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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13화 (113/380)

인조, 명군이 되다 113화

농군들이 마지막으로 바쁜 날이었다.

새벽별 보며 논으로 들어선 농군들이 땀 훔쳐내며 벼를 베어낸 지도 몇 시진, 아낙들은 술 한 대접 곁들인 새참을 내어와 논길 비탈마다 부부가 주저앉아 담소를 늘어놓았다.

그러다 흙바닥 짚고서 늘어져 켜켜이 쌓인 짚단을 보며 가슴 뿌듯해하곤 했다. 그러다 보면 늦가을 바람이 아주 시원하여서 푹 젖은 가슴께와 등판이 빠르게 말랐다.

추석을 앞두고서 한양의 백성들 역시 지위의 고하를 막론한 채 들뜬 분위기가 감돌았다.

성 내부에는 경작이 금지되어 논밭이 없어도 그랬다.

농업을 나라의 근간으로 삼은 조선이었기에, 낫을 쥐지 않는 사람도 수확철이 되면 한 해의 고생이 다 끝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곳곳에 걸린 채붕綵棚으로 빠르게 식었다.

채붕이란 성문과 다리 따위에 색색의 등과 헝겊을 걸어 화려하게 장식한 것으로, 문외한 성외의 사람들이 본다면 그저 아름답게 여길 터였다.

그러나, 채붕綵棚은 일반적으로 명나라의 사신이 방문했을 때 달았다.

그리고 보통의 백성들에게 명나라의 사신이란 저들의 고혈을 빨아가는 괴물과 같았다. 폐주 때 패악을 부렸던 분호조의 수탈 명분 중 하나가 바로 사신의 접대였다.

사정이 이러하였으므로, 한양의 백성들에게 채붕이란 수탈의 예고나 마찬가지였다. 봐서 기분이 좋을 게 없었다. 마침 수확철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 * *

“갑자기 물어보려니 매우 민망합니다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주청사를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명나라의 사신단 정사 왕민정이 하마연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틈타 물었다.

자칫 추궁으로 비칠 수 있는지라 왕민정은 조심하였으나, 그래도 어째 따지고 드는 것처럼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보통 책봉의 상례란 조선이 먼저 책봉을 청탁하는 주청사의 파견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전에 방문한 조선의 사신은 주청하는 목적 없이 오직 동강진을 일소한 사건을 변무하러 왔다.

“과거 주청과 변무를 함께한 사신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마는.”

왕민정은 은근슬쩍 변명거리 하나를 차단했다. 마찬가지로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왕이 답했다.

“민생 때문입니다.”

“……민생이라니요?”

왕민정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지난 전쟁으로 온 백성이 도탄에 빠졌는데, 스무 해가 넘게 지난 최근까지 민생이 거의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왕민정은 생각했다.

‘과언이다.’

그가 지나온 고을마다 백성들의 삶은 풍요로웠다. 전쟁의 참상이야 왕민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이란 모름지기 풀과 같다.

상흔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세월은 몇 년이면 족하다.

더욱이 평안도는 근자에 동강진 및 정람기와 격전을 치렀다. 그런데도 왕이 말한 도탄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최근까지, 라고 하였으니 자신이 즉위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건가? ……그것과 주청사를 보내는 것이 무슨 상관인지.’

왕민정이 내심 품은 의문에 대답처럼 왕의 발언이 이어졌다.

“특히 폐주 때는 유난히 주청을 자주하여서 사신이 불필요하게 많이 왕래했습니다. 그 비용이 다른 데서 나는 것이 아닌즉, 주청을 꺼릴 수밖에 없습니다.”

왕정민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자신이 조선을 방문한 의도가 또렷한 만큼,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내가 주청사를 안 보냈다’는 대답에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부사 호양보가 물었다.

“책봉은 전하를 조선의 주인으로 공인하는 의례인데, 과연 그 중요함이 백성들 개개의 삶과 비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비할 수 없지요.”

“그런데 왜…….”

“백성들 개개의 삶이 책봉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왕의 대답에 뇌가 잠시 정지해버린 호양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아도, 호양보는 제 귀가 잘못된 것 같지는 않았다. 악공들의 고즈넉한 연주가 또렷했다.

그처럼 왕의 이어진 말 역시 또렷했다.

“누군가 말하기를, 임금은 배고 백성은 물이라고 하였지요. 이 사람은 물이 말라버리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마른 땅 위에서는 배도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음.”

호양보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백성이란 ‘그냥’ 있는 것이었으니까.

중원의 장대한 역사를 상고해보아도 나라가 찬탈을 당하거나 왕이 죽어 멸망한 경우는 부지기수이나 백성이 없어져 멸망한 경우는 없었다.

