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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01화 (101/380)

인조, 명군이 되다 101화

아민이 밖으로 나서자 여명이 그를 맞아주었다.

적을 급습하기에는 다소 늦은 시각이었으나 상징적인 의미로는 나쁘지 않았다. 부친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뒤 누르하치에 그늘에서 살아온 아민이었다.

그러한 삶에 동이 트려는 순간이다.

때마침 천하도 밝아져 온다는 건 하늘이 함께한다는 징조였다.

아민은 그렇게 받아들이며 투구를 눌러썼다. 어차피 그에게 좋은 때를 기다려 출정할 여유는 없었다.

그런 아민의 곁으로 화려하게 무장한 사내가 다가왔다.

“집결한 15개 초哨 모두 어전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송합者送哈. 아민의 동생이었다.

가족이란 예비 배신자에 불과한 집안이었으나 자송합은 아민과 함께 역적의 자식이라는 그늘을 썼기에, (적어도 당장은) 미더운 동생이었다.

“고작 15개 초인가.”

“불아랍佛阿拉에서는 많은 병사를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안다.”

불아랍은 누르하치의 옛 거점이었으며, 그로부터 지척인 혁도아랍赫图阿拉은 조상들이 대대로 지켜온 가문의 중심지였다.

이들을 수비하기 위한 다수의 병력이 아민이 이끄는 정람기에 배속되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이패륵의 입지를 보조하기 위한 명목상의 편제에 불과했다.

그리고 정람기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의 비중을 배제하면 아민이 진짜 친위대로서 부릴 수 있는 병력은 소수에 불과했다.

때맞추어 군사훈련을 빙자해 15개 초라도 모아놓은 게 아민의 최선이자 한계였다.

“각 부대 대장들의 여론은 어떻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자송합이 일축했다.

급작스러운 조선군의 침투와 함께 아민의 측근이 납치됐다.

내막을 알지 못하는 말단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소동을 조선이 정면으로 후금을 공격한 것인지, 일전의 도발을 의식한 보복인지, 변방 관리가 노출된 정보를 믿고 벌인 독단인지, 이신이 조선으로 귀환하고자 일으킨 자작극인지 분간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혼돈과 소란은 아민 자신의 선에서 정리하는 게 이로웠다.

누르하치나 다른 패륵들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이용하려 들지 모르니까.

마침 소란을 진정시킬 쉽고 분명한 방법이 있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떠들어대는 수하들을 모조리 휘어잡아 함께 강을 건너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후금 땅에서 소란이 더 번질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대로 몰아친다. 병력을 강변으로 진격시켜라.”

“알겠습니다.”

어수선하게 떠들어대는 병사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정답에 근접한 추측을 내놓았다.

자작극이라면 자작극이었으니까.

다만 이신의 자작극이 아니라 아민의 자작극일 따름이다.

‘그걸 강변에 이르러서는 깨닫는 놈이 몇은 나올지도 모르지.’

병사들을 강변으로 데려가는 건 쉽지만, 많다고는 못해도 적다고도 못할 병력을 건너편까지 옮기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민은 그 준비를 이미 해놓았다.

그러니 뒤늦게 수상하다는 것을 여길법하지만 말 그대로 ‘뒤늦게’다.

아민은 다시 후금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으니까.

강변에 이른 아민이 장수들에게 외쳤다.

“서둘러 강을 건너라!”

이에 장수들은 자송합에게 채근당하며 병사들을 배에 태웠다.

개중 아직 배에 오르지 않은 한 장수가 질문했다.

“이 정도 군대로 강을 건넌다는 건 위협이나 보복 정도가 아니라, 전면적인 침공 아닙니까?”

“……그래서?”

“아무리 패륵께서 분개할 일이시라지만, 이처럼 돌발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기신다면 처벌 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

아민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활을 꺼내 놀란 얼굴에 화살을 박았다.

“조선이 대 금나라의 땅에서 대놓고 분탕을 치고 도망쳤는데 그저 눈치만 보고 있으라?! 조선이 보낸 간첩이나 할 법한 소리로군!”

아민은 자신을 향한 시선들을 돌아보면서 윽박질렀다.

“누가 또 조선이 보낸 간첩이냐!”

