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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02화 (102/380)

인조, 명군이 되다 102화

자송합은 푸른 바탕에 흑룡이 그려진 정람기 깃발을 들고서 적진을 향해 질주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지휘관이 분전하는 모습에, 후금군은 최후의 용기를 짜내어 그 뒤를 쫓았다.

선두에 서게 된 자송합은 앞서 돌격에 실패한 철기들을 마주했다.

대 금金의 자부심이었던 그들은 고철과 시체로 전락하여 흩뿌려져 있었다.

그들에게서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자송합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멀리서 꽃밭이 반짝이고 있었다.

자송합은 몽환적인 광경에 흠칫하였으나 이내 그것이 조선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색색의 꽃들은 원색의 갑주를 걸친 병사들이었고, 따사로운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건 무수한 창날이었다.

꽃밭이 아니라 검수지옥劍樹地獄이었다.

적들에 훨씬 다가간 자송합은 조선군의 기세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어디를 보아도 불시에 기습을 당한 자들의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마치 한참 전 공격을 통보받기라도 한 듯 규율에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들이 앞세운 창날만큼이나 날카로운 기세였다.

총성과 함께 검수지옥에 안개가 번져갔다.

‘헉!’

자송합은 속으로 숨을 삼켰다. 그 순간 귓전이 매섭게 뜨거워지고 바람이 칼날처럼 따가워졌다.

그리고 미지근한 것이 귀 뒤쪽으로 번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총탄이라도 지나간 모양이었다. 죽은 게 어디인가, 생각할 법도 하건만 자송합은 도리어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주변에는 그를 따라 최후의 돌진을 하던 기마와 병사들이 요란하게 떨어져나갔다. 몇 번의 초연이 나타나고 사라지자 자송합은 혼자 달리고 있었다.

‘……뭐지? 벌써 저승인가?’

자송합이 아연한 순간 고기 때리는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말이 고개를 처박으며 미끄러졌다.

그가 아직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벼락처럼 날아든 땅바닥이 자송합을 덮쳤다.

* * *

반쯤 정신이 나간 자송합은 휘청거리는 시야를 도외시한 채로 기억부터 되짚었다.

그는 기억 속에서 꽃밭을 내달리고 있었다.

열심히 질주하였으나 어디로 향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밝은 곳으로 향할 따름이었다. 오래전 그의 조상들은 하늘을 신으로 여겼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송합은 신에게로 나아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찔한 통증과 함께 자송합의 시야가 올라갔다.

자의로 일어선 것은 아니었으나, 자송합은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좌우를 붙든 조선군과 맞은편에서 본인의 안색을 살피는 장수의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놈이 아민인가? 생각보다 훨씬 젋어 보이는데.”

장수의 시선이 슬쩍 좌우를 오갔다.

“팔이 완전히 부러졌군. 양쪽 다.”

“낙마할 때 충격을 팔로 받아냈나 봅니다.”

“이래서야 살려서 보내줘도 병신 신세는 면치 못하겠군.”

자송합은 알아듣지 못할 평가가 이어지자 인상을 찌푸렸다.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붙잡힌 건가.’

자송합은 푹 고개를 떨어뜨렸다.

“별장 어른! 강변에서 아민을 찾았답니다!”

김준룡은 축 늘어진 자송합을 쳐다보았다.

가장 화려한 갑주를 걸치고서 군기까지 멘 채 돌격하기에 응당 대장인 줄로 알았거늘.

그래서 몸은 맞추지 못하고 대신 말을 쏴 생포했더니만 이놈은 대장이 아니란다.

“하는 꼴만 보면 이쪽이 더 대장 같은데.”

김준룡은 자송합을 붙든 병사들에게 손을 저어 후방으로 옮기게 하고, 자신을 찾아온 병사를 따라가며 물었다.

“아민은 뭘 하고 있었기에 강변에서 발견됐나?”

“누워 있었습니다.”

“팔자도 좋군.”

“강을 건널 때 배 위에서 낙마한 모양입니다. 거의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로잡혔습니다.”

“후금 지휘관은 병신이 되는 게 취미인가?”

김준룡이 빈정대자, 싸움으로 진땀을 뺀 병사가 자부심으로 답했다.

“북방군 앞에서만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하하!”

후금군의 악명은 압록강 일대에서 자자했다.

요동이 함락될 때 워낙 많은 유민이 지나쳐가기도 했고, 또 사르후 전투에서 처음에는 승승장구했던 명군의 기세가 빠르게 반전된 순간부터 조명의 패잔병들 역시 적지 않은 수가 강을 건너왔다.

