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12화
성큼 다가온 가을에 산야가 각색으로 물들었다.
옷을 갈아입는 건 초목만이 아니어서, 벌써 겨울이 온 듯한 북쪽에서는 백성들의 차림새가 이미 달라졌다.
덕분에 사례감 태감 왕민정은 새삼스럽게 계절의 변화를 느꼈다.
바다를 건너는 동안 기후가 꽤 추워지더니 철산부에 도착하고 나서는 안에 솜옷을 받치게 됐다.
조선의 왕을 만날 때까지 따스한 남쪽으로 이동이 계속되겠지만, 왕민정은 그래도 솜옷 벗을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인들 말로는 동강진 안쪽이 제법 번화했다던데, 둘러보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두 사람이 가도에 다다를 즈음 섬에서 문정이 나와 맞아주었다.
그리고 용무를 확인하고는 곧장 철산부로 향하는 길을 안내해주니, 어마감 태감 호양보는 그러려니 따랐으나 뒤늦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정작 유민과 병사들은 죄 굶어서 수숫대처럼 되었다던데, 그걸 번성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왕민성이 실소하고서 답하자 호양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굶는 인간이야 어디에든 있게 마련이지요. 하물며 황도에도 걸인은 즐비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황도가 번성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건 그렇다마는.”
“얼핏 보이던 총병부만 해도 대단하지 않았습니까?”
나무들 너머로 황색 기와지붕이 비죽 솟아 있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두 태감을 자극한 건 숲과 지붕의 선명한 대비보다도 황와黃瓦 자체였다.
본디 황와는 제작에 석자황石紫黃이라는 귀한 안료가 들어가서 값이 매우 비싼데, 그것으로 지붕을 도배해 버렸으니까.
호양보가 입술을 핥고는 말했다.
“모문룡 팔자가 황제 부럽지 않았다던데 말이지요.”
황궁마냥 황와로 지붕을 도배할 정도라면 그 아래에서는 얼마나 방탕한 호사를 누렸을 것인가.
뇌물을 갈퀴로 긁어모아 황도에서 손꼽히는 거부인 호양보조차 쉬이 가늠하지 못했다.
아마, 상상으로만 가능한 것을 직접 실천하지 않았을까?
황도에서는 주변에 눈이 많아 최소한의 선은 준수해야 하지만, 외딴 동강진에서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으니까.
“쯧. 부럽습니다.”
호양보의 솔직한 감상에 왕민성이 웃었다.
“패거리와 함께 성문에 효수된 것도 말인가?”
“그건 부럽지 않지요. 제가 모문룡이었다면 굴러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차지는 않았을 겁니다. 조선을 공격하다니요.”
황제 부럽지 않게 살다보니 눈에 뵈는 게 없어진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국을 공격해서 소란을 만들 필요가 어디 있나?
그 소란을 일으키고는 대패하여서 포로 신세가 되었으니 목이 잘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쯧. 유민을 앞세워 해마다 타먹은 은자가 20만 냥이나 되는데…….”
무엇이 더 부족해서 그런 난동을 일으킨 건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아까울 뿐.
그 같은 행운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 것부터 배아픈데, 하필이면 모문룡 같은 머저리에게 돌아갔다니.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네.”
왕민정이 느긋하게 타일렀다.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잖은가? 돌아갈 때 손이 가볍지 않을 걸세.”
“……크흠흠.”
* * *
그리고 두 사람이 도착한 선천부宣川府에서는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졌다.
“두 태감 분께서는 이곳을 이용해주시면 됩니다.”
선천부사는 동헌 맞은편의 객사를 소개했다. 관청을 거쳐가는 손님이 임시로 머무는 시설이었다.
왕민정과 호양보는 미리 맞춘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쪽은 호양보였다.
“지금 대명국의 사신이 내방하였는데 부사는 고작 객사나 내어주고 만단 말인가?”
“이곳 이외에는 내어드릴 곳이 없습니다.”
“정녕 그러한가?”
“그렇습니다.”
“철산부에서는 아니라던데!”
호양보가 언성을 높이며 따졌다.
“철산부사는 우리가 바닷길이라는 큰 위험을 감수하고 귀방을 방문한 데 크게 감사해했고, 대접에 모라잠이 없었거늘 선천부의 부사는 먼길 온 대명국 사신에게 고작 협소한 객사나 내어주고 하는가?!”
“예.”
