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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10화 (110/380)

인조, 명군이 되다 110화

노추의 자식들이 수도를 떠나고, 후속조치도 결정되면서 한양은 간만에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분분한 논란거리들도 이제는 뒷북이 됐다. 식자들은 신선한 화젯거리를 위하여 창의력을 발휘해야 했다. 그들이 이따금 낳는 논란을 틈틈이 받아 반주 정도로 삼는 보통의 백성들은 말기에 이른 여름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원했다.

북방군 전前(중요한 부분이다.) 도원수 장만은 개선장군이 되어 금의환향했다.

명군조차 어쩌지 못해 불패의 군대로 여겨졌던 금군을 일소한 장만은, 과거 면식 있던 친우들만 아니라 안면몰수하기로 각오한 호사가들의 분주한 방문으로 문지방이 갈려나갔다. 그럴 때마다 장만은 기꺼운 마음으로 무용담을 풀어냈다.

노구로서 참전한 만큼 패관소설의 한 장면처럼 흥미진진한 박투는 들려주지 못했으나, 최고 지휘관으로서 당시의 전장을 생생하게 조명해주니 듣는 사람을 들었다 놓을 구석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게 체직으로 부담을 덜어내고 이따금 손님들과 노닥거리며 잔뜩 휴식한 덕인지 장만은 지독하던 안병을 떨쳐냈다.

우의정 조정은 사직했다.

노환으로 골골댄다며 체직을 요청했던 장만도 조정 앞에서는 엄살을 부릴 수 없었다. 조정의 연배가 열다섯 해나 앞서기 때문이다.

이만하니 왕도 조정의 체직 역시 반려할 수가 없었다.

다만 예우의 차원으로 잠시 좌의정 박홍구와 직을 바꾼 뒤 체직했다. 그리고 궤장机杖을 하사한 뒤 명예직인 판중추부사로 자리를 옮겼다.

뒤이어 좌의정 박홍구도 사직을 청하였으나 반려됐다.

의정 두 사람이 함께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일각에서는 좌의정이 눈치를 보았다고 평했지만, 병조참판 이귀는 단지 궤장이 부러워서 벌인 일이라며 빈정댔다.

조정의 후임은 좌찬성을 지내던 이상의였다.

북방군이 정람기를 토멸하게 된 공훈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병제를 개혁한 이귀와, 망신을 무릅쓰고 이귀를 찾아가 함께 고생하였던 이상의의 공적이 있어서였다.

이 같은 연유에 이귀는 또 촌평을 남겼다가, 막상 우찬성 자리를 제안받자 감히 사양했다.

준 명예직인 삼의정 이하 의정부 자리로 승진하는 것보다야 품계는 낮아도 실직을 지내는 것이 공적을 더 쉽게 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기회주의적인 모습이었던지라, 이귀는 세인의 눈치가 보였는지 금세 찌그러졌다.

이즈음 되어서는 늦여름의 더위도 옛일이 되어 남쪽에서부터 논밭과 산야가 저마다의 색으로 물들어갔다.

그 광경을 고향으로 돌아온 생환자들도 볼 수 있었다.

천여 명에 가까웠던 최후의 포로들이 그렇게 백성들 사이로 녹아들자 왕명을 완수한 윤선과 김육도 귀환했다.

두 사람은 각기 우찬성과 공조참판에 제수됐다.

* * *

“의주부를 직접 다녀왔는데 감상이 어떻습니까.”

나의 물음에, 인사와 함께 엎드렸던 김육이 허리를 들고서 공손히 손을 모았다.

“변란이 발생한 고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롭고 번성하였습니다.”

“만족스러웠습니까?”

선문답같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김육은 왕의 저의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는 듯 곧장 답했다.

“의주부는 본래 명나라와 이어지던 조선의 출입구로 사신이 번다하게 왕래하면서 한양 못지 않게 흥성하였다고 들었사옵니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요.”

“예…….”

요동이 후금으로 넘어가, 명나라와 이어지는 육로가 끊겨 사신이 왕래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김육이 차마 거론하지는 못하였지만, 의주부가 흥성한 데는 밀수의 영향도 컸다.