그들이 이 주변에서 퍼뜨리는 소식과 소문들 치고 후금군의 악명(겸 명성)을 높이지 않는 게 없었다.

더욱이 임진년이 그리 먼 과거가 아니었으므로, 먼젓번에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백성들이 엉덩이를 연신 들썩거리지 않았던가.

수령들이 백방으로 진정시켰으나 백성들 중 작정하고서 평안도를 떠난 사람이 적지는 않았고, 의주부 같은 국경지대는 더욱 그러했다.

그런 고을에 주둔하고서 후금의 악명이란 악명은 다 접한 북방군이었으므로, 전투를 앞둔 시점에서는 일대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종말의 날이라도 기다린다는 양 오금을 저려댔다.

그런데 막상 붙어보니 천하의 강군이라는 후금군도 별 것 아니잖은가?

‘그러면 진짜 천하의 강군이 어느 쪽이겠냐는 거지.’

김준룡은 병사의 뻔뻔한 도취에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김준룡이 강변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도원수와 부원수, 의주부윤과 정헌대부 선지 대감 등이 다 모여 있었다.

그중 부원수 정충신이 다가오는 김준룡을 알아보고는 손을 들었다.

“아민이 여기 있다면, 아까 그놈은 자송합이겠습니다.”

“그렇겠지. 살아는 있던가?”

“두 팔이 병신이 되었지만 살아는 있었습니다.”

“다행이로군.”

적의 지휘관을 확보했다면 죽어 있는 것보다야 살아 있는 게 훨씬 유용했으니까.

중앙에서도 후금의 전면침공을 억지하기 위해 아민과 자송합은 가급적 산 채로 확보하기를 원했다.

자송합 쪽은 덤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그쪽도 살려놓아 나쁠 건 없었다.

김준룡은 지휘관들에게 합류해 한 걸음 뒤에서 늘어진 아민을 내려다보았다.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낙마하여 다쳤다는 것이 우습게 여겨진 탓일까?

자송합과 달리 그리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한 아민은 그저 비참해 보일 따름이었다. 그것을 본인도 느끼는지 무어라 떠들어댔다. 아마 죽이라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북방군은 어렵사리 확보한 적 지휘관과 중앙의 지령을 어길 생각이 없었다.

뚱한 시선이 잠시 이어지자 아민이 눈을 부릅떴다.

즉각 별장이 뛰쳐나가 아민의 입을 열었다. 그새 혀를 씹어 핏물이 흘러내렸다.

사람의 악력은 예상외로 튼튼한지라, 김준룡은 악다문 이 사이를 어떻게 벌려다 손가락을 잃느니 다소 과격하더라도 확실한 수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허리춤에 찬 환도를 풀어, 손잡이 끝으로 아민의 턱을 후려친 것이다.

빡!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아민의 눈이 살짝 풀렸다.

악다문 이가 풀렸고, 김준룡은 슬쩍 벌어진 입 안에 환도를 검집째 밀어넣고는 손가락을 쑤셨다.

꿀럭대는 핏물 사이에 잡히는 덩어리가 있었다. 혀끝이었다. 이게 기도로 넘어가면 아민은 죽는다.

냄새 나는 분홍 살점을 던져버린 김준룡은 아민이 다시 혀를 씹지 못하도록 입에 쑤셔박은 환도를 재갈 삼아 물렸다. 닫히지 못하는 입 안에서 붉은 피가 침과 뒤섞여 줄줄 흘러내렸다.

“어유, 이 독한 자식!”

김준룡은 아민의 뒤통수를 한 대 까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물러났다.

양쪽 손 모두 온통 피와 침범벅이었다.

장만이 말했다.

“고생하셨네, 중군中軍.”

도원수의 말에 김준룡은 그새 중군도 왔나, 싶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중군은 없었다.

의아하였으나 이내 아차한 김준룡이 도원수에게 허리를 숙였다.

* * *

아파태.

그는 자신의 딸을 늙고 비열한 만노蠻奴(이영방)에게 시집보낸 것이 여전히 못마땅했지만, 꼴에 유격까지 지낸 사위에게서 진귀한 물건을 진상받을 수 있었다.

천리경千里鏡이라고, 말 그대로 천 리의 원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보물이었다.

아파태는 언덕에 올라 천리경으로 강 너머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주시했다.

본래 아파태의 계획은 싸움이 지지부진해지면 부하들을 이끌고 개입하여 공훈을 세우는 것이었으나…….

