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03화
누르하치는 고민에 빠졌다. 그렇지 않을 수 없었다. 조카가 일군을 끌어다가 무턱대고 이국에 들이박았으니까.
차라리 성과를 내었으면 모른다. 과는 공으로 덮으로 수 있다.
하지만 정백기의 실질적인 전력을 모두 망실하고서 자신과 이복동생은 포로가 되어 붙잡혀버렸으니 문제였다.
‘이놈 때문에 군사는 군사대로 잃고 체면은 체면대로 망신당하는구나…….’
그렇다고 나서자니 명분이 없었다.
조선은 아민의 지속적인 도발에도 충돌을 지양해왔으니까.
그간 아민이 억눌러왔을 야망과 그것이 분출되었던 최근의 행보, 그리고 충돌 직전 시의적절하게 소집된 군사, 그리고 일부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른 당시 아민의 과격한 모습과 미리 준비되었던 선박들을 조합해보면…….
현 상황이 벌어진 데 과오를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너무나도 분명했다.
전쟁을 일으킬 명분도 없고, 설령 무리해서 복수를 외치더라도 패륵과 패자貝子들은 시큰둥할 게 분명했다. 저들을 견제할 용도로 이패륵에 꽂아둔 사촌의 죽음 따위 복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탓이다.
‘저들끼리 모여 이제야 굴러들어온 돌이 나가떨어졌다며 잔치라도 벌이면 모를까.’
지지받지 못할 명분을 끌어다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면, 설령 한이라도 자신의 권위를 시험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최근에는 패륵들에게 자기 사후 금나라의 통치 방식을 전교하지 않았던가?
저들 사이에서 가장 현명하고 합리적인 패륵을 한으로 추대하되, 만약 독단적으로 행동하여 분란을 일삼는다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라고. 교체를 거부하면 폐위하라고.
덕분에 못난 자식들은 빤한 눈총을 아비 대신 형제들을 향하게 되었으나, 이 전교로 누르하치 역시 자신의 권위를 일부 자식들에게 나눠주게 된 셈이었다.
자신 사후라고 전제하였으나, 발언한 저조차 존중하지 않을 전교를 기고만장한 불효자들이 따를리 없기 때문이다.
결국 누르하치도 본인의 발언에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전쟁이 아니라, 사신을 보내 못난 조카 놈을 돌려 보내달라고 애걸해야 할 판이다…….’
그래야 아민이 싸지른 똥을 수습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 자식들이 내켜 하지 않는 분위기에도 아민이 억지로 이패륵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던 게 누구 덕이던가?
그런데 이패륵의 권위를 남용하여 아민이 제 이복동생과 사이좋게 무단으로 이국을 침공하고 정람기를 파탄내었으니, 책임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누르하치도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불효자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이를 조금이라도 만회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민과 지르갈랑(자송합)의 신변을 확보하여 자신의 손으로 엄벌을 내리는 것.
누르하치 딴에는 아직 아민을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처벌의 수위는 사실상 패륵과 패자들이 결정하게 될 거다.
그러나 누르하치도 이번만은 타협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누구를 지키기 이전에 자기 자신부터 보호해야 했으니까.
한참을 고심하던 누르하치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불효자들과 공신들이 초유의 소동을 맞이하여 왕좌의 좌우에 시립해 있었다.
덩그러니 비워진 이패륵의 자리가 유난히 따갑게 느껴졌다.
“사정이야 다들 알고 있을 테니 길게 말하지 않겠다.”
굳이 말해봐야 망신만 더 당하는 꼴이다.
“아민이 죽지 않고 사로잡혔다지? 그놈은 죽어도 이곳에서 죽어야지, 조선에서 죽는다면 금의 위신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꼭 위세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아민은 무려 이패륵이다.
실제 서열이야 어떻건 명목상 금나라에서는 누르하치와 대버일러 대선代善(다이샨) 다음가는 존재다.