활에 새 화살을 재어놓고서 외치니, 병사들은 물론 장수들까지 고개를 돌리고서 도강을 서둘렀다.

절반 즈음이 강을 건너자 아민은 자송합을 보내 반분된 병력을 통제하게 했고, 나머지 절반도 뒤따라 거의 건너가자 아민은 때마침 돌아온 자송합과 함께 배에 올랐다.

“조선 쪽 분위기는 어떻지?”

“아직 알아채지는 못한 듯하였으나, 저들이 평소 경계하는 수준을 생각하면 금세 발각되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곧바로 길을 따라서 수도까지 내달려야 해.”

15초의 병력은 대략 6천 명쯤 되었다.

금나라의 병사들은 천하의 전사들이니 일대를 쓸어버릴 요량이라면 부족하지 않겠지만, 아민의 야망은 그저 주변에 겁을 주고 돌아가는 게 아니었다.

‘빠르게 조선의 왕을 사로잡고 수도를 빼앗아서 눌러앉는다!’

아민은 자신 있었다.

조선으로 사신을 다녀온 아파태가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도 알려주었고, 또 조선군이 가도의 명군 잔당들을 상대로는 의외인 모습을 보였다고는 하나 임진년 때 고작 스무일 만에 수도를 함락당한 놈들이었다.

그런데 한양은 동래보다 의주에서 더 가깝고, 또 왜군과 달리 제 부하들은 말까지 타고 있으니 파죽지세로 내달리면 열흘도 안 걸리지 않겠는가?

“오직 신속이 생명이다.”

아민이 당부하는 순간.

쾅!

강 건너편에서 폭음이 울렸다.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나?!’

아민은 깜짝 놀랐지만, 동생을 다그칠 새도 없이 번져오는 물보라에 몸을 비틀어야 했다.

‘……!’

그와 함께 갑자기 찬물 벼락을 맞게 된 말도 깜짝 놀라 몸을 비틀었다. 시야가 뜨자 아민은 반사적으로 손목에 고삐를 감았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시야가 마저 회전한 다음 하늘을 쳐다보게 된 아민이 느낄 수 있던 건 고삐가 아니라 부속물처럼 덜렁거리는 손목이었다.

그러나 아민은 그런 상태에 비관조차 할 수 없었다.

‘커허……!’

낙마로 인한 충격에 척추 마디마디가 박살난 느낌이었다. 잘 삶겨진 양의 척추를 붙들고 살점을 떼어먹을 때 양이 살아 있었다면 이런 기분일까.

아민은 고통에 움츠러들었다. 천운이었다. 완전히 병신이 되었다면 움츠러들 수조차 없는 탓이었다.

고개가 돌아간 아민의 시야에 폭음마다 비산하는 배와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놀란 말들은 그의 말처럼 사방팔방으로 뛰쳐나가 강을 헤엄치는 중이었고, 대혼란 속에서 병사들은 나아가지도 되돌아가지도 못한 채 방황할 따름이었다.

배와 배가 부딪쳤고 고함과 고함이 부딪쳤다.

“어전! 어전! 정신 차리십시오!”

일순 자송합의 면상이 아민의 시야에 들어왔다.

“으윽…….”

“퇴각해야 합니다!”

“안 돼!”

아민이 몸을 비틀면서 외쳤다. 낙마의 충격으로 여전히 갑판에서 몸을 비틀어대는 중상자답지 않은 외침이었다.

자송합의 면상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아민인 목부터 벌겋게 된 채로 쥐어짜듯 덧붙였다.

“돌아가면 우리는 죽은 목숨이다! 죽어도 조선 땅에서 죽어야돼!”

이번 계획에는 아민의 측근과 친위대가 모두 참여했다. 그들 모두를 잃은 채 환자가 되어서 터덜터덜 귀환했다가 벌어질 일은 뻔했다.

조카들은 신나서 물어뜯을 테고, 누르하치는 마지못한 척 죽음을 내리겠지.

아민은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구차하게 쫓기고 내몰리다가 죽을 바에야 차라리 칼 맞고 죽는 편이 낫다! 알겠나?!”

“…….”

“알겠냐고!”

