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08화
하마연에 참석하니, 먼저 배석한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났다가 나와 함께 다시 앉았다.
“전하.”
먼저 입을 연 쪽은 홍태주였다.
“저를 이토록 따뜻하게 환대해 주시니, 후의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이웃한 나라에서 귀한 손님을 보내주었으니 당연히 환대해야지요.”
“언젠가 전하께서 손님을 보내주신다면 저 역시 성심으로 맞이하겠습니다.”
의례적인 대화임에도 신하 몇몇의 미간이 좁아졌다.
홍태주가 노적의 유력한 후계자라고는 하지만, 그뿐이다. 조선으로 따지자면 일개 대군이 이국의 군주에게 손님을 청한 셈이었다.
‘최대한 좋게 봐주어도 불충에 월권이지. 당연히 고작 그 정도의 의미도 아니겠지만.’
기고만장한 홍태주의 태도를 본다면 그가 단순히 손님을 청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마, 제가 후금을 승계할 것이니 그리되면 사신을 보내어 축하해 주지 않겠느냐는 의미겠지.
‘한에 오르기 전에 미리 잘 보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신하들이 홍태주의 발언에 불쾌해하는 건 그 때문이겠지.
하지만, 드러난 문맥만 보면 전형적으로 형식적인 대화일 뿐이다.
짐작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트집 잡아봐야 홍태주가 그저 오해일 뿐이었다며 잡아떼면 저 혼자 발끈한 꼴이 된다.
‘아주 약삭빠른 인간이야.’
이런 사람을 섣불리 구워삶으려다간 도리어 큰코다치겠지.
가만히 당해주는 성격은 아니어서 같은 방식으로 되돌려주었다.
“의주부에 전해두지요.”
당신이 만드는 자리는 내가 직접 사람을 보낼만한 수준이 못 되니 지방 차원에서 대응하겠다는 뜻이었다.
“……하하하.”
홍태주가 어색하게 웃었고, 나는 사람 푸근한 미소로 받아주었다.
“하하.”
홍태주는 나를 또 긁으려다간 자신이 먼저 평정이 깨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군소리는 더 이어가지 않았다.
나는 홍태주 이외에 배석한 신하들과 짧게 인사를 나눴다.
막 홍태주에게 한 방 먹인 참이어서인지 신하들은 술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흥겨운 낯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지금쯤이면 좌의정은 아파태와 접촉했겠군.’
그렇다면 나도 나의 임무에 집중해야겠군.
홍태주를 살펴보니, 그는 되로 주려다가 말로 돌려받은 게 빈정상했던지 자리에 거의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마연下馬宴이란 이름처럼 사신이 원행 끝에 말에서 내리게 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인데, 자리의 주인공께서 마음이 편치 않아 보이시니 무안합니다.”
홍태주는 이실직고하기엔 민망했던지 아,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어색하게 웃었다.
‘아파태도 먼저 덤벼들었다가 망신을 당하고서는 삐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형제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이 똑같았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홍태주는 이번 자리에서 대취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빈정이 상해 있어서야 어떻게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고 그 너머를 볼 수 있을까.
“아직 술을 입에 대지 않으셨군요? 음, 조선의 술이 꽤 강한지라, 외인 중에서 심약한 사람은 꺼리는 일이 잦다고 들었습니다.”
“…….”
“원하신다면 곡주로 바꿔드리겠습니다.”
미안한 얼굴을 하고서 양해를 제안하니 홍태주는 순간 무슨 미친소리냐는 듯한 낯을 지었다가 답했다.
“아닙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결례했습니다.”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군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는 것입니다만, 이 사람의 환대가 부담스럽지는 않으시겠지요?”
“전혀요.”
“다행입니다.”
안도를 과장하고서 단숨에 술잔을 꺾으니 홍태주도 지지 않겠다는 듯 뒤따라 잔을 꺾었다.
“……!”