그런 인물이 조선 땅에 멋대로 기어 들어갔다가 목이 달아났다는 소식이 퍼진다면…….
망신도 망신이지만 명나라의 기세는 또 얼마나 오를 것인가?
중원을 소망하는 누르하치와 금나라로서는 더더욱이 안 될 일이었다.
그러니까,
“누가 조선으로 가겠느냐.”
전쟁은 불가하다. 누구도 목숨 걸어 아민을 구출하기도, 복수하기도 원치 않는다. 누르하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 애걸하여서 아민을 되돌려받는 방법밖에는 없다.
“…….”
누르하치의 발언에도 패륵과 패자, 공신들은 고개만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아민에 대한 감정은 차치하더라도 명나라마저 꺾으며 날고 긴다는 금나라의 권력자들이 약소한 솔호(고려)를 찾아가 고개 숙인다는 건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자존심 상해가며 임무를 완수해 봐야, 모두에게 눈엣가시였던 아민을 살려서 데려왔다는 빈정이나 당할 뿐이다.
그러니 누르하치의 안색이 변해가도 다들 못 본 척할 따름이었으나…….
“제가 가겠습니다.”
홍타이지가 나섰다.
“네가?”
“예.”
누르하치는 시립한 신하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홍타이지 외에는 눈치껏 나서주는 인간이 없다. 모조리 불효자에 왕을 우습게 아는 놈들이다.
홍타이지는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다.
서열 1위의 대패륵을 지내는 자는 따로 있지만, 정작 철이 너무 없었으니까. 제 가족도 포용하지 못해 자식들이 명나라로 망명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런 얼뜨기 머저리를 후금의 주인 자리에 앉힐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나라 망하지.’
대선이 대패륵을 지내는 건 실상 아민이 이패륵을 지내는 이유와 정확히 같았다.
그러니 사대패륵의 서열은 실상 뒤집힌 셈으로, 누르하치의 눈에는 이러한 사정도 모른 채 아민을 예전부터 규탄해온 패륵과 패자들이 더더욱 못나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개중에서 그나마 사람 같은 게 홍타이지였으므로 누르하치는 그를 후계자로 점찍어놓은 것이다. 문제는, 그래서 홍타이지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점.
‘저놈이 조선에 갔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누르하치가 홍타이지의 자원에 선뜻 응하지 못한 이유였다.
“비록 떳떳하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지만, 죄인을 구명하기 위해 너 같은 사람의 서열이 나선다면 마찬가지로 망신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마침 떠오른 사람이 있었던 누르하치는 적당히 둘러대고는, 조용히 찌그러져 있는 제 못난 자식들 중 하나를 바라보았다.
“마침 이중에는 이미 조선을 다녀온 경험이 있고, 나의 자식으로서 요청의 위중함을 증명할 적임자가 있다.”
“…….”
제 발 저렸던 아파태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누르하치와 눈을 마주쳤다.
“…….”
“네가 다녀와라.”
“……예.”
한의 명령을, 패륵도 무엇도 아닌 일개 자식이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명령을 따라야 할 이유는 오직 그뿐이었으므로 아파태는 머릿속으로 온갖 저주와 탄식을 쏟아냈다.
조선행도, 아민을 살리러 간다는 목적도 모두 내키지 않았으니까.
조선과는 서로 이용하는 관계라지만, 첫 만남에서는 제대로 구워삶아져 코가 꿰인 아파태였다.
따지자면 아직도 꿰인 상태다.
증거는 없다만 조선은 군주와 대신들이 자신이 홍타이지를 비방하는 것을 들었으니까.
상황만 적절히 갖춰진다면, 누군가를 숙청할 때는 증언만으로도 충분했다.
갔다가 팔자가 어떻게 더 꼬일지 누가 알겠나.
더욱이 자신이 차도살인한 아민을 조선에서 데려와야 한다는 것 역시 내키지 않았다.
