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06화
왕이 말했다.
“잘못을 시인하기는 어렵지만 천금으로 매수하는 건 쉽다는 겁니까?”
정확히 조선의 대신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재보가 좋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죄 지은 사람이 일말의 반성도 없이 오직 재화로서 면피하고자 하니, 제안을 받게 된 입장은 자신이 재물만 보고 굴복할 것으로 비쳐졌나, 하고 불쾌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사신은 조선의 문화를 흠모한다고 하였으나 단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추종하는 건 아닌지 염려됩니다. 나와 신하들은 문명과 도리를 숭상하므로, 사과할 때는 응당 보상 이전에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조신들이 일제히 끄덕이자 아파태는 난처한 얼굴로 답했다.
“금을 더 원하신다면 어떻게든 변통해보겠습니다.”
명백한 오답이었다. 왕의 말에 끄덕였던 신하들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고, 병조참판 이귀는 아예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오랑캐가 고작 갓만 쓴다고 본성이 달라지겠는가!”
통사는 그 말을 굳이 번역하지 않았지만 아파태는 주변의 분위기와 어조를 읽고 그것이 좋은 소리가 아님을 짐작했다.
그래서 아파태는 당혹스러웠다.
상당한 금을 바쳤고, 더 원한다면 마련해주겠다는데 어째서 화를 낸다는 말인가?
조선인들의 드높은 자존심과 완고함은 전사들의 그것과 유사한 데가 있으나, 순위가 실리마저 능가한다는 데서는 저들과 달랐다.
만주에서 재보란 무기이자 세력이었다. 한이 평정하기 전 만주의 족속들은 명나라와의 무역권을 두고 무한히 투쟁했다. 아파태는 금덩이를 앞에 두고도 언성 높이는 사람은 여태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집단적으로 만나기 전까지는.
“……계도해 주신다면 받들겠사옵니다.”
이에 왕이 답했다.
“좋습니다. 국경에서의 불미스러운 사건이라면야, 그대들에게만 있는 건 아니지요.”
사르후 전투.
광해군 시기 섣부른 원정으로 귀중한 백성들이 이역만리 타지에서 죽고 사로잡혔다.
“그때 사로잡은 조선인들을 모두 돌려보낸다면, 나 역시 이번에 사로잡은 아민 등을 돌려보내겠습니다.”
아파태는 난처했다.
‘차라리 금을 더 가져오라면 모를까…….’
부유한 요동을 차지하면서 금은 따위의 재보는 넘쳐났으니까.
그러나 반대로 부족한 것은 식량인데 조선인들은 개간과 경작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명나라인들마저 어쩌지 못하고 포기한 황무지까지 어떻게든 갈아엎고 씨를 뿌려 식량을 만들어낼 정도다.
그런 조선인들을 모두 돌려보낸다는 건, 갈수록 식량 사정이 여의치 않을 금나라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당시의…… 국경을 넘은 조선인 중에는 이미 금나라에 귀부하여 새롭게 터를 잡은 사람도 많습니다.”
아파태가 은근히 어렵다는 뜻을 밝히자 조선왕이 답했다.
“그리 따지자면, 아민과 자송합도 귀부하고픈 마음이 간절할 것이요.”
후금으로 돌아가 봐야 벌어질 일은 뻔하기 때문이다.
“나의 백성들을 풀어주지 않고 예속해둔 채로 화친을 운운하다면, 그대 주인이 말했다는 진심의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소.”
왕은 입장을 밝히고서 덧붙였다.
“당장 확답을 할 수 없다면 오늘은 이만 물러가시오.”
“……예. 송구하옵니다.”
아파태는 예를 취하고는 수행원들과 함께 뒷걸음을 치다 발을 돌렸다.
그들이 정문을 넘어 완전히 사라지자, 중간에 한 번 끼어들었던 이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후금에 포롤 사로잡힌 자들은 충정하는 염치를 잃고 적에게 귀부한 역적들인데, 어찌하여 그들의 송환을 바라십니까?”