강토와 함께 적에게 빼앗기기야 하겠지만, 빼앗긴 땅도 백성도 주인만 달라졌을 뿐 그대로 있다. 원한다면 다시 빼앗으면 그만일 따름이다.

“공감하기 어려우신가 봅니다?”

“……예. 송구스럽지만, 저는 그렇습니다.”

호양보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에게 백성을 물로 비유하며 물이 마르면 배는 쓸모없어진다는 말은 마치 바다가 마를 걱정을 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사신을 박대하는 것도, 민생을 빙자하여 왕이 재물을 옳은 데 쓰지 않고 옳아매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다만 일국의 주인이 그렇다는데 틀린 지론이라던가, 변명 아니냐는 식으로 덤벼들 수야 없었다.

호양보는 어색한 침묵을 이어가는 것으로 불만을 갈음했다.

이에 왕민정이 대신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이처럼 민생을 소중하게 여기시니, 뭇 조선 백성의 삶이 부유해지고 나라가 강성해진 것은 온전히 그 덕일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이룩하여 옳은 곳에 재화와 힘을 쓰지 못한다면 왕도를 실현했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왕민정이 덧붙인 말에 조선의 왕은 수저를 내려놓고 손을 모았다.

“대인께서는 내가 재화와 힘을 올바르게 쓰지 못하였다고 보십니까?”

딱딱한 어조였다.

막 수저까지 내려놓으면서 불편한 기분을 가감없이 드러낸 참이었으므로, 왕민정은 왕의 생각을 곧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너희들 뱃가죽에 기름칠하는 것이 옳게 쓰는 것이냐는 추궁이리라. 예상한 것보다 훨씬 거친 반응이었다.

즉위 후 왕의 행보가 증명해주는 건 그가 작정했을 때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사신들이 이례적으로 노골적인 박대를 당한 것 외에도 동강진이나 정람기의 일이 그러했다. 대개 사람의 각오란 무위로 돌아가는 편인데 조선의 왕은 예외적인 면이 있었다.

그리고 쉽게 작정하는 편이기도 했다.

‘이크.’

왕민정은 호양보가 광경을 눈에 새겨두었기를 바라며 잠시 돌아보았다.

호양보는 다소 놀란 기색이었다가, 왕민정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무언의 당부와 불만이 한 차례 오간 뒤 왕민정이 말했다.

“대명에서는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그렇답니까?”

왕의 날 선 반응에 왕민정은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다소 의도적인 태도인 듯했다. 대답을 잘 고민해서 하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명확히 어떤 사람이 개진한 의견이라는 게 아니라, 뭇 세인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돈다는 것이지요.”

“…….”

“오늘날의 명나라와 조선은 불미스럽게도 분리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귀방의 사정이 잘 알려지지 않아, 오해가 발생하는 것도 어쩔 수 없지요.”

왕민경이 멋쩍게 웃자, 왕은 짧게 헛기침하고서 다시 수저를 들었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마음을 들었다가 놓는 듯하여 왕민경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왕은 무작정 몰아붙이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조선에서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고 하지요. 아무래도 폐방이 오해의 여지가 있는 모습을 보인 듯합니다.”

“예에……. 일전에 노추의 자식들이 한양을 방문했다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그게 사실인지요?”

“사실입니다.”

“어찌된 연유인지, 소관이 폐하께 상주드릴 수 있도록 자세히 알려주시겠습니까?”

왕은 못 말해줄 것도 없다는 듯 끄덕였다.

“의주부에 아민과 자송합이 지휘하는 정람기가 불시에 침공하였다가, 전멸했고 지휘관들이 포로로 사로잡힌 것은 아실 것입니다.”

“예.”

“그 뒤로 노추가 아파태를 보내 자식들의 송환을 요구했는데, 오직 몸값만을 의식하여 금으로써 대가를 치르는 작태가 무도하여 예법을 지적했습니다.”

“아…… 어떤?”

“살이호지전薩爾滸之戰에서 사로잡힌 조선군 포로 중 천여 명 즈음이 후금에 여전히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송환을 요구했지요.”

왕민경은 감탄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내심 당황했는데, 왕의 백성 타령이 생각보다 훨씬 진지했던 탓이었다.

사신으로 방문한 아파태는 도의상 어쩌지 못한다 치더라도 포로로 사로잡은 아민과 자송합은 후금 내에서도 세력이 작지 않았다.

비록 부친이 노적에게 숙청당했다지만 아민은 공식적인 서열이 2위고 자송합은 어릴 때부터 노적이 친히 거두어 제 자식처럼 길렀다.

‘그런 자들을 백성 천 명과 교환한다고?’

