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07화
“아파태가 가져온 황금으로 홍태주를 매수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좌의정 박홍구의 제안은 차도살인이었다.
아파태가 바친 시점에서 황금은 조선의 재보가 되었지만 어차피 아민의 몸값으로 얻게 된 부수입이다.
이것으로 홍타이지가 매수된다면 크게 공들이지 않고 이익을 취하는 셈이나…….
이원익이 말했다.
“홍태주는 노추의 자식 중에서 똑똑하기로 알려진 인물인데, 재화로 가벼이 매수되겠는가?”
재물이 전부 아니었냐는 양 왕의 꾸중에 도리어 황망하였던 아파태라면 모를까.
“더욱이 홍태주는 국외의 인물이니, 재화를 받아들일 때 잠깐 따르는 척을 하였다가 저의 소굴로 돌아가서 입을 닦아버리면 그만 아닌가.”
우의정 조정도 거들었다.
“홍태주를 매수하여 저들을 이간하려는 시도는 폐주 때에도 있었으나, 오늘날 사세를 돌아보면 별다른 효험은 거두지 못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조선은 광해군 때부터 패륵 간의 알력다툼을 인지하고 있었다.
당시 비변사는 특히 대선과 홍태주 간의 입장차이를 이용해 이간계를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기세등등한 국외의 실력자들을 조종하는 건 당시 조선의 능력 한계를 훨씬 웃도는 수준의 발상이었다.
‘후금 내부에서 벌어진 후계 분쟁의 역사나 팔기의 각 지휘관을 알아낸 것도 전적으로 정충신이 혼자 분투해 준 덕이었으니까.’
말로는 누군들 그럴싸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겠는가?
문제는 현실성이었고, 홍태주는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 또한 영상과 우상의 말에 동의합니다. 홍태주가 한 줌 금괴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부족한 인물이었다면 애초에 노적의 눈에 들지도 않았겠지요.”
그리고 누르하치 사후 더욱 사납게 견제해오는 패륵들을 좌절시키고 황제의 입지를 굳히지도 못했을 거다.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이에 조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홍태주는 본디 아조와의 화친을 주장하였던 대선과 첨예하게 반목하면서 개전을 호소하였던 인물이옵니다. 그러니 얕은 꾀로 이간을 시도한다면 도리어 저들 사이에서 드러내어 싸움의 근거로 삼지 않겠싸옵니까?”
박홍구의 안색을 살피니 입술이 슬쩍 튀어나와 있었다. 제 주장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발언이었으니 삐질만 하다만 조정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신은 차라리 홍태주는 내버려두고 아파태를 재차 구슬려, 아민과 마찬가지로 차도살인을 꾀하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흐음.”
이원익도 조정의 주장을 거들었다.
“홍태주가 정녕 지혜롭다면 그를 상대로 일을 모의하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닐 것이옵니다. 마침 아민은 군사를 잃고 몸을 다쳐 다시 기용되기 힘들게 되었으며, 반대로 아파태는 소망하는 바를 이루었으므로 패륵의 자리에 크게 다가서게 되었으니, 만약 그를 아조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조정은 자신이 할 말을 대신해주어 고맙다는 듯, 이원익을 향해 작게 끄덕였다.
내가 생각해도 홍태주보다는 아파태가 훨씬 만만했다.
더군다나 아파태는 이미 홍태주를 상대로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코를 꿰이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 뒤로 딱히 생각이 달라지지도 않았을 터인지라, 아파태를 잘 구슬린다면 서로 이용할 뿐이었던 기존의 관계도 더욱 돈독하게 강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아파태에게는 우리의 뜻을 전하되, 이번에는 주변에 눈과 귀가 많으니 책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삼의정이 일제히 끄덕였다.
썩 속 시원한 결과는 아니었다.
삼의정을 소집한 계기였던, 홍타이지의 다시는 없을 조선 방문을 이용할 방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으니까.
‘우의정의 말이 나름 그 대답이라면 대답이겠지만…….’
가벼이 홍태주를 기만하려다간 도리어 당할 수 있다고 말이다.
‘정녕 이 기회를 그냥 보내주어야 하나? ……아니면 내가 당장 눈앞에 아른거리는 유혹에 너무 집착하는 건가.’
난처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으니 이원익이 문득 고했다.
“홍태주를 상대로 방편을 마련하기 어려운 것은, 신들이 그에 대하여 아는 바가 많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음.”
“그러니 아파태를 사로잡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늦은 시간에 주연을 마련하여, 그의 경계와 누그러졌을 때를 이용하여 본심을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과연 영상이십니다. 내가 홍태주를 당장 공략할 생각에만 매몰된 탓에 그보다 앞선 단계를 간과하고 말았습니다.”
“망극하옵니다.”
