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04화
죄인들은 저마다 구석을 하나씩 차지한 채 처량한 낯을 하고 있었다.
먹는 것이 부족하지 않았을 텐데도 무척이나 수척해 보였고, 문화 특유의 머리 모양도 정리가 안 되면서 더욱 지저분해졌다.
‘스님을 길거리에 보름쯤 내놓으련 이런 모습이 되려나?’
확실한 건, 당장 두 사람의 몰골이 온 중원을 떨게 한 팔기군의 지휘관들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정녕 이들이 아민과 자송합이 맞답니까?”
동행한 영의정이 답했다.
“현지 관리들이 포로 및 귀화인들을 통해 거듭 검증하였으니 옳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믿을 수밖에 없겠군요.”
북변은 전투 이후에도 최고 수준의 경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후금의 추가적인 공세 징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이 물리력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아민과 자송합을 데려갈 방법은 하나뿐이다.
“머지않아 사신을 보내겠지요?”
“그럴 것이옵니다.”
“아민과 자송합을 심문할 여유가 많지 않겠습니다.”
나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과연 이들이 후금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
누르하치의 권위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군사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아민이나 자송합은 그리 충성스러운 인물이 아니라는 게 증명됐다.
더욱이 모든 것을 걸어 시도한 원정마저 참패로 돌아갔으니…….
두 사람에게는 더 이상 지켜야 할 게 없었다. 군사는 물론이고, 권력도 마찬가지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쉽게 무모해지지.’
나는 이원익에게 당부했다.
“저들을 존중해준다면 쓸만한 정보를 많이 얻어낼 수 있을 겁니다.”
“이들은 감히 아조를 침공한 죄인들이옵니다.”
존중은 당치 않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죄인이기도 하지요. 출신과 과오 때문에 후금에서는 누구도 반겨주지 않을 겁니다.”
대신 아민과 자송합은 그들의 마지막이 될 형장을 향해 미리 정해둔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나갈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존중이 더욱 각별하지요.”
더는 누구도 이들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은 죄는 공을 세워 덮으라고 하세요. 아민은 후금에서 대패륵 다음가는 서열을 보유했으니, 조선에 공을 세울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보다 민감한 군사기밀.
보다 민감한 내부사정.
조선이 후금 상대로 이용할 수 있는 정보라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환영이다.
“만약 죄수들이 과분한 대접에도 감사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겠사옵니까?”
“그건 그때 가서 논의해봅시다. 결과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우리의 창의력을 미리 시험할 필요는 없지요.”
아민이 충동적인 행동으로 파멸을 자초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죽지 않고 잘 버텨왔다는 점에서 그리 우매한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목숨만 붙여놓고 있다가 사람 대접을 해준다면, 목 위에 붙여놓은 게 투구 거치대가 아닌 한에야 무슨 의도인지 금방 알아채겠지.
나의 시선에 아민은 긴장한 눈으로 마주보았다. 무언가가 달라질 거라는 걸 이미 직감한 모양이다.
거 봐, 바보 아니라니까?
* * *
아민과 자송합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고서, 나는 간만에 자발적으로 자유 시간을 가졌다.
아직 처결이 필요한 일감이 많다만, 한참동안 온 나라가 긴장 상태였어서 말이지. 밤낮으로 일거리가 그치지 않았던지라 사람이 거의 폐사 직전까지 몰린 참이었다.
요절할 생각은 없으니 소란이 그친 김에 냅다 쉬어야지.
그리 결심을 세우고서 찾아간 곳은 나의 오래된 악우라 할 수 있는, 양어머니의 거처였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일에 치인답시고 뻔뻔하게 문안을 걸러왔다가 간만에 인사 올리니, 대비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다행히 그간에는 강녕하였소. 이제부터는 아닐 것 같고.”
가슴 따뜻해지는 환대를 받으며 자리하니, 한쪽을 세운 대비의 무릎팍에는 비단보가 늘어져 있었다.
“바느질 중이셨습니까?”
“그렇소.”
“이번에는 무엇을 만들고 계셨는지요.”
“손주 남바위요.”
“대비마마…….”
남바위는 방한용 모자다.
“지금은 여름입니다.”
