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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09화 (109/380)

인조, 명군이 되다 109화

홍태주는 하마연을 마치고 객사로 귀환하였으나 곧장 잠들지 못했다.

그는, 직접 면대하면 조선의 왕이 어떤 인물일지 곧바로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안일했던 것일까?

‘금이나 명과는 관계없이 강 이남의 땅과 백성들을 수호하겠다고 하였지만…….’

확신이 들지 않았다.

홍태주가 아는 조선이란 이런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왕이야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니 흐름이 어느 정도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신하들은 아니잖은가?

소위 선비라는 작자들은 명나라를 하늘처럼 여기고 숭상한다.

더욱이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고집을 가졌으며, 편벽하여서 융통성이란 조금도 없었다.

‘그런 작자들로 꾸려진 자리에서 정작 재조지은 어쩌고 하는 소리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으니.’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왕이 마냥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기에는 가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초장에 짓던 위선적인 미소에 기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경고처럼 밝히던 자신의 입장에는 분명하게 진심이 어려 있었다.

‘취중진담이라더니.’

정말로 진심을 내비친 것일지도 모른다.

‘하기야, 목구멍 타오를 정도의 독주를 거듭 비우고도 그만한 감정을 가식으로 내보일 수 있다면 인간이 아니지.’

그래서 홍태주는 대금大金과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해하면서도 동시에 조선 왕의 말은 믿어도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들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조선 왕의 발언이야 어떻건 후방의 강성한 이국은 경계함이 마땅한데도 말이다.

‘……아니면, 단지 조선 왕이 마음에 들었을 뿐인가.’

홍태주는 차마 자신의 의문을 부정하지 못했다.

조선 왕은 구차하게 자신의 마음을 돌리려 하는 대신, 어디 진의를 시험해 보겠느냐며 대단한 배짱을 보여주었다.

만약 조선이 약소하던 시절 그 같은 겁박을 받았다면 코웃음이나 나왔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의 조선은 왕이 친히 취하여서는 단숨에 쇄신하여 정람기가 단숨에 몰살하지 않았던가. 정당한 배짱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국의 왕만 아니었다면 천만금을 들여서라도 나의 곁에 두었을 텐데!’

홍태주는 침상 위에서 몸서리칠 정도로 아쉬웠다.

징기스칸을 전설의 반열에 올려놓은 건 일신의 무위와 지략만이 아니라 그의 곁에서 주인의 의지를 자신의 숙원처럼 여기고서 실현하였던 사준사구였다.

홍태주 본인도 징기스칸과 마찬가지로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니, 응당 사준사구가 있어야지 않겠는가?

조선을 향한 새로운 인식을 그린 홍태주는 미련없이 눈을 감았다. 독주에 진탕 취한 탓인지 곧장 졸음이 쏟아졌다.

* * *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아파태를 마주하게 된 홍태주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 혼자 연회에 참석해서 미안합니다. 형님께서도 함께 해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저 한 사람을 위한 자리라며 억지를 부리더군요.”

아파태의 미간이 가늘어졌다.

“……원래 그런 자리다.”

하마연은 원행에서 막 도착한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니까.

홍태주보다 훨씬 일찍 조선에 도착해 한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던 아파태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리고 동석의 제안을 받지도 못했는데 다 끝나고 나서야 미안한들 무슨 소용이냐?’

아파태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홍태주가 하마연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비운 동안 자신은 술잔을 기울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정을 가졌으니까.

“조선에 너무 오래 머물렀더니 입에서 신물이 나온다. 빨리 왕에게 한의 의사를 전하고 뜨자.”

“저는 조선에 더 머무르고 싶습니다.”

“…….”

“직접 만나보니 왕과 신하들 모두 흥미롭더군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한양에 발을 들이겠습니까?”

그러니 질릴 때까지 머무르자는 소리에, 이미 꼬박 달포를 넘게 조선에서 머무른 아파태가 질색했다.