노적과 그의 수하들을 처단하기 위해 9만의 군병을 내었던 대명이었다.

그런데 싸움에서 패하여 부끄럽게도 포로로 전락한 백성들과, 그것도 고작 천 명을 위하여 두 사람을 다시 풀어주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시 두 사람을 잡아들이기 위해서는 천 명의 인명으로는 택도 없기 때문이었다.

‘……백성을 너무 심각하게 아끼는 게 아닌가?’

아민과 자송합의 신변을 대명에 양도했다면 조선은 엄청난 이익을 취할 수 있었을 터였다.

조선이 두 당 십만 냥의 은자를 불러도 명나라는 반드시 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허어, 참.’

왕은 사정을 마저 설명했지만 왕민정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조선이 노적의 자식들을 풀어준 이유를 알았을뿐더러, 그보다도 이를 황제께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가늠되지 않았던 탓이다.

‘고작 일천의 인명을 위해서…….’

왕민정은 조선의 왕이 돌았다고 생각했다. 무례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 *

하마연이 파한 뒤.

“나의 해명을 전혀 믿지 못하는 기색이던데요.”

왕은 남이공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두 사신의 반응이 마음에 걸린 탓이다.

“대명은 매우 번성하여 인구가 매우 많아 아조만큼 인명을 중하게 여기지 않사옵니다.”

왕은 생각했다. 하기야 중국이라면 사람 목숨은 우습게 여길 법했다.

“곤란하군요. 나는 진심을 그대로 말해주었거늘, 사신들이 해명을 터무니없이 여기고 자체적으로 해석해 황제와 명 조정에 전달한다면 오해가 커지겠습니다.”

사신들을 ‘근검절약勤儉節約’하여 맞이했으니 두 사람이 대놓고 따져들지는 않아도 속된 말로 빈또가 상했다는 건 명약관화다.

이는 자체적인 해석에 얼마든지 악의가 들어갈 수 있음이다.

‘존속조차 불투명한 명나라라지만 뭇 선비들에게는 여전히 선망하는 상국이지.’

명나라가 조선을 노골적으로 적대한다면 크게 귀찮아진다.

이에 남이공이 답했다.

“신이 생각해둔 방편이 여럿 있사옵니다.”

“말씀해보세요.”

“……하오나, 지금 상황에서는 마땅히 내세울 만한 것이 없사옵니다.”

잘 나가려다 이러는 건 또 뭔가.

“어째서요?”

“환심을 사는 쉬운 방법은 뇌물을 쓰거나 여러 사람이 고생하여 편의를 봐주는 것이옵니다. 하오나 전하께서는 용납하지 않으실 터이니, 백방을 생각해두어도 소용이 있겠사옵니까?”

남이공이 난처한 얼굴로 반문했다.

가장 쉬운 방법을 배제하고서 어려운 일을 해내라니, 따지자면 두 다리를 쓰지 않고 뛰어보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왕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경을 예조판서에 제수한 이유가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서였는데, 그간 쉬운 방법만 마련해두었다가 막히니 한다는 말이 고작 그것입니까?”

뇌물로 환심을 사는 건 짐승도 할 줄 알았다. 일국의 장관이라면 두 다리가 없어도 뛸 수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쓸만한 방편이 없으시다면 경께서는 지난 몇 달간 녹봉은 받았으나 무위도식하신 셈이로군요. 덕분에 다른 사람이 지혜를 발휘할 여유마저 사라졌으니, 그냥 넘어가기는 어렵겠습니다.”

왕이 처분을 전제하고서 단호하게 이르자 남이공은 옛 순간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실망한 왕에 의해 김신국과 함께 경회지에 입수하던 순간이었다.

“저, 전하! 신이 백방百方을 마련해두었사온데 어찌 염두에 둔 비장의 한 수가 없겠사옵니까?!”

“비장의 한 수라…….”

언제는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다더니?

남이공은 그새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핥았다.

왕은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두 사람이 확언해 주기를 바랍니다. 귀국한 다음 이상한 소리로 아조를 모함하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고 말입니다.”

남이공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확언을 받아내는 건 간접적으로 구슬려 성사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염치 불고하고서 대놓고 청탁해야 그나마 가불가는 논할 수 있었고, 그런다고 두 사람이 응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비장의 한 수가 무엇인지 물어보지는 않겠습니다. 이렇게 된 건 예조판서께서 안일하셨던 대가라고 생각하세요. 응하지 못하시겠다면 당장 예판을 거꾸로 붙들어서 경회지에 빠뜨리겠습니다.”

“…….”

* * *

“사, 살려주십시오…….”

남이공은 사신들 앞에 무릎꿇었다.

비장의 한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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