“마침 하마연을 베풀지 않은 참이니, 홍태주는 하마연을 빙자해 따로 불러내어 본심을 캐보도록 합시다.”
홍태주가 술과 분위기에 취해 빈틈을 보여준다면 가장 좋겠지만 경계를 누그러뜨리지 않아도 그런대로 좋았다. 수작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박홍구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거들었다.
“그리한다면 아파태도 홍태주와 동떨어지게 되니, 긴밀하게 불러내어 전하의 뜻을 전달한다면 아귀가 맞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제법 그럴싸한 그림이 그려졌다.
“영상께서는 하마연에서 홍태주의 경계를 누그러뜨릴 방법을 강구해 주시고, 좌상께서는 아파태를 설득할 방법을 생각해 두세요.”
“예.”
“우상께서는 다른 두 분울 위해 아민과 자송합을 만나 도움 될만한 정보를 확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분부받들겠나이다.”
나는 신하들에게 주억이고는 당부했다.
“경들을 불신하는 건 아니지만 국운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노파심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홍태주는 일개 개인으로서 대적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장차 후금을 이어받아 이끌어나갈 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홍태주를 공략함은 청나라 전체를 공략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연히 나 혼자서 감당할 일은 아니었기에 이 땅에서 가장 숙련된 세 신하들을 불러다가 고견을 청했고, 다시 돌려보내면서 각기 하나씩 일감을 맡겼다.
“경들께서는 부디 홍태주 한 사람만을 어떻게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 너머까지 봐주셨으면 합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강조하지 않아도 알만한 세 사람이었다.
그러나 삼의정들은 뻔한 소리에도 질려 하는 기색은 없이, 다만 진지한 얼굴로 끄덕일 따름이었다.
나는 할 말은 다 했다는 의미로 과자를 돌렸다.
워낙 의례적인 절차였으므로 삼의정은 사양하지 않고 제각기 선호하는 과자를 하나씩 집어 가져갔다.
이번에는 나 역시 그들이 보는 앞에서 과자를 챙겨 입에 밀어넣었다.
왕과 공신들이 영구한 협력을 약조하는 회맹會盟은 그릇 하나에 받아진 피를 모두가 나누어마시는 것으로 맺어진다. 따지자면 이것도 일종의 회맹인 셈이다. 그렇다면 약조하는 것은 위국헌신爲國獻身이 되겠지.
이내 삼의정은 각자의 본분을 다하러 해산했다.
* * *
삼의정에게는 홍태주만 아니라 후금 전체를 상대하는 것이라며 어금니 꽉 깨물라는 양 겁주면서도, 정작 나는 무언가를 하겠다는 말이 없었으므로 세 사람이 이즈음에는 ‘그럼 왕은 뭘 하는 거지?’ 하고 뒤늦게 자문할 법도 하였다.
그러나 나라고 무위도식하겠는가.
변방의 치계에 따르면 이미 강 너머에서는 조선인 포로들을 규합하느라 분주하다고 한다.
아직 홍태주와 접견하지는 않았으나 누르하치의 뜻은 이미 알았으므로, 아민과 자송합의 귀국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명나라가 아민의 송환을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명나라는 사르후 전투의 참패 이래 방구석에서 나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는지라, 분위기를 반전할 기회가 절실했다.
그러니 조선이 아민과 자송합을 산채로 사로잡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 절실함에 평소 기고만장하던 태도까지 더해져 포로를 저들에게 보내라 을러댈 게 뻔했다.
물론 그때쯤이면 아민과 자송합은 후금으로 송환되어 이미 지하세계의 주민이 되었을 터다.
‘그러면 또 꼴에 아민과 자송합을 저들이 맡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비분강개할 거란 말이지.’
조선이 예상밖의 저력을 다시금 증명했으니 지랄에도 한계는 있겠지만, 드러내지 못하는 만큼 속으로 꽁하게 여기고서 갖은 술책을 걸어온다면 이쪽이 피곤해진다.
조선이 명나라를 상국으로 받들면서 별 시답잖은 것으로 일일이 대경실색하기 때문에 명나라가 작정한다면 멍청한 선조놈이 종계변무 때 그랬던 것처럼 질질 끌려다닐 수 있는 탓이다.
또 다른 문제는 송환될 조선인들의 처우다.
강홍립만 해도 죽을 때까지 맞서지 않고 투항했다는 이유만으로 세간에서는 이미 역적처럼 여기고 있었다.
오죽하면 야사에서는 강홍립이 후금과 내응하여 조선의 왕위를 찬탈하고자 했다는 미친 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막상 강홍립은 포로로 지내는 동안 끝까지 변발을 거부했고, 정묘호란으로 반청감정이 극도로 심할 때 무수한 규탄을 받으면서도 끝내 귀국했는데 말이야.’