명나라산 비단과 서적은 국경을 넘으면 값이 배로 뛴다. 사행에 동행한 역관들이 들여오는 정도로는 당연히 수요를 충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상국인 명나라와의 국경을 삼엄하게 수비할 수도 없는데 자연국경인 압록강은 방대한 영역에 걸쳐 있으니 단속마저 쉽지 않다.

당연히 밀수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임진왜란 이후로 몇 년 동안 개시開市가 이어졌지.’

관의 허락을 전제한 교역이었으나 상설 무역이란 상고商賈와 의주부 부민들에게 신세계를 안겨주었다.

이재가 대단한 사람은 스무여 배의 이익을 냈다고도 하니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제 와서 혁파한들 금빛 호시절이 단박에 잊힐 리 없다.

‘그런데 명나라는 요동에서 후퇴했고, 그 땅을 차지한 후금은 문물이 저열한데 조선과 적대적이기까지 하니.’

밀수업자들의 성지로 성장하였던 의주부는 파탄에 준하는 타격을 입었을 거다.

거읍을 지탱하는 주요 산업이 붕괴할 경우 벌어지는 상황은 21세기 미국 자동차 산업의 성지였던 디트로이트의 발전과 퇴락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디트로이트는 산업이 성장하는 반 세기 동안 인구가 여섯 배로 늘어났지만 반대로 산업이 후퇴하는 반 세기가 지나자 미국에서 가장 비참한 도시 1위가 되었다.

의주부의 부민 절대다수가 밀수업에 종사한 건 아니었을 테니 디트로이트만큼 극적인 몰락은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추락이 비참함을 가져온다는 점에서는 같으니까.’

분위기만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참판은 두 눈으로 보았으니 천업으로 취급받는 공상工商의 역할도 막중함을 깨달으셨겠지요?”

“예.”

김육의 대답은 단호했다.

확실히 깨우친 게 있는 모양이다.

“재물이 오가는 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과 같습니다. 의주가 반사의 지경에 이른 건 가장 큰 숨통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경이 굶주렸는데, 쌀장수가 닿지 않는 곳에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굶어 죽을 것이옵니다.”

“반대로 쌀장수가 닿는다면 굶어죽는 길만은 면할 수 있겠지요. 공상의 효용이 여기에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고 유통하니까요.”

선비들은 그 과정에서 과도한 이문을 챙긴다며 공상을 폄하하였으나, 정작 그들이 걸치고 즐기며 누리는 모든 것들은 공상의 손을 타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었다.

당장 그들이 필수품으로 여기는 갓조차 말총을 수확하고 갓으로 엮으며 한양까지 가져다 팔아줄 사람이 없다면 모두 상투자락을 드러내고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공상보다 더욱 본질적인 것을 논하고자 합니다.”

“하교하시옵소서.”

“아무리 노련한 철장이어도 사철이 들어오지 않으면 쇠를 제련할 수 없고, 아무리 유능한 상인이어도 상품이 없으면 장사를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하고도 물은 아래로 흐른다, 수준의 뻔한 소리였다.

그러나 그 뻔한 소리가 통용되지 않는 게 지금의 조선이었다. 더하기의 개념이 없는 세상에서는 1과 1을 더하면 2가 된다는 당연한 결과조차 부연이 붙을 수밖에 없다.

“공상에게도 숨통이 있는 셈입니다. 그들이 먼저 숨을 쉬지 못한다면 떠받들여지는 선비라도 먹고 마실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의 당연한 소리.

“그런데, 따지자면 내가 말한 숨통이란 모두 하나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고을과 공상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지요. 막히면 죽고 뚫리면 사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참판께서도 가늠되시리라 믿습니다.”

부연은 길었지만 김육의 사고를 확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길이라 사료되옵니다.”

더하기를 가르치는 건 쉽다. 이치만 안다면 유치원생이라도 누구에게나 가르칠 수 있다.

하지만 덧셈을 실천하는 건 얼마든지 어려워질 수 있다. 복잡한 숫자들을 무수히 덧셈하는 건 유치원생이 해낼 수 없다.

그러니 개념과 응용은 차원이 다른 별개의 영역인 셈이다.