아민은 격통마저 잊은 듯, 고개를 들어 자송합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실핏줄이 다 터져 붉게 물들어버린 눈동자 한 쌍이 자송합을 마주했다.

내가 당장은 일어나지도 못해 쩔쩔매고 있지만, 명령을 어긴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말로서는 장대하지만 눈빛으로는 간결했던 의지가 자송합에게 전해졌다.

“알겠습니다.”

자송합이 다시금 약속하자 아민은 숨을 토해내면서 늘어졌다.

포격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아민과 자송합이 탄 배는 용케 피격되지 않고 나아가고 있었다.

자송합은 이 같은 행운이 고작 눈 한 번 깜빡인 직후 그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잠시라도 피신할 수 있는 섬들이 많다는 것 역시 알았다. 이미 적잖은 수의 배들이 서로가 점찍은 섬들을 향해 뒤엉키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자송합은 전진을 명했다.

아민의 당부가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강 너머에서 울리는 포성 아래 분전의 소리가 깔려 있었다. 역습을 당한 건 수면 위에서만이 아니었다. 자송합은 서둘러 합류할 생각이었다. 과반의 전력이 뭍에 있었다. 생로만 뚫어낸다면, 어떻게든 다음을 도모할 수 있었다.

* * *

후금군 기병들은 저들의 특기들을 활용하고자 기동을 시도했으나, 강변은 말이 달리기에 그다지 적합한 환경은 아니었다.

젖은 모래는 푹푹 빠졌으며 자갈은 깨져나가니 성급한 마음에 박차를 가했다가 도리어 말이나 기수가 부상입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후금군의 기습이 시작되기도 전에 북방군의 역습이 펼쳐지자, 후금군은 저들의 장기인 철기를 출격했다.

포위망이 굳어지기 전에 조여드는 조선군의 대오를 분쇄함으로서, 생로를 확보함과 동시에 상황을 반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철기들이 무거운 무장으로 강변에서 고전하는 틈을 타 조선 북방군은 그간 갈고 닦았던 대기병 전술을 펼쳤다.

살수조는 늘어뜨렸던 장창을 세워 땅과 두 다리에 의지하여 버텼고, 포수들은 후금군 철기들을 집요하게 노렸다.

조준은 어렵지 않았다.

여름철 이르게 뜬 해를 받아 후금군의 철기가 은빛으로 반짝였으니까.

타타타타탕!

요란한 총성과 함께 철기들이 뒤엉켜 무너졌으나, 포수조는 사격을 그치지 않았다.

그간 실제 사격으로 다져놓은 윤방을 펼치면서 적의 철기들이 다시 일어서지도 못하게 재차 총탄을 쏟아부었다.

소 홍이포를 다루는 포병들 역시 거의 분쇄해 버린 적선들에게서 강변에 고립된 후금군에게로 포신을 돌렸다.

이따금 포탄들은 적을 적중하지 못하고 빗맞추기도 했지만, 자갈밭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포탄 맞은 자갈들이 산탄이 되어 대신 적을 찢어발겼으니까.

북방군이 쏟아내는 총탄과 포탄의 압도적인 화력은, 질주하는 재앙이었던 후금군의 철기를 말 그대로 다져버렸다.

후금군은 저들의 자부심이자 희망이었던 철기가 자갈밭 사이로 흘러내리는 핏물이 되어 돌아오자 전의를 잃어버리고 다시 압록강으로 내몰렸다.

그들이 타고 돌아가야 할 배는 포탄에 박살난 지 오래였으나 후금군의 강을 향한 퇴각은 멈추지 않았다.

병사들은 강으로 몸을 던졌다.

뒤늦게 전장에 합류한 자송합이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러 그런 병사들을 거듭 베어내고는 외쳤다.

“겁쟁이 놈들! 강에 몸을 던지는 것보다 적진을 돌파하는 게 더 가망이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자송합은 검붉게 물든 칼끝으로 강을 가리켰다.

무수한 배의 파편과 함께 강물에 휘말린 병사들이 하류로 쓸려내려가고 있었다.

“모두 기수를 돌려라! 조선군을 돌파한다!”

자송합이 외쳤다.

그는 아직 장창방진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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