다.’
장만의 지속적인 사직 요청에 조정에서도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협상하기를, 당장은 사세가 위급하니 아민과 정람기를 꺾은 다음에 한직으로 체차해주겠다고 약조했다.
장만 역시 당장 도원수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조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랑캐들을 격파한 다음 개선장군이 되어 한양으로 귀환한다면, 금의환향이 따로 없겠지.
장만의 앞으로 그의 장밋빛 미래를 실현해줄 북방군 살수조가 창대를 세우고서 진군했다.
창날과 견철이 새벽의 여명을 받으며 시리게 반짝였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광경이었다.
* * *
“네가 말한 대로 되었구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살짝 정보를 흘리기만 해도, 형님께서 고대하던 명분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흠.”
아민은 턱살을 매만지며 복잡한 심경을 다스렸다.
그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 하나는 아파태의 그럴싸하면서도 의심스러운 계획이 정말로 실현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이 내색하지는 않아도 후금과의 충돌을 지양하는 건 분명했으니까.
아무리 저들이 위신을 유난히 중대하게 여긴다고 해도, 후금 땅에서 사람을 잡아갈 정도로 눈에 뵈는 게 없을까?
‘그런데 그게 실현되었단 말이지.’
조선이 별종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이 정도로 별종일 줄은 몰랐을 뿐.
알았다면 아파태가 나설 필요도 없이 진즉 명분을 만들어내었으리라.
‘꼴에 조선을 다녀온 보람이 있긴 한 모양이군…….’
두 번째로 아민의 심경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 이신을 잃었다는 점이었다. 적지에 들어갈 때는 길잡이의 역할이 중요하다.
명분을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해 써먹기는 했다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이신이 사라지니까 뒤늦게 길잡이가 아쉬워졌다.
‘지난 전투 때 잡아들인 조선인 포로도 있지만…….’
조선에서는 제 고향 땅에서 농사만 짓고 살았을 놈들이라 그다지 효용이 없었다.
길잡으로 써먹으려면 각지에서 살던 다수를 모아야 하는데, 그건 대외적으로 속이 너무 뻔히 보이는 짓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명분이 생겼으니 빨리 움직여야 할 때지.’
주저할 상황이 아니었다.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상황으로 꾸며내기 위해서는 한참 시끄러운 지금 빠르게 뛰쳐나가야 했다.
아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하들에게 명했다.
“조선이 나의 수하를 공공연하게 납치하였는데, 가만히 구경만 한다면 내 꼴이 어떻게 되겠느냐?! 당장 병사들을 준비시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