그리고 나는 개념은 가르칠 수 있을지언정 응용까지 해내지는 못한다.

“참판은 양전어사를 지냈으니 잘 알겠지만, 강원도에서는 선혜법의 확대 시행을 앞두고 세미를 옮기는 데 필요한 여러 제반 작업이 수행되었습니다.”

태백산맥에서 시작하는 여러 물줄기가 비탈을 타고 정직하게 황해로 향하는 덕에, 수운의 혜택을 입은 고을이 많았다.

하지만 일부 예외적인 지역에서는 수운이 가능한 곳으로 세미를 옮겨야 했다.

“길을 닦고 관창을 세웠지요. 인력과 시간의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당연히 동선을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물이 항상 예상에 부합해 주지는 않았지요.”

비효율적이다 못해 무의미한 결과도 있었다.

“현장을 답사할 인원은 없는데 지도는 세밀하지 못하니 앞뒤로 치여서 진짜 삽질에 불과한 삽질도 발생했습니다. 뼈아픈 실책이나,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할 구석도 없지는 않습니다.”

강원도는 지형상 수운에 매우 유리했고 생산력이 낮아 세미의 운송 부담도 적다. 그만큼 공연히 힘을 낭비한 사례도 적었고 실책은 빠르게 수정됐다.

“싼값에 중요한 교훈을 깨우쳤지요. 중요한 건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절대 싼값이 아닐 테니까요.”

김육의 눈빛이 변했다.

“선혜법을 확대하고자 하시옵니까?”

“일거양득이지요. 이외에도 길이 주는 이점은 많습니다.”

“하오면 다음에는 어느 도에 선혜법을 시행하고자 하시는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사옵니까?”

“충청도입니다.”

원 역사에서 선혜법은 경기도에서 시작하여 강원도로 최초 확대됐고 이어서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경상도로 남부지역을 아우른 다음 마지막으로 황해도까지 확대됐다.

이렇게 정리하면 각 지역이 연달아서 선혜법에 편입된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 선혜법(대동법)의 확대는 장대한 세월 야금야금 진행됐다.

결과적으로 선혜법이 마지막으로 황해도를 편입한 것은 선혜청이 설치된 1608년으로부터 꼬박 백 년이 다 지나서였다.

‘나라를 유지하는 가장 근본적인 조세 제도를 개혁하는 데 꼬박 한 세기가 걸렸다니 미쳤지.’

개혁이 이만큼 지체된 데는 인조가 단추를 잘못 꿴 공로가 컸다.

무리하게 하삼도를 다 포함하는 삼도대동법을 시행하려다 조선 곡창지대의 지주들과 과격한 개혁에 수비적인 관리들이 일치단결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내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김류에게 말해주었듯 세미를 운송하기 위해서는 많은 제반 작업이 필요하다.

강원도는 물길이 그나마 경기도로 통하기 때문에 운송이 쉽지 하삼도는 거의 가까운 바다를 향해 마구잡으로 물줄기가 뻗어나간다.

그럼 조운선들은 남해의 지옥같은 다도해 구역을 한참 돌파한 다음 해로를 통한 수도 상경에서 수문장 노릇을 하는 태안반도까지 통과해야 하는데, 이게 준비 없이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현실을 도외시한 채 인조는 듣기에만 그럴싸한 삼도대동법을 강행했고, 덕분에 반감만 잔뜩 산 채 정책을 폐기했으니 개혁이 한 세기나 미뤄지는 것도 당연했다. 인조가 병신인 이유다.

‘나는 놈보다는 훨씬 세심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개혁한다.’

물론 그걸 실현하기 위해서는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 대신 고생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적임자는 바로 눈 앞에 있었다.

김육은 민생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서 한평생 조세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조명한 인물.

그렇다면, 뭐. 하고 싶은 거 하게 해드려야지. 괜히 김육을 공조참판에 올려놓고 여태 설법을 펼친 게 아니다.

“더 길게 말하지는 않겠어요. 참판이 구상을 잘 해내주기를 바랍니다.”

나는 과자상자를 건네는 것으로 독대의 종료를 알렸다.

김육은 제가 집은 과자가 독이라도 된다는 양 질색하고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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