보나마나 이번 역사에서도 강홍립 등 후금에 투항했던 사람들이 귀국하면 왜 거기서 안 죽고 살아남아서 돌아왔냐며 지랄할 게 뻔했다.
‘아니, 그치들이 싸우고 싶대서 보내준 것도 아니고.’
나라는 다 망해가는 판국인데 재조지은한답시고 애먼 목숨들을 남의 전쟁에 팔아먹은 것 아닌가?
정작 저들은 안락한 한양에서 부유하게 지내며 이역만리 전장에 훈수나 두었고 말이다.
그런데 미안한 마음은 추호도 없이 도리어 규탄할 꼴을 짐작하니, 생각만으로도 역정이 치솟았다.
‘안 그래도 아파태가 아민의 송환을 요구했을 때 이귀가 비슷한 소리를 했지.’
염치가 없어 귀부한 역적들의 송환을 왜 바라느냐고.
외부인이 없었다면 내려가서 이귀를 걷어차 버렸을 거다.
아무튼.
아민을 송환하고 조선인 포로들이 귀국하면 홍태주와 후금 외에도 신경써야 할 데가 이렇게 늘어난다.
하지만 조선의 관리들은 명과 포로들에 관해서라면 색안경을 몇 겹으로 쓰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하려면 나 말고는 달리 나설 사람이 없다.
* * *
각 문제를 해결할 사람을 내정해두고서 기용에 필요한 제반을 수행해두니 사위는 금세 어둑해져 남색으로 물들었다.
새삼스럽게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는데 내관이 불렀다.
“전하.”
“무슨 일입니까?”
“영의정이 입시하였사옵니다.”
이원익이 밤이 되어 찾아올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하마연.
“들라고 하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이원익은 금세 들어서서 예를 표했다.
“전하.”
낮동안 많이 바빴는지 목소리가 처져 있었다. 대면이 길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원익이 잠깐이라도 쉴 수 있도록 맞은편의 방석을 권하고서 일렀다.
“말씀하세요.”
“하마연의 준비가 끝났사옵니다.”
“홍태주는 참석하겠지요?”
“예에. 소식을 전하니 놀라워하고는 매우 기뻐했사옵니다.”
“홍태주가 원래 주연을 즐기는 사람이던가요? 야인 중에서 주연을 마다하는 자가 있겠습니까만, 매우 기뻐했다니 의아하군요.”
“홍태주의 말로는 예전부터 전하를 흠모하여 뵙고 싶었는데 자리가 마련되어 기쁘다고 하였사옵니다.”
이원익이 홍태주의 말로는, 하고 전제하는 것을 보아 진심이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하기야 홍태주가 나를 흠모까지야 했겠는가.
이웃한 국가의 주인이고, 근자에 인상적인 위업을 내어 이목까지 사로잡았으니 야심적인 홍태주라면 관심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관심이라는 게 흠모와는 방향성이 아주 다를 뿐이겠지.
“우상은 아민이나 자송합에게서 쓸만한 정보를 취했답니까?”
“홍태주는 심모원려深謀遠慮하고 여용가고餘勇可賈한 사람을 매우 좋아하여 비록 패배하였어도 기백이 있고 강개살신慷慨殺身하면 후하게 추켜세우고, 반대로 항복하거나 굴종하는 자들은 개나 돼지처럼 여긴다고 하였사옵니다.”
“흐음…….”
“또한 조선을 거의 원수처럼 여겨 매양 추장에게 공격할 것을 권하였는데, 이는 북쪽의 몽고와 마찬가지로 명을 침범하기에 앞서 주변을 평정하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다고 여겼다 하옵니다.”
그래서 홍태주는 몽고를 평정하고 쿠릴타이를 주재해 직접 청 황제로 즉위한 다음 곧장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지.
그가 선호한다는 성격을 보면 마치 자기 자신을 표준으로 삼은 듯했는데, 과연 그렇다면 홍태주는 필요한 싸움은 피하지 않되 불필요한 싸움을 억지로 일으킬 정도로 무식하지는 않을 듯했다.
실제로 조선이 병자호란으로 제대로 찌그러진 다음에는, 한간漢奸들이 변발과 호복의 강제가 없는 조선의 특혜를 지적하자 홍태주는 쓸데없이 조선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했으니까.
‘그러니 조선과 싸울 필요가 없다는 확신만 새겨준다면 홍태주도 굳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테지만…….’
조선은 가도의 동강진을 소탕하고 아민의 정람기를 단숨에 쓸어버린 저력을 과시했다.
그런데 멀리 보려는 홍태주가 이만한 저력을 가진 조선을 후방에 두고도 안심할 수 있을까?
내가 홍태주 같아도 도저히 안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가만히 고민하고 있으니 이원익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또한, 홍태주는 홍시를 매우 좋아한다고 하옵니다.”
“으음.”
모르는 것보다야 아는 게 좋기는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