“알고 있소.”
나는 검지를 세워 흔들어 보였다.
“이게 몇 개로 보이십니까?”
“하나요, 주상. 그리고 내가 정신이 이상해져서 계절 분간을 못 하는 거라면 오해요.”
“대비마마의 기체 강녕하시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만, 그런데 왜 초여름에 겨울용 방한 모자를 만들고 계십니까? 이래서야 제가 오해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여름용 옷은 이미 다 지어놔서 그렇소.”
대단한 내리사랑이어서 인간적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 어느 대비가 손주 입을 옷을 직접 만들까?
세자 사랑이 지극한 나조차도 옷까지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나의 사랑이 대비의 사랑보다 꿀리냐면, 그건 아주 당연하게도 아니다마는.
대비가 말했다.
“변방을 어지럽힌 적 수괴들을 사로잡았다고 들었소만?”
“노적의 동생인 서이합제(슈르하치)의 두 자식을 사로잡았습니다. 한 놈은 후계자인 아민이고, 다른 놈은 아민과 함께 군권을 보유한 자송합이라는 놈이지요.”
“아민이라면, 노적과 함께 후금을 다스리는 네 오랑캐 중 한 놈이 아니요?”
“그렇습니다.”
대비는 반색하고서 말했다.
“경하드리오, 주상. 것 보시오. 내가 일전에 말하지 않았소? 과하게 염려할 일은 아니라고 말이요.”
과하게 염려한 덕에 막아낸 거다마는…….
정묘호란이라는, 이제는 사라져버린 역사까지 끌어와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열심히 준비했고 결과는 그것이 충분했다고 증명해주었다. 순수하게 기뻐해도 좋았다.
“아민을 쓰러뜨리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고 짐작은 했습니다. 진정으로 어려웠던 건 그동안의 준비였지요. 대비마마께서 들어보신다면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정치적인 영향력이 사라진 탓에 잡혀온 후금군 지휘관이 아민이라는 것도 몰랐던 대비다.
오늘날의 결과만을 위해 내가 음지와 양지를 막론하고 쏟아부어온 정성이라면 더더욱 알지 못하겠지.
양쪽 다, 대비의 능력 결여 때문이라기보다는 손주 생각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만…….
덕분에 대비가 모르는 만큼 쏟아낼 이야기도 많았다.
마침 대비도 응해주었다.
“주상께서는 어지간하면 나랏일은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데, 내게 거리낌없이 밝히는 걸 보니 꽤 자신이 있으신 모양이오?”
“흥미진진하게 해 드릴 자신이라면 꽤 있습니다.”
“해 보시오.”
“그럼……, 대비마마께서는 부담 갖지 마시고 계절 이른 남바위를 마저 지으시지요. 그동안 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불효자 한석봉韓錫琫은 모친이 위험하게도 불을 끈 채 떡을 써는 동안 자기 글씨나 연습했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인 나는 다르다.
대비가 작업하는 동안 덜 심심하도록 배경음을 깔아주겠다는 거지.
“그러면 주상의 말에 집중하기 힘들 텐데 말이오?”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시는 것도 좋지만, 하던 일을 방해하는 것도 편치는 않습니다.”
대비가 빙긋 웃었다.
“주상이 그리 말씀하시니 사양하지는 않겠소, 그럼.”
“너무 재미있다고 정신이 팔려 또 바늘에 찔리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유의하겠소이다.”
대비는 곁으로 밀어두었던 반짇고리를 다시 가져왔다. 나는 그간 훅므의 침공을 방비한다며 한 갖은 고생들을 늘어놓았다.
다소 과장이 들어간지라 대비는 분주하게 손을 놀리면서도 피식피식 웃거나 촌평을 곁들였다.
작년 이맘때 석어당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상상도 못 할 변화였다.
나와 대비는 여전히 족보로 만들어진 어색한 관계로, 여느 가정의 모자 사이 같은 사랑은 없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우리는 경쟁자이자 동지가 되었다.
한없이 내리사랑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정도 우애쯤은 충분히 가져도 된다.
* * *
“그래, 아민에게서는 무엇을 배웠느냐?”
