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05화
재차 의주를 방문하게 된 아파태는 찌푸린 눈으로 거리를 훑어보았다.
아민의 정람기가 성과 없이 몰살한 탓일까.
‘막 싸움이 있었다는 걸 인지조차 못 한다는 양 태평하군…….’
아무리 아민의 몰락을 바랐다지만, 그래도 사대패륵의 일원과 팔기의 일각이 몰락하면서까지 벌인 일을 중원의 변방쯤으로 여겼던 조선에서 시큰둥하게 받아넘기니 아파태는 제 자존심마저 상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알아 이 같은 아파태의 흉중을 읽는다면 ‘이놈은 해달라는 대로 해줘도 지랄이야.’ 하고 평했겠지만 말이다.
다행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나마 아파태에게 날카로운 사람이 있었다.
“이번에는 어디 도망가지 않기를 바라겠소이다.”
의주부윤 이경직이었다.
그의 태도가 날카로운 건 아민의 침공 때문이 아니었다.
오래전 아파태가 최초 조선을 방문했을 적, 아파태는 저 혼자 왕을 보겠답시며 의주를 탈출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한양에서는 대단한 소동이 벌어진지라, 결과적으로는 세자 덕분에 위기를 기회로 이용했다지만, 그것이 이경직의 공훈은 아니었던지라 그를 향한 규탄이 끓어올랐다.
거기다 후금에서는 저들 왕이 보내는 선물을 감히 접수하지 않느냐며 겁박하고 핍박하니 이경직은 고래 사이에 낀 새우 신세가 되어 앞뒤로 두들겨 맞아야만 했다.
덕분에 한동안 신경쇠약으로 제정신이 아닌 채 살아온 이경직이다.
오죽하면 50년 세월 동안 들어가지는 않고 늘어나기만 한 뱃가죽이 몇 달 사이 쏘옥 들어갔을까.
그러다가 아민의 정람기가 진탕나는 데 일조하면서 정신적인 피해를 크게 덜었지만, 재차 아파태의 면상을 보니 이경직은 심병心病이 재발하는 기분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무단으로 탈출을 꾀한다면, 아니 그럴 낌새라도 보인다면 그대 족속들이 죽어나간 강변으로 데려가서…… 이익, 똑같이 대가리를 터뜨려주마!”
이경직이 갑자기 발작 온 사람처럼 일갈하자 아파태는 당황해서 답했다.
“이보시오. 나 때문에 감정이 많이 상했다는 건 알겠지만 이번에는 절대 그럴 일 없으니 진정하시오.”
“뭐어……, 진정? 어디 내가 진정으로 진정하는 꼴 보시겠소?!”
그리고는 금방이라도 후려칠 것저럼 마편馬鞭을 추켜드는데, 아파태는 이경직이 보통 미친 게 아니라는 생각에 얌전히 입을 닫고 움츠러들었다.
다행히 마편이 휘둘리기 전 이경직과 동행한 판관이 상관을 만류했다.
“이만하면 호차도 경고를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더 마음 써주지 마시고 돌아가시지요.”
“흐우……, 흐우!”
“자아, 자. 노기를 가라앉히십시오. 부사께서 저놈 때문에 고생하신 바야 누가 모르겠습니까?”
판관은 부들대는 이경직을 애써 진정시키며 함께 객사를 빠져나갔고, 그 광경이 과연 범상하지는 않았던지라 아파태는 오해받을 행동은 삼가기로 결심했다.
‘자칫 자다가 칼 맞을지도 모르겠군…….’
어차피 무단행동은 불가능한 신세였다.
한에게서 직접 명받은 일이 있는데, 어떻게 무단행동으로 조선의 심기를 거스를까.
더욱이, 그동안 조선과는 피차 이용해온 관계라지만 아민의 몰락으로 서로 볼일은 없어졌다.
그에 반하여 아민의 기습 침략으로 원래 멸시받던 신세에서 더욱 미운털이 박혔으니, 우활하여 미운털 위에 미운털을 또 박는 기예까지 선보였다간 아민의 옆방에 들어살 수도 있었다.
‘한이 자원한 홍타이지 대신 나를 찍어 보낸 것도 그 때문이지.’