-……이에 전하께서는 ‘진심으로 적에게 귀부하여 마음이 오랑캐 땅에 있는 자라면 송환이 곧 처벌이 될 것이니 상관없다’고 하셨다. 【반대로 충정하는 마음을 잊지 않은 자에게는 포상이 될 것이므로 전하께서는 하나의 판결로 벌과 은상을 함께 내리신 것이다. 나라의 기강이 바로세워져 무도한 오랑캐마저 환심을 사고자 한 것은, 이처럼 인군이 영명하신 덕이다.】
* * *
객사로 귀환한 아파태는 곧장 수행원을 시켜 조선의 조건을 본국에 전달했다.
답신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달포하고도 며칠이 더 지나서였다.
아파태는 예상하지 못했던, 그리고 바라지도 않았던 불청객도 함께였다.
“이국의 땅에서 형님의 존안을 보니 마음이 편하군요.”
홍타이지였다.
“……조선을 직접 방문할 줄은 몰랐는데. 저번에 한께서는 불허하지 않으셨던가?”
“제가 두 눈으로 조선과 그 수도를 살펴보고 싶은 마음을 거듭 간절하게 아뢰니, 한께서도 마지못하여 허락해 주셨습니다.”
홍타이지의 태연한 대답에 아파태는 더욱 얹짢아졌다.
말이야 그럴 따름이지, 한이 홍타이지의 파견을 허락했다는 것은 자신이 먼저 조선을 방문하여 안전을 확인했기 때문이 아닌가?
더욱이 아파태는 조선 내부에 관해서는 본국의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으로 조선 방문만 두 번째일뿐더러, 그간 밀서를 교환하며 이해도를 높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유력한 후계자인 홍타이지가 ‘괜히’ 조선까지 왕림해 주시니 아파태는 자신의 강점이 퇴색하는 기분이었다. 홍타이지 상대로 달리 내세울 우위가 없는 탓에 더더욱 그러했다.
“한께서 자식의 목숨을 하나 더 조선에 맡기게 되었으니, 조선의 왕도 더는 한의 진의를 의심하지 못할 것입니다.”
“……흥. 조선왕이 바라는 건 자기 백성들의 송환이지 그대의 왕림이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홍타이지의 여전히 느긋한 대답에 아파태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한께서는 조건에 응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아파태로서는 썩 달갑지 않은 결과였다. 예속된 조선인의 수효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다면, 그들의 능력은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작 사촌들의 목숨을 위하여 그들 전부를 내어주다니?
조선인들이 가고 나면 명나라인들은 개간하지 못하는 황무지를 누가 개간하고 경작한단 말인가?
만인들?
“아민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없거늘…….”
“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한께 ‘거듭 간절하게 아뢰어’ 뜻을 거두어주시기를 청하지 그랬나?”
“아민의 목숨에는 그만한 가치가 없지만, 한과 대금의 위신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지요. 만약 조선이 아민과 자송합을 명나라에 팔아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이하 서열 2위인 이패륵이 명나라 땅에서 조리돌림 끝에 처형이라도 당한다면, 누르하치와 후금의 위신은 땅에 처박히게 된다.
반대로 명나라의 기세는 그만큼 오를 것이니 중원 진출을 간절히 바라는 누르하치로서는 천금은 물론 조선인 모두를 내어주어서라도 아민을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조선왕도 알기 때문에 강짜를 부린 것이겠지요?”
홍타이지는 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면서 덧붙였다.
“비상한 사람입니다.”
“……그만하니 제 왕을 쫓아내고 나라를 차지한 거겠지.”
아파태도 그건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밑의 다른 놈들은 몰라도, 왕은 무시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밑의 후계자도 느낌은 다르지만 마찬가지였다.
살살 웃는 낯으로 비위를 맞춰주는데, 한 번 방심했다가 코가 꿰이지 않았던가?
덕분에 소망하던 아민의 몰락은 이룩할 수 있었지만…….
“그런데 형님, 머리의 상처는 어떻게 된 겁니까?”