유력한 후계자로 꼽히는 홍태주와 달리 아파태 자신은 아직 패륵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만큼 세력 역시 약하고 군소하였는데, 수장인 자신은 자리를 너무 오랫동안 비웠다.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다.

아민을 데려오라는 한의 엄중한 명령이 없었다면 홍태주가 도착한 그날로 먼저 귀국했으리라.

“정 더 머무르고 싶다면 일단 왕에게 한의 의사부터 전달한 다음 난동이라도 부리지 그러느냐? 그러면 내가 이패륵을 데리고 귀국하는 동안 너는 조선에 더 머무를 수 있을 거다.”

대신 아민이 갇혔던 방에 대신 들어가겠지만 말이다.

“하하, 농담도.”

“농이 아니다. 나는 한의 엄명을 수행하고자 하는데, 네가 훼방하여 이패륵의 송환이 늦어진다면 우리 모두 죄를 짓는 셈 아니냐?”

아파태가 한의 권위를 앞세우니 홍태주도 차마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제가 전하고 싶어도 조선의 왕이 불러주어야 전하지요. 아니면, 형님께서 조선의 왕에게 대신 따져주시겠습니까? 이패륵의 송환이 늦어진다면 우리 모두가 함께 죄짓는 셈이라고.”

“미친 소리를…….”

그랬다간 아민과 함께 삼형제가 사이좋게 한 감방을 쓸 수도 있었다.

“형님께서 농을 해주시기에, 저도 한 번 해보았습니다.”

“…….”

아파태의 인상이 일순 일그러졌다. 분명 농담이 아니라고 했거늘 홍태주는 여전히 농담으로 여겼으니까.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러나 아파태 자신은 아직 미약한 존재였고, 반대로 홍태주는 한의 총애를 받으며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다. 정면으로 들이받아서는 이로울 게 없었다. 저의를 느끼면서도 따져묻지 못하는 이유였다.

“……흥.”

하지만 아파태는 좌절하지 않았다.

멀지않은 곳에서 감옥살이하고 있는 아민도, 몰락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맞설 수 없는 자였으니까.

아파태는 간밤에 찾아온 늙은이의 도발을 떠올렸다.

‘아민이 몰락했으니 만족했느냐고?’

전혀.

* * *

그로부터 며칠이 흘러 홍태주와 아파태는 상마연上馬宴을 치르게 되었다.

후금에서 온 사신이 북변으로 돌아가기 전 조정이 마지막으로 행하는 예식이었다.

배웅은 세자가 맡았다.

왕은 이미 홍태주와 아파태에게서 취할 건 취하였으므로 기회를 세자에게 양보한 것이다.

공적을 세우라는 의도는 아니었다. 세자에게는 홍태주를 겪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 될 터였다. 착잡한 결말이 기다리는 아민과 자송합 역시 상마연에서 함께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동안, 왕과 나머지 신하들은 대전에 자리했다. 곧장 논의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한 시름 덜었사옵니다.”

영의정 이원익이 어전에서 지친 목소리로 고했다.

노적의 네 자식은 백관들에게 있어 눈엣가시와도 같았다. 만약 이귀가 두엇만 더 있었어도 사신 객사에서는 야습이 벌어졌으리라.

그런 분위기에서 사신들은 달포를 꼬박 채우고 거의 두 달째가 되어서야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북변으로 꺼지게 되었으니, 그간 위아래로 치이느라 지쳤던 대신들이 땀을 훔쳐냈다.

그러니 이원익의 말처럼 한 시름은 놓은 셈이나 아직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노적의 자식 넷이 제 발로 한양에 입성하였는데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갔으니 명나라에서 소식을 접하게 되면 반드시 곡절을 따져 물을 것입니다.”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유능하고 노련한 사람을 미리 기용해두어 대비해야 차질이 없을 것입니다.”

“염두에 두신 사람이 있사옵니까.”