누군가 아민과 감옥 동기가 되어야 한다면, 가장 유력한 후계자보다는 번듯한 자리 하나 없는 곁가지나 훨씬 나을 테니까.
썩 기분 좋은 대접은 아니었다.
한의 명령이라 거절할 수 없고, 패륵에 조만간 공식이 날 것을 의식해 마지못해 따를 뿐.
아파태는 한도 싫고 홍타이지도 싫었다.
아파태는 객사에서 고분고분 지냈다.
달리 이목 끌지 않고 주는 밥만 타먹으며 조용히 조선 조정의 답신을 기다렸는데, 이경직은 안도하지 못하는지 하루에도 몇 번 직접 객사를 확인하고 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경직은 얌전히 있는 아파태에게 안심하면서도 은근히 실망한 눈빛을 보냈는데, 이경직의 경고를 기억하는 아파태로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보름이 자났다.
후금과 조선 양국 관계에서 아쉬운 쪽이 달라진 덕인지 조선은 사신의 입장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 같은 조정의 뜻을 받아든 이경직은 호위를 빙자한 감시 인원을 잔뜩 붙여두고서 첨언했다.
“호차가 지시에 응하지 않으면 즉각 사살해 버려라!”
참으로 마음 따뜻해지는 환송이었다.
* * *
아파태가 감시 겸 안내를 받으며 남행할 즈음에는 계절도 성숙해져 있었다.
조선의 여름은 요동과는 달랐다.
아파태는 반들반들한 대머리만 아니라 내용물까지 노상에서 익어가는 고통을 겪었다.
‘이래서 조선인들이 항상 모자를 쓰고 다니는구나!’
그리고 모자를 쓰지 못한다면 머리라도 묶여 올려 흉내나마 내고자 하니, 이는 습속이 이상하여서가 아니라 두피가 타는 고통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특유의 변발은 한 아파태는 두피를 감쌀 머리칼이 없었다.
덕분에 아파태가 한양에 도착할 즈음에는 두피가 얼굴보다 더 붉게 변해버렸다.
주간에는 작열하는 햇빛을 내리쬐다가 2도 화상을 입고 야간에는 그로 인한 가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수시로 긁어댄 탓이었다.
그렇게 붉은 계란이 되어 수도에 입성한 아파태는 곧장 한양 주민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일각에서는 아파태의 모습에 홍이포의 원형이라는 홍모이紅毛夷가 실은 아파태처럼 대머리가 붉게 달아오른 오랑캐를 말하는 게 아니겠냐는 이론을 전개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짐승도 아니고 사람 털이 붉을 수야 있겠는가?
아무튼, 객사에 도착한 아파태는 여장을 풀고 버릇처럼 두피를 혹사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대鏡臺를 찾았다.
그리고 대경실색했다.
“허억……!”
이미 선홍색으로 달아오른 두피는 손톱 지나간 자리마다 붉게 물들어서 참으로 흉측한 몰골이었다.
“어쩐지 가는 곳마다 조선인들이 빤히 보더니만!”
생소한 모습일 외인을 구경한 게 아니라, 볼썽사나운 대머리를 구경한 것이었다.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아파태는 두피에 물수건을 얹은 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간지러움을 찾았다.
그리고 내일 조선왕을 배알할 생각에 갑갑해졌다.
만약 이 머리를 하고서 어전으로 나아간다면, 세인의 구경거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라망신까지 이어질 수 있는 탓이었다.
* * *
“허어, 참.”
좌의정 박홍구가 감탄 반 당혹 반으로 탄식했다.
후금이 사신을 보냈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신이 갓을 쓰고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마찬가지로 왕 역시 예상치 못한 광경에 놀라 물었다.
“사신께서는 갓을 쓰고 오셨군요.”
“……예에. 소관이 예전부터 조선의 드높은 문화를 흠모해 왔던지라, 그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갓을 쓰고 입조하였사옵니다.”
통사가 아파태의 말을 전하자 좌우에 시립한 신하들이 제각기 수군거렸다.
말이야 그럴싸하나 진정으로 조선의 문화를 흠모했다면 상투도 없이 변발에 호복 차림으로 갓만 덜렁 쓰고 올 이유는 무엇인가?