그리고 홍태주는 곧장 사례들린 것처럼 기침을 연발했다.
“커헉, 커헉! 컥! 카앜!”
조선의 술이 독하다는 건 도발만이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해준 것이지.
독주인 소주의 원형이 몽골에서 나온 만큼 증류주야 당연히 여진족에게도 있다.
그러나 조선의 소주는 한 번 더 증류하여 도수를 높이는지라 위력이 일대의 소주와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오죽하면 명, 청을 방문한 조선인은 중원의 명주가 도리어 싱겁다고 하고 반대로 명, 청에서는 조선의 술이 너무 독해 잔을 다 비우지 못할 정도.
‘애초에 마시고 죽자는 폭음문화가 고질병인 나라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죽을 각오로 마시는 술을 어중간하게 만들리 없다.
급하게 냉수를 청해 받아마시는 홍태주를 측은한 눈빛으로 주시하니, 막 정신을 차린 홍태주가 정색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하하……, 송구합니다.”
급하게 마시느라 사례가 들렸을 뿐 오해하지는 말라는 투였다.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보는 앞에서 또 단숨에 잔을 비워주니 홍태주도 오기가 생겼는지 똑같이 잔을 비우고는 썩은 미소를 지었다.
‘금방 취하겠군.’
고작 두 잔 마셔놓고 벌써 제가 좋아한다는 홍시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홍태주였다.
나의 도발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도 회피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맞서는 걸 보면, 역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시대에서 주량이란 남성성과 마찬가지.
후금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서 세상 무서운 줄 몰랐을 홍태주다. 평소 문약하다고 얕보았을 조선의 붓쟁이들보다 술을 못 마신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겠지.
“사신이 자리를 즐겨주니 매우 기쁩니다. 실은, 사신의 명성은 이 나라에도 제법 알려져 있지요.”
“그렇습니까?”
대답에 앞서 술잔부터 기울이니 홍태주도 똑같이 기울였다.
틈틈이 마셔줘야겠군.
“내가 즉위한 다음 가장 신경 쓴 사람이 그대 부친과 그대입니다.”
“높게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작 이웃과의 화친을 위해서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와 조선은 역사가 변혁되는 순간에 무대 바로 다음가는 위치에서 사세를 관망하고 있지요.”
홍태주는 잠시 주시하더니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전하의 기개가 존경스럽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취중진담이라 하여, 술을 마시는 동안에는 오직 진심만을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귀방은 어떻습니까?”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신께서도 솔직해지시지요. 조선을 방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홍태주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자 나는 검증된 수단을 다시 동원했다.
“아니면, 사신께서는 술기운을 빌려도 솔직해지기 힘드십니까?”
“전혀요! ……내가 조선을 방문한 이유는 이패륵을 몰락시킨 이 나라의 주인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제군주제가 일반적인 이 시점의 세상에서 한 국가의 미래는 군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만약 왕이 아주 유능하다면 신하들이 양떼에 불과할지라도 장차 양이 이끄는 사자무리를 압도할 수 있다.
반대로 왕이 무능하면 신하들의 수준이야 어떻건 도리어 휘둘리거나 통제하지 못하여서 나라는 권신이나 탐관이 서로 파먹기 바쁘게 되어, 종내에는 자멸하고 만다.
당장 광해군의 치세가 그렇지 않았던가.
그러니 홍태주는 조선이 달라진 모습을 보이자 새로 즉위하였다는 왕을 직접 보기로 한 것이다. 이 같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말이다.
조선을 당장 견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아가 견제해야 한다면 우선순위를 몽고보다 앞에 두어야 하나, 뒤에 두어야 하나.
“사신은 고대하던대로 나를 직접 보았는데,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전하께서는 후금의 맹우나 강적이 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배석한 신하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었다.
조선의 왕이 후금과 맹우가 된다는 건 상국인 명나라를 배신한다는 뜻이고, 강적이 된다는 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협박처럼 들렸을 테니까.