“남이공이 외교에 해박하고, 명나라에서 큰 공적을 세웠으므로 그를 예조판서로 삼아 대비한다면 유비무환이겠습니다.”

변무상사로 파견되었던 남이공이 북경에서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남이공은 그만한 책임감에 기대 이상의 성과까지 이뤄냈으니 외교의 전문가로 보아도 무방했다.

“또한, 의주부사가 치계하기로 국경에 이미 무수한 조선인들이 집결하여 귀국시 통제에 난항이 예상된다고 합니다.”

수용에 문제가 없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북방군이 압록강에 임시로 주둔하며 세워둔 시설 덕이었다.

다만 부사가 지적한 대로 통제가 문제였다. 인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의주가 북변이라 토관土官이라 칭해지는 관원은 않았지만 본디 토관이란 조선에 편입된 여진족 유지들을 포섭하기 위한 자리였다. 어렵게나마 중앙 진출도 가능했으나 토관들이 유지로서 군림하는 고향을 떠나, 아는 이 하나 없을 한양에서 기고만장한 경관들의 수발을 들어보고자 하는 자는 흔치 않았다. 그래서 대개는 거저 주어진 자리에 안도하여 재주가 변변찮았다.

이에 좌의정 박홍구가 탄식했다.

“노적이 무고한 선비들을 모두 주살하지 않았다면 미봉책이라도 쓸 수 있었을 터이온데, 그렇지 못하니 안타깝사옵니다.”

여러 사람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환자들이 한때 군병 노릇을 한 만큼 옛 지휘관들을 모아 임시로 가교 역할을 맡긴다면 수월하게 통제가 가능했을 텐데, 이것이 불가능해진 탓이었다.

누르하치가 포로 중에서 양반들을 골라 죄 죽여버린 탓이다. 군대에서 급제자들이 어떤 역할을 맡고 있었겠나.

“생환자들은 나라의 재조지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의사들이니, 여의치 않다고 처우가 부실하거나 부당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당한 분부이시옵니다.”

이원익을 따라 몇 사람이 끄덕였다.

그러나 다른 몇몇은 ‘목숨은 걸었지만 죽지는 않은’ 포로들의 귀환과 그들을 우대하겠다는 방침이 썩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내가 홍태주에게 한 발언이 있고, 또 동강진이 패악을 벌였을 때 보인 반응이 있어서인지 굳이 나서서 제 뺨의 내구도를 시험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이 문제 역시 마땅히 노련하고 경험 많은 인물에게 맡겨야 하는데, 나는 판윤과 양전어사를 지냈던 윤선이 어떨까 합니다.”

판윤을 대한민국의 공직으로 치환하면 서울 시장에 해당한다.

생환자들이 임시로 머물 시설의 규모만을 생각하면 과한 인사겠지만, 시설의 성격과 분위기는 일반적인 고을과 판이하게 다르다. 이 정도 급은 되어야 했다.

“과연 그가 적임자일 듯합니다.”

윤선의 품성을 보아도 그랬다.

그는 폐조 때 직언을 올려 미움받게 된 사람들을 구명했고, 대비를 굶겨 죽이려던 광해군에게 간청하여 식사를 끊이지 않게 했다.

여느 입만 산 작자들과 달리 진짜로 목숨을 걸어가며 도의를 실현한 것이다.

‘게다가, 윤선에게는 돌아올 때까지 의정부에 자리를 비워두겠다고 공인했단 말이야.’

슬슬 그 공석을 메울 때가 되었다.

그 필요성을 의정부 수장으로서 공감할 이원익이 재차 동의했다.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면, 윤선을 어사로 삼아 생환자들을 통제하게 하고 호조참의 김육을 종사관으로 대동시키겠습니다.”

김육은 원 역사에서 목민관으로 부임한 즉시 공납의 문제점을 제기했고 대동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민생에 관심이 많았다.

막 귀국하여서 옹기종기 불편하게 살아갈 생환자들의 처우에도 관심을 가져주겠지.