하지만 아파태의 차림새가 워낙 황당하여 다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으므로, 본인의 말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어전에서 시답잖은 문제로 의견이 상충하여 잡설로 시끄러워지니 왕은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나와 신하들의 집중을 일부러 방해하려고 광대 같은 짓을 하는 건가?’
갓 안쪽의 상태를 보지 않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추측이었다.
어쨌거나 사신의 의도가 정녕 그러하다면 이처럼 주의를 빼앗기는 건 용납하지 못할 일인지라, 왕은 손을 들어 좌중의 소란을 가라앉혔다.
“사신은 용건을 말씀하세요.”
“예에……. 다름이 아니오라, 금국 전하께서는 근자 양국의 국경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사건에 매우 깊은 유감을 표명하셨으며, 죄인에게 적절한 처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환송을 요청하였습니다.”
외교적 수사로 점철된 전언이었다.
누르하치가 서신 한 장 없이 이처럼 뜻을 전달한 건, 선진적인 외교법을 깨우쳐서가 아니라 자신의 위신을 보호하고자 최대한 책임소재를 부정하기 위함이었다.
사르후 전투의 완승과 요동의 확보로 딴에는 저들이 명나라와 거의 대등하다고 믿을 누르하치와 후금이다.
그래서 옛 원나라 황실의 옥쇄를 차지하기 무섭게 칭제건원하였던 자들 아니냐.
그런데 명나라의 곁가지쯤으로 여겼던 조선 상대로 잘못을 시인하고 아쉬운 소리를 하려니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확실한 기록으로 남을 서신이 생략된 것도 그 때문이겠지.’
이에 영의정 이원익이 말했다.
“아민과 자송합은 귀국에서도 서열 높은 자들로서 일군一軍을 함께 지휘하였는데 그대의 주인은 이들의 침공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말하니 당혹스럽소.”
“그래서 더욱 죄인들을 돌려받으려는 것입니다. 적절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서열 높은 자들도 기강이 해이해져 경거망동하지 않겠습니까?”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들 중 하나가 또 침공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들리는구려.”
이원익이 불쾌해다는 투로 따지자 아파태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어찌 폐방의 신세로 귀국을 겁박하겠습니까? 다만 그만큼 국내의 기강을 세울 필요가 절실하다는 뜻을 아뢰기 위함이었을 뿐입니다.”
“허어!”
이원익은 탄식하고서 말했다.
“그대의 주인은 부탁하는 처지임에도 예의를 다 갖추지 않고, 먼저 죄를 저질렀음에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부하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함을 인정하지 않는데, 하물며 아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죄인들마저 저들이 처벌하고 싶으니 달라는 건 무슨 배짱이오?”
낯뜨거운 지적이 이어지자 아파태는 얼굴이 빨갛게 되어서 답했다.
“이웃과 화친하지 못하고 도리어 미편하게 하고서 죄인의 인도를 청하게 되었으니, 어찌 금국 전하께서도 지적하신 바를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아타패는 동행한 수행원들에게 팔을 뻗었다.
이에 수행원들이 한걸음 나와 제각기 짐을 바치니, 왕이 가볍게 손짓했고 도승지가 나아가 하나를 가져왔다.
“……!”
별다른 생각 없이 짐을 받아든 도승지는 놀란 얼굴이 되어 다시 용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상자가 매우 무겁사옵니다.”
왕이 작게 손짓하자, 도승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뚜껑을 열었다.
비단으로 장식된 상자 내부는 금괴로 가득했다.
금괴는 손가락 마디쯤 굵기의 사각형 막대로 되어 낭비되는 공간 없이 빼곡하게 담긴지라, 보이는 만큼 통짜 금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왕이 상자의 내부를 확인하자 아파태가 재차 입을 열었다.
“금번 사건으로 발생한 오해를 재보만으로 종식할 수는 없겠으나 이웃 간에 화친을 바라는 진심만은 알아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금국 전하가 보낸 것이옵니다.”
아파태의 수행원들은 무거울 텐데도 여전히 내색 하나 없이 상자를 받쳐들고 있었다.
다른 상자의 내부도 마찬가지로 금괴로 가득한다면, 무시하지는 못할 양이었다.
조선의 대신들은 노적이 바친 아민과 자송합의 몸값에 혹하면서도, 내심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제안을 받아들이냐 마느냐는 왕에게 달린 일이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용상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