선천부사의 단답에에 호양보는 도리어 난처해졌다. 차마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아서 얼굴만 붉히고 있으니 곁에서 왕민정이 위안했다.
“진정하시게. 이곳 부사의 성정이 철산부사와는 다른 모양이지.”
왕민정은 뒷짐을 지고서 콧대를 높였다.
“호 태감이 말하였다시피, 우리는 멀리서부터 배를 타고 조선에 방문하였네. 철산부에서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지만 여독이 다 풀린 것은 아니야. 우리가 충분히 쉬어야지, 연회에도 좋은 기분으로 참석하지 않겠나?”
“송구스럽습니다만 연회 예정은 없습니다.”
“……없다고?”
“예.”
이번에는 왕민정이 당황할 차례였다.
“…….”
놀라기는 호양보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사행이란 무엇인가?
국경에서부터 수도인 한양에 닿을 때까지 매 고을에서 진수성찬을 대접받으며 조선의 따뜻한 인정을 체감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작 두 번째로 방문한 고을에서 초를 치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만행이다.
그러나 말귀 통하지 않는 벽창호에게 아쉬운 소리를 거듭하는 것도 민망한 짓.
왕민정은 선천부사를 별종으로 여기기고서 대접은 포기했다.
다만 깔끔한 포기가 아닐 뿐.
“우리에게도 예외없이 법과 원칙을 준수한 선천부사의 공명정대한 모습은, 내 기억해두었다가 국왕 전하께 반드시 전해드리겠네.”
듣기에는 좋은 말이었으나 실상 저들이 당한 박대를 왕에게 고자질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선천부사의 대답은 이번에도 짧았다.
“예.”
객사에서 편치 못한 하룻밤을 보낸 왕민정과 호양보는 곧장 선천부를 떠났다. 더 볼일이 없으니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도착한 곽산군郭山郡에서는, 대접이 선천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 * *
왕민정과 호양보의 여정도 말미에 이르렀다. 한양에 다다른 것이다.
이즈음 두 사람의 심경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세간에 상식처럼 알려진 조선행의 상례란 철산부를 나섰을 때부터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어졌다. 마치 철산부의 경계부터 다른 나라에 온 듯했다.
중간에 남이공이라는 원접사遠接使가 합류했지만, 접대의 미진함을 거듭 피력해도 양해만 청할 뿐 달라지는 게 없었다.
“사신 자리를 사기 위해서 바친 은자가 얼마인데, 이렇게 박대를 받아서야 이문은커녕 본전조차 찾을 수 없겠습니다!”
호양보가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왕민정은 달리 대꾸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진정을 촉구했겠으나, 지금은 호양보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왕 태감, 다소 구차해질지라도 한양에서는 예물을 타내야겠습니다.”
“……으으흠.”
왕민정이 대답대신 그저 쓰게 침음하자 호양보가 따졌다.
“그래도 본전은 건져야지 않겠습니까?”
“선천부부터 대우가 천편일률적으로 극악해졌지. 누구 하나 빠짐없이말일세.”
왕민정은 인상을 굳히고서 말했다.
“명령이 있었기 때문 아니겠나?”
누구의 명령일지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한양은 그 누군가의 영역이었다.
“나도 본전은 찾고 싶지만, 무리했다간 본전 이상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드는군. 호 태감께서도 무리하지 않으시는 게 좋네.”
“……후우.”
호양보는 고개를 떨어뜨리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일전에 조선을 다녀온 유홍훈劉鴻訓과 양도인楊道寅은 조선에서 무려 7만 냥의 은자를 타냈다고 들었다.
그러니 수완 좋은 자신이라면 혼자서도 5만 냥은 거둘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조선을 핍박하기 좋은 명분도 가져왔다.
위충현에게 밑지지 않을 만큼 뇌물을 바쳐 부사 자리를 타낸 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정녕…….’
호양보는 입술을 씹었다. 왕민정이 함께 나서준다면 체면 불고하고 노골적으로 예물을 청탁하겠으나, 그는 이미 본전을 포기한 듯하니 혼자 나서기도 난처했다.
“쯧.”
이내 두 사람은 영은문迎恩門에 이르렀다.
그 아래에는 조선의 왕과 신료들이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는데, 호양보는 곧장 왕의 안색부터 살폈다.
딱히 환대라고는 못 할 얼굴이다. 눈이 마주치자 왕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왕민정과 호양보가 하마하고서 먼저 인사한 뒤였다.