아파태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생각했다.
이놈도 어떻게 안 되나?
* * *
‘이놈도 어떻게 안 되나?’
예상외의 손님이 방문했다.
현재 후금의 가장 유망한 후계자이자 장차 제국의 강역을 중원 전체로 확장할 세기의 명군.
홍타이지.
조선과 비교하자면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태조와 태종과 비슷하다.
이성계가 새로운 국가를 창건하였으나 고려의 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태종이 뒤를 이어 조선의 기틀을 정비하고 국초의 황금기를 시작하지 않았던가?
따지자면 평생의 위업은 거의 다 완수하고서 곧 영원성에 들이박고 죽을 누르하치보다는, 앞으로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어갈 홍타이지가 훨씬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김에 제거해버린다면 참 좋겠지만…….’
홍타이지가 동네 똥개도 아니고 후금의 가장 유망한 후계자인데, 위해를 가했다간 벌어질 일이 너무나 뻔했다.
누르하치가 영원성이 아니라 의주성에 들이박겠지.
‘그리고 영원성 전투는 최후의 명장 원숭환이 명나라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함락되지 않았던 산해관에 의지하여 싸웠기에 이겨냈지, 시설 부족한 의주성으로 누르하치를 막는다는 건 어림도 없다…….’
당시 누르하치가 산해관을 넘기 위해 동원한 병력은 약 16만.
홍타이지가 즉위 후 이어갈 황금기를 배제하려다가 그 전에 조선이 먼저 역사에서 배제되는 수 있었다.
그리되면 기분 좋은 건 명나라뿐이다. 후금은
‘그렇다고 홍타이지를 노릴 기회가 또 있는 것도 아니고…….’
거듭 고민해 봤지만 이번 기회는 역시 독이 든 사과다. 목숨을 시험하고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둘도 없을 기회지만, 나라의 운명을 판돈 삼을 수는 없었다.
‘……너는 진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라.’
얼마나 대단한 놈인가 싶어 잠깐 마주한 홍타이지의 면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주먹이 운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일까? 정말로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아니다. 진정하자, 진정. 당장 죽이지 못한다면 냉정하게 상대해야지.’
눈앞에 아른거리는 홍타이지의 면상을 치우고 세자의 귀여운 얼굴을 떠올리니 금세 마음이 차분해졌다.
역시 세자밖에 없다.
홍타이지가 무슨 걱정이냐? 나에게는 세자가 있는데. 잠재성만 따지자면 홍타이지보다 훨씬 대단한 아이다.
‘음……. 평온하군.’
팩트를 상기하니 반대로 기분이 좋아져서, 누가 본다면 조증 환자로 의심할 법했다.
아주 미안한 일이지만 더 기분 좋아지기 전에 세자의 얼굴 역시 흩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홍타이지, 홍타이지…….”
그래도 기왕 방문한 홍타이지다.
놈이 다시 방문한다면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할 사생결단을 치르거나, 아민과 마찬가지로 포로가 되어 끌려오는 것뿐이다.
그러니 꼭 죽이지는 못할지라도 둘도 없을 기회라는 건 여전한 사실이다. 다르게 이용할 수 있다면,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내관?”
“예에, 전하.”
“삼의정에게 들라고 하세요.”
꼭 내 머리만 혹사하라는 법은 없지.
호출이 있은지 한 식경쯤 지나 세 사람이 차례대로 입시했다. 그리고 일전과 마찬가지로 나란히 앉아 예를 표했다.
“신 영의정과 좌우의정이 주상전하를 뵙나이다.”
“경들에게 자리를 청한 건 이번에도 지혜를 빌려주셨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다들, 홍태주洪太主(홍타이지)가 어떤 자인지는 아시겠지요?”
이원익이 대표로 끄덕였다.
“이런 인물이 내방하는 건 앞으로도 흔치 않을 기회이니 방법이 있다면 반드시 유리하게 이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니, 삼의정께서 함께 강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 사람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좌의정 박홍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