어느 쪽이라도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대의 말은 나를 객관적으로 분석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사신의 희망처럼 들립니다.”
“…….”
“사신은 조선이 후금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 분명하기를 예전부터 원했겠지요. 그리고 정람기가 격멸되고 아민이 구속된 뒤에는, 바랐을 것입니다.”
홍태주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바람이 요구에서 소망으로 옮겨간 것은 그만큼 조선의 위상이 남달라졌기 때문이다.
예전의 조선이었다면 원 역사의 홍태주가 그러했듯 명나라에 집중하기 전에 미리 밟아두고 가도 무방했겠지만, 지금 조선은 잘못 밟았다간 명나라를 치기도 전에 발병신이 될 테니까.
“사신의 소망은 전제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적어도 나는, 귀방의 행보에 일일이 박수치거나 반감을 가질 의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은 금과 한을 숙적처럼 여기는 게 아니었습니까?”
“이 나라에서 과도하게 융통성이 부재한 식자들은 과연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불을 지르는 건 내가 아니지요.”
신하들이 당혹감 섞이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답했다.
“내가 후금과 그대를 의식하는 건, 그대가 먼저 불필요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나의 입장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전하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약 이백 년 전 태조대왕께서 개국하시고 세조대왕께서 사군과 육진을 평정하신 이래로, 조선의 정당하고 합당한 권역으로 규정된 압록강과 두만강을 포함한 그 이남의 땅과 그 위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을 반드시 수호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감탄과 탄식이 뒤섞였다.
“나는 나의 입장을 이실직고하였으나, 사신이 믿지 못하겠다면 한 번 더 시험해보십시오. 하지만 그때는 누구도 강을 두 번 건너지는 못할 것입니다.”
삼국지에서 유비는 자신을 경계하는 조조 앞에서 젓가락을 떨어뜨려 방심을 유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유비와 같은 방법은 쓸 수 없다. 나의 주도로 창설되고 조련된 군사들이 후금의 정예한 팔기 중 일축을 단숨에 해치워버렸기 때문이다.
손아귀에 쥔 병장기에서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는데 되도 않게 어벙한 연기를 한다고 방심을 유도할 수 있겠는가?
‘무해하게 보일 수 없다면 차라리 유해하게 보여야 한다.’
후금이 가장 두려워하는 미래는 끝내 산해관을 돌파하지 못하고 요동에서 고사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후금은 존속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산해관을 넘어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이 살아남을 방법도 명확하다.
후금이 대는 이유나 명분이야 어떻건, 함부로 전쟁을 일으켰다간 도리어 공멸 수준의 타격을 입고 산해관 돌파의 동력마저 상실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실력이야 이미 입증했으니 각오만 보여주면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전하의 입장은 잘 알겠습니다.”
“이해하였다면 다행입니다.”
과연 홍태주가 생각을 고쳐먹었을까?
고쳐먹었다면 나와 조선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내가 바라는대로 소 닭 보듯 데면데면 지내기로 마음먹었을 수도 있겠으나, 도리어 정반대로 지레 겁먹고서 몽고보다 먼저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취중진담이라고는 하였으나 물어본다고 알려줄 만한 건 아니었으므로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오해가 종식되었다면 기념으로 술 한 잔 채워드리지요.”
나는 상석에서 일어나 술상 앞에 섰다. 그러자 이원익이 양보하듯이 자신의 술병을 내밀었다. 왕의 주안상에 놓인 술이 아깝다는 투였다.
나는 그것을 사양하는 척하며, 원래 내 술상의 것을 집는 양 가장하고서 받아들였다. 그동안 이원익은 왕의 주안상에 놓인 술병을 슬쩍 자신의 자리로 옮겼다.
그러니 내가 홍태주의 잔에 채워준 어사주는 본디 이원익의 상에 놓였던 술이었다.
번거롭게 바꿔치기한 이유는 내가 진담은 하였으되 취중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