“두 분께서 친히 폐방을 방문해주시니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한량없습니다. 오시는 길에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호양보는 일순 가슴이 철렁하였다. 막 나눈 말이 있던지라 제 발을 저린 것이다.
그러나 물어보니 답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입술이 달싹거리는데, 왕민정이 먼저 답했다.
“여러 고을을 거쳐오는 동안 뭇 수령이 환대하고 편의를 잘 살펴준 덕에 불편함은 전연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하. 매우 다행입니다.”
호양보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왕민정의 말이 옳다면 접대의 상례를 일시에 철폐한 당사자일 터인데, 뻔뻔하게 편의를 물어보고 빈말에 기뻐하니 낯짝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은 영은문 너머의 저택을 가리켰다.
“들어는 보셨겠지요? 대국의 사신들께서 머무르시는 모화관慕華館입니다.”
제법 구색은 갖춘지라 호양보는 그나마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왕민정이 답했다.
“조선 국왕 전하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두 분께서 많이 피로하실 테니, 인사는 이만하고 물러나겠습니다. 판서?”
왕의 부름에 원접사 남이공이 끄덕였다.
“돌아갑시다.”
“예에.”
남이공은 두 사람과 짧게 인사를 나눈 뒤, 왕과 신하들과 함께 물러났다.
덩그러니 남은 왕민정과 호양보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예물을 타먹기는 그른 듯했다.
* * *
“사신들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두 사람 모두 불만을 자주 표출했으나 사행이 길어지자 정사인 왕민정은 포기한 듯하고, 부사인 호양보는 여전히 불평이 많지만 심적으로는 크게 꺾인 듯하였사옵니다.”
“행패는 부리지 않았고요?”
“신에게 이따금 따지기는 하였으나 노골적으로 발언하지는 않았사옵니다.”
“다행입니다.”
남이공의 증언에 동행한 관리들이 안도했다.
그들이 걱정한 건 사신들이 대놓고 행패를 부릴 경우였다. 공사를 전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막되먹은 자라면, 귀국한 다음에는 더욱 큰 문제를 일으킬 테니까.
‘그전에 나와 부딪치는 것도 걱정했겠지.’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건, 가도의 동강진 정벌을 추진하고 시행했다.
결과적으로는 잘 되었으니 신하들도 업적으로 여기지만 당시에는 조선을 망하게 할 거라며 호들갑 떨던 이도 많았다.
당시를 함께한 신하들이라면 주의할 만하다.
“사신들이 얌전하다니 다행이지만, 아직 안심하기 이릅니다. 두 사람이 방문한 의도가 분명하니 잘 매듭되기 전까지는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어째서 조선은 노추의 자식 넷이 모였는데 다 잡아들이지 않고 보내주었는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왜의 결탁을 의심했던 명나라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겠지.
국외의 세력을 대할 때는 편집적인 면이 있는 명나라다.
중원의 제국이라는 입지가 원래 독보적인 것이기도 하고, 또 주변의 위협적인 세력들에게 둘러싸인 형국이니까.
조선은 그런 명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오랫동안 맺어온 만큼, 명에 있어 많은 관심과 의심을 동시에 받을 수밖에 없다.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따지자면 조선은 명나라가 유일하게 기댈만한 지푸라기지.’
중원 제국의 오만한 인식과 체급 차이를 고려하면 딱 지푸라기가 맞다.
하지만 자기 자신 외에 유일하게 의지할 구석이 하나도 없는 것과 그 지푸라기나마 있는 건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물며 그 지푸라기가 요즘 사납게 덤벼오는 후금의 목줄을 채울 수도 있다면 말이지…….’
국왕을 책봉할 때는 보내지 않았던 사신을, 이번에 바닷길을 시험해보면서까지 보낸 이유가 무엇이겠나.
그만큼 조선이 정람기를 분쇄하고 아민과 자송합을 생포했다는 소식에 크게 놀랐기 때문일 거다.
이어서 아파태와 홍태주까지, 노추의 다른 두 자식이 조선을 방문하여 형제들을 데리고 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아주 경천동지했을 테고.
명나라로선 당연히 현지의 분위기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과연 조선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였나?
딴에는 전전긍긍한 셈이다. 명나라의 조선을 향한 인식이 보다 요, 금을 마주한 송대에 가까워졌다는 의미다.
좋은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