이만하면 아민 역시 자신의 계획에 놀아났다는 것을 깨달을 법도 한지라, 살려놓는 건 둘째 치고 돌아왔을 때 무슨 소리를 지껄일지 몰랐던 탓이다.
‘……몰래 죽일까?’
아파태는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결심을 굳히지는 못했다.
누르하치의 앞은 다른 생각에 계속 빠져 있을 만한 장소가 아니었고, 자신의 심정은 너무나 복잡했으니까.
* * *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아파태 등이 두 사람의 처우를 두고 저마다 골머리를 썩이는 동안.
사태의 원인인 아민과 자송합은 한양까지 호송되어 의금부 조옥詔獄에 수감되어 있었다.
살려서 후금으로 돌려보내야 할 자들이라고는 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나라의 변방을 침공한 장본인들.
우대는 당연히 없었으며, 연명에 필요한 치료와 식사만이 적정하게 제공되었다.
마치 지금처럼.
“먹어라.”
식사 때가 되었는지, 이전과 마찬가지로 누군가 창살로 다가와 주먹밥을 내려놓았다.
그 광경에 자송합이 아민의 앞으로 나아가 등을 대고서 앉았고, 아민이 어깨를 붙들자 일어나 주먹밥이 놓인 곳으로 향했다.
아민은 다리를 쓰지 못하고 자송합은 팔을 쓰지 못했다. 번거롭지만 이것이 그들이 연명하는 방식이었다.
아민은 주먹밥을 챙겨 먼저 동생을 먹인 뒤 자신의 배를 채웠다.
그리고 물대접을 기울여주고 기울여서 입가심하니, 식사를 가져 온 관리는 만족하고서 그릇과 대접을 챙겨 돌아갔다.
‘굶어 죽을 생각은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아민이 속으로 생각했다.
기실, 그는 이렇게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먼저 죽어버린다면 팔을 쓰지 못하는 이복동생 역시 뒤따라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내색하지 않고 연명을 감수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송합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리라.
구차하게 연명하고픈 의사는 없으나 자신이 죽어버린다면 이복형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고.
“…….”
두 사람의 시선이 일순 교차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복형제가 신세를 망친 뒤로 과묵해져서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의 생각을 읽었고 그래서 침묵했다.
식사를 마친 다음은 자유시간이었다.
비록 신체적으로나 공간적으로는 자유와 거리가 멀었지만, 시간적으로는 그러했다. 창살 너머로 주시하는 간수들 역시 굳이 귀찮게 굴지 않았다.
‘밥을 가져다 주는 놈과 같은 목적이겠지.’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아민을 불편하게 만들이었다.
조선은 그와 이복동생의 목숨을 어떻게든 연명할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별다른 조처는 없어, 의도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적당한 값을 받고 다시 보내려는 거겠지.’
그리고 금나라에서 두 사람을 맞이할 운명이란 파멸밖에 없었다.
만약 사지가 멀쩡하였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서든 탈출을 도모했으리라.
모든 군사를 잃어버린 채 몸뚱이만 남아 조선 땅을 배회해 봐야 잘 되어도 산기슭 따위에 숨어 전전긍긍 목숨을 연명할 신세요, 그조차 못 된다면 굶어 죽겠으나 지금 신세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애초에 아민이 강 너머에서 진정으로 찾으려던 건 독립이었다. 자신만의 왕국을 만드는 건 부차적인 목표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쪽도 누리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탈출조차 도모할 수 없는 신세였다.
사지가 멀쩡하여 탈출은 쉽지 않을 텐데 두 다리가 병신이 되었으니까.
다가오는 숙명을 가만히 앉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다가오는 발소리에 아민이 고개를 돌렸다.
그간 들어온 간수나 식사를 가져오는 하급 관리의 발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과연 아민은 새로운 인물을 눈에 새길 수 있었다.
그는 붉은 바탕에 금실로 용을 수놓은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정체를 짐작하기 그리 어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