그리고 김육 역시 윤선과 마찬가지로 요직에 제수할 명분이 필요했던 참이다. 언제까지고 그저그런 자리에 두기에는 자질이 아까웠다.

“마지막으로…….”

북방군 도원수에게 약조한 바를 들어줄 때가 되었다.

“장만은 건강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거듭 사직을 청하였는데, 그간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가납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야 북변의 소란이 진압되어 안심하게 되었으니 그를 체직하고 대신 김충선을 도원수로 삼아 국경을 지키게 하겠습니다.”

광해군은 김충선을 십여 년 기용하고서 쉬게 해주었지만, 정작 김충선은 여전히 전성기였다.

원 역사에서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관군으로 합류하여 패잔하던 이괄측 항왜들을 직접 처단했고, 그로부터 13년이 더 지난 병자호란 때도 최대 혈전이었던 쌍령전투에 참가해 일조했다.

‘병자호란 때면 환갑보다 고희古稀에 더 가까울 나이인데 싸움에 자원했다니 이만하면 노익장으로 유명한 염파廉頗나 황충蝗蟲조차 부럽지 않다.’

그러나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었다.

“김충선의 나이도 몇 차이나지 않아 오래 힘쓰지 못할 터이고, 출신을 감안하면 국운을 맡은 군대의 지휘를 맡기기에는 미흡한 면이 있으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제수하심이 어떻겠사옵니까?”

병조참판 이귀였다.

생환자를 우대하겠다는 방침에는 차마 후환이 두려워 따지지 못했으나 김충선은 비교적 만만하니 대신 살풀이 한 번 해보겠다는 느낌이었다.

“김충선은 관직 하나 없는 몸으로 사비를 털어 장창을 보급했고 항왜들로 의병을 꾸려 싸움에 일조하였습니다.”

“하오나…….”

“열의나 기운이나 모자란 구석 하나 없는데 반 백년도 더 전의 출생을 트집잡아 인재를 쓰지 않는다면 사리에만 아니라, 충성하는 사람을 우대하는 도리와도 맞지 않습니다.”

이귀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내가 출생으로 기용에 제약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했으므로, 여차하면 이에 반하여 반상班常의 유별이라는 핵폭탄급 주제를 끌어올 수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귀도 섣불리 죽자는 식으로 판을 벌리기는 조심스러웠던지 그저 큼, 하고 못마땅한 기분만 드러내고 말았다.

‘……잘 생각했다.’

반상까지 걸고넘어지면 북방군에서는 도원수만 아니라 부원수까지 말려들게 된다.

그러면 나는 어전에서 다시는 반상 운운하는 소리가 함부로 나오지 못하도록 이귀가 가루가 될 때까지 면박줄 수밖에 없다.

이귀도 그 정도 사정은 짐작했겠지.

마무리가 시건방지기는 했으나, 딴에는 독종답지 않게 자존심을 꺾고 물러선 것이므로 쓰다듬어주었다.

“참판의 우려는 나 역시 공감하는 바이지만, 김충선을 도원수로 삼는 것은 오래전부터 고려해왔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감안하고서 내린 결정이니, 정해진 것을 더 논하기보다는 김충선이 진정 도원수에 걸맞은 인재인지를 주시해주셨으면 합니다. 까다로운 안목을 가진 참판께서 검증해주신다면 나 역시 더 믿고 쓸 수 있겠지요.”

살살 띄워주니 이귀가 풀린 얼굴로 답했다.

“크흠,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어찌 부득불 김충선의 제수를 반대하겠사옵니까? 다만 누군가는 제기했어야 할 지적이라고 생각했기에 말씀드렸을 뿐이옵니다.”

“앞으로도 계속 직언을 올려주세요. 덕분에 조정의 기강이 유지됩니다.”

이귀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어깨가 으쓱으쓱 올라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문득 영의정 이원익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그가 참 고생한다는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요, 내가 이러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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