의금부의 조옥을 다녀온 세자가 고했다.
“친족간의 우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 충동적으로 행동하면 신세를 망친다는 사실을 배웠사옵니다.”
“아민이 신세를 망친 계기는 세자가 말한 바를 간과했기 때문이지만, 단지 그것으로 그친다면 교훈은 단면적으로 그칠 것이다.”
예로부터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했다.
“아민이 친족들과 다투게 된 것과 그 같은 지위에 있음에도 충동적으로 강을 넘게 된 이유를 단순히 그의 품성에서만 찾으면 안 된다. 아민의 삶은 압록강을 넘기 전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
“그의 삶을 차근차근 상고해보면 훨씬 다양한 교훈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세자가 깍듯한 대답과 함께 꾸벅 허리를 숙였다.
내가 이처럼 첨언한 이유는, 세자의 대답이 어째 나도 저격하는 느낌이어서는 절대로 아니다.
절대로…….
‘식충이 같은 종친 놈들의 호주머니야, 당연히 털어버릴 수도 있는 거지!’
어째서 어머니들이 자식이 받은 세뱃돈을 통장에 넣어주겠다며 가져가는가?
자신의 용돈으로 삼기 위해서?
아니잖은가.
나도 마찬가지다. 좋은 데 써야 하는데 엄한 데 낭비할까 봐 대신 관리해 주는 거지.
‘좋은 데 쓴다니까?’
덕분에 아민의 침공도 수월하게 막아냈잖은가.
단지 다시 돌려줄 생각이 없을 뿐이다.
……아무튼.
“영의정은 아민이 불복종하지는 않으나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도 않는다고 하던데, 직접 보니 어떻더냐?”
이원익이 그리 말할 정도라면 아민의 태도는 중간보다는 비협조적인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니 얼굴이나 보자 싶어 찾아간 뒤로, 다시 의금부를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자에게 확인차 물어보았다.
“아민이 말은 아꼈으나, 크게 상심한 탓이지 대화를 거부하지는 않았사옵니다.”
“그래?”
“예.”
“아민은 세자가 자신의 처우를 결정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구나. 당분간은 영의정의 일을 도와주거라.”
이 애비는 쉬기 바쁜지라 의금부에 행차할 여유가 없구나…….
“알겠사옵니다.”
세자에게 일감을 떠넘기고는, 활을 전해받았다.
일전에 세자와 함께 활쏘기를 연습하다가 못된 병조판서 김신국의 훼방을 받아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만회하고자 다시 만든 자리였다.
‘그래놓고 막상 훈계질을 해버렸다만…….’
나도 똑같이 세자에게 훈계 좀 받고 말지.
아비가 왕업으로 학대당하는 동안 세자는 육례를 더욱 갈고 닦았다.
그리고 세자가 원체 총명하여서 금방 배우는 만큼, 활 실력도 막 시작한 것치고 상당히 비상한지라 아비를 가르치고도 남았다.
“활을 이렇게 당기는 게 맞으냐?”
“조금 더 높이 들어야 하옵니다.”
“이렇게?”
“아, 팔은 더 들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대신 화살의 기울기를 의식하시옵소서.”
“이, 이렇게?”
손은 나의 손이되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세자에게 훈수 좀 들어보겠답시고 만작한 채로 버티니 힘이 달려서 어깨와 팔꿈치, 팔목의 축이 제각기 따로 놀면서 활이 흔들렸다가 휘청거렸다가 염병을 떨었다.
쉭!
견디지 못해 시위를 놓으니, 분명 표적은 가만히 있는데 화살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
멋쩍은 마음에 세자 눈치를 보니, 세자는 입술을 안쪽으로 잔뜩 말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잔뜩 떠올랐지만 아비에게 잔소리할 수는 없으니 그렇게라도 자제하겠다는 것일까.
귀여운 모습에 가상한 발상이었다.
딴에는 민망했지만.
“크흠, 흠. 다시 해보자꾸나.”
그러고 새로운 화살을 시위에 거는데 불청객이 찾아왔다.
“전하.”
승정원의 만년 도승지 이덕형이었다.
“의주 부사가 치계하기를, 국경에 후금의 사신이 방문했다고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