조선군의 전투력은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절제된 포격으로 정람기의 일부와 퇴로가 될 배를 격멸하고는, 전 방위에서 장창을 앞세운 채 막강한 화력으로 거듭 돌격을 저지했으니까.

그리고 아민과 자송합 모두 산 채로 붙들리게 됐다.

‘이패륵의 반분도 안 되는 병력으론 뭘 할 수도 없겠군…….’

아파태가 천리경에서 눈을 떼고 기수를 돌리려는 찰나였다. 마침 그의 옆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형님?”

“…….”

아파태의 손아랫동생이자 사대패륵의 일원인 홍타이지였다.

그의 뒤로, 언덕 아래에는 족히 1만은 될 법한 수의 기병들이 흰 깃발을 휘날리며 몰려들고 있었다.

압도적인 양백기鑲白旗의 위용에 그들보다 반분의 반분조차 되지 않는 아파태의 친위대는 대립조차 못하고 슬금슬금 말을 물렸다.

아파태는 다시 홍타이지를 바라보았다.

홍타이지가 말했다.

“형님. 어째, 파고 들어갈 구석이 보입니까?”

“…….”

아파태는 답하지 못했다. 홍타이지는 개의치 않다는 듯 제 형이 늘어뜨린 천리경을 의식하고서 태연하게 청했다.

“잠시 빌려 볼 수 있겠습니까?”

사양할 도리는 없었다.

아파태는 자신이 천리경을 두 손으로 받쳐서 바쳐야 하나 고민하였으나, 평소 동생을 질시하던 마음과 제 자존심을 이기지 못하여 한 손으로 쓱 내밀었다.

홍타이지는 마찬가지로 개의치 않아하며 천리경을 받아들여 강 너머를 살폈다.

“흐음!”

홍타이지는 짧게 감탄했다.

아민이 비록 서열에 맞지 않게 사대패륵 중에서는 세력이 가장 약했다고는 하나 엄연히 정람기의 주인.

그가 데려간 15개 초라면 능히 원정도 할 수 있는 규모다.

그런데 조선군 상대로 변변한 저항조차 못 하고 모조리 시체로 전락해 나뒹굴었으니 저들의 전투력을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띄는 건 사람의 신장보다 배는 긴 장창이었다.

홍타이지는 직접 전투 장면은 보지 못하였음에도 조선군이 장창으로 어떤 진형을 갖추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조선을 공략해야 한다면 장창의 공략법 역시 마련해야 할 터.

그러나 당장은 홍타이지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잘 썼습니다.”

홍타이지는 동생으로서 예를 다 하겠다는 듯 두 손으로 받쳐 천리경을 건넸다.

아파태는 그런 동생의 태도가 꺼림칙한 얼굴로 천리경을 받아들였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더는 볼 일이 없어진 홍타이지는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본디 홍타이지는 사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어부지리를 한 층 더 위에서 취하고자 양백기의 군세를 급하게 끌어온 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때도 방편도 적합하지 않았다.

아민의 정람기는 이미 다 죽어 나자빠졌고, 아파태는 그 광경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장창의 파훼법 역시 아직은 미진했다. 나자빠진 정람기 곁에 양백기를 포개놓을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은 물러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후금 전체의 전력을 이용해야 할까?

어차피 이 나라는 그의 것이 될 터이므로, 필요만 있다면 응당 그리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조선은 당장 파훼법이 떠오르지 않는 장창을 앞세운 채로 국경을 철통같이 수비하고 있었다.

중원에 비해 그리 먹을 것도 없는 조선을 무리해서 정복한다면 이익보다는 손실이 훨씬 더 클 터. 그러면 산해관 너머는 지금보다 더욱 멀어지게 된다.

‘머리를 잘 썼어.’

소국이 살아가는 방법은 고슴도치가 되는 것이다.

고슴도치란 먹을 것도 없으면서 함부로 문다면 도리어 제 입만 다치고 마는 생물이다.

지금 조선의 형세가 과연 그러하였으니, 섵불리 손 댈 수야 있으랴?

하지만 고슴도치도 천하무적은 아니다. 맹수도 굶어 죽을 상황에 이른다면 입이 다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고슴도치의 고기를 얻을 수밖에 없다.

맹수가 압도적으로 강해 고슴도치의 가시를 신경 쓸 필요가 없어져도 마찬가지다.

홍타이지는 과연 조선이 어떤 신세에 놓일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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