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14화
“사, 살려주십시오…….”
남이공이 비장의 한 수를 보이자 왕민경과 호양보는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가, 호양보 쪽이 일어나 남이공을 일으켜 세웠다.
“남 대인,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남이공에 대한 인식이라면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던 두 사람이다.
한양에 당도할 때까지 원접사로 동행했으나, 사행에서 본전치기 어려워졌다는 사신들 나름의 고충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막상 남이공이 앞에서 무릎 꿇고 눈시울을 붉히니, 도저히 꼴 좋다고 여길 수 없었다.
“하마연이 파한 뒤 전하께서 소관에게 이르시기를, 두 분께서 즐거워보이지 않으셨다며 소관이 직무를 다하지 못한 죄로 경회지에 빠뜨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어…….”
경회지라면 왕민정과 호양보도 들어 알고 있었다.
사신으로 방문한 남이공이 북경의 식자들에게 왕을 소개하면서, 엄벌하는 대신 궁궐의 연못에 빠뜨려 가볍게 다스렸다는 미담이 한때 퍼진 덕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살려달라고 하십니까?”
고작 연못에 빠질 뿐이거늘. 남이공이라면 처음도 아니다.
“전하께서 이번에는 거꾸로 붙잡아놓고 빠뜨리겠다고 하셨사옵니다.”
“…….”
미담이 순식간에 괴담이 되는 순간이었다.
호양보는 이참에 솔직하게 한 마디 할까 싶었다. 원접사께서 미진한 점이 없지는 않으셨다고.
그러나 그것이 고개만 물속에 처박힌 채 죽을 일이냐면, 선뜻 긍정할 수 없었다.
“전하께서 오해하신 듯합니다.”
“오해요……?”
“저희가 기분 좋아 보이지 않았다는 것도 이제 깨달았습니다. 먼길 오느라 쌓인 여독이 미처 풀리지 않은 탓이겠지요. 연회를 베풀어주신 전하께 도리어 근심을 안겨드렸으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대인…….”
남이공은 감격에 찬 얼굴로, 재차 무릎을 꿇더니 그대로 호양보에게 나아가 옷자락을 붙들었다.
“아, 아니…….”
“대인!”
남이공이 옷자락에 기댄 채 기둥 없는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자 호양보는 기겁하며 밀어냈다.
“이러지 마시지요!”
한동안 남이공은 달라붙고 호양보는 밀어내는 힘싸움이 벌어졌다가, 두 사람 모두 호흡이 거칠어졌을 즈음에야 남이공이 물러나서 말했다.
“대인께서 소관의 목숨을 거듭 구명해주시니 거듭 감읍할 따름입니다. 전하께는 말씀하신대로 아뢰겠습니다.”
“예, 예……. 저희는 괜찮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망극합니다.”
남이공이 예를 표하자 왕민정과 호양보가 맞절로 응했다.
그리고 남이공이 떠나니, 숙소는 한 차례 태풍이 휩쓸었다가 그친 듯해 호양보는 지친 얼굴로 주저앉았다.
* * *
사신들의 수난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또 한 번의 연회가 있은 뒤, 남이공이 다시 찾아와 이번에도 왕이 노하였다면서 하소연한 것이다.
왕민정과 호양보는 재차 진땀을 빼며 남이공을 진정시켜야 했고, 애써 숙소에서 돌려보냈다.
그것이 세 번째에 이르자 사신들도 하나의 합의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우연이고, 두 번은 필연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세 번째는 무엇인가?
모략이라고 한다.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했다.
왕민정은 자신의 허전한 다리 사이를 채우려드는 남이공을 완강하게 밀어내고서 단호하게 말했다.
“남 대인께서 좀처럼 안도하지 못하시고 거듭 찾아오시니, 저희도 참 난처합니다.”
“……참으로 송구합니다, 대인.”
남이공이 눈물을 글썽이며 답했다.
그의 저의를 막 읽어낸 참이었던 왕민정은, 고양된 감정으로 붉게 달아오른 남이공의 코 아래 구멍에 검지와 중지를 걸어 당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차라리 자신의 상상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이 짓거리도 이제는 끝내자 싶었던지라, 왕민정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남 대인께서 확실하게 안도하실만한 방법이 있다면 부디 알려주십시오. 그게 남 대인만 아니라 저희에게도 이로울 듯합니다.”
그러자 남이공은 잔뜩 반색하여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헉 숨을 들이키기까지 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예. 기탄없이 말씀해주십시오.”
곁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호양보가 속으로 덧붙였다.
제발.
“소관이 근심은 두 대인께서 미진한 접대에 상심하여, 혹 폐하께 폐방과 전하의 진심을 다 전달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겠지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갈대와 같아 쉽사리 흔들리니 두 분을 향한 신뢰만으로는 좀처럼 안심되지 않습니다.”
왕민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신뢰만으로 부족하다면, 어디 눈에 보이는 무언가라도 남기라는 말인가?
“…….”
남의공의 진의를 깨달은 왕민정이 속으로 탄식했다.
많은 수확을 거두느라 흥겨웠어야 할 사행은 본전치기도 못 하게 만들어놓곤 제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며 물증을 남기란다.
그러나, 중외 변방에 수결이라도 남긴들 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눈앞의 남이공이 북경까지 쫓아와 제가 어떤 보고를 올리는지 감시할 것도 아닐 터다.
‘별 시답잖은 것으로…….’
왕민정이 미간을 찌푸리자 남이공이 비 맞은 개새끼마냥 처량한 표정으로 슬쩍슬쩍 안색을 살펴왔다.
그것이 다분히 의도적인 반응임을 알았으므로 왕민정은 당혹감에 뭍어나는 불쾌함이 짙어져갔으나, 그렇다고 눈앞의 교활한 배신陪臣을 무작정 쫓아내지도 못했다.
이번에 세 번째였다.
네 번째가 되면 얼마나 더 귀찮게 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아예 작정하고서 들러붙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 좋소!”
“왕 대인!”
와락 달려든 남이공이 찐하게 포홍하자 왕민정은 폐부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한숨이 올라왔다.
이 상황이 불쾌하고 어처구니없는 건 둘째 치고 최대한 빨리 끝나주었으면 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왕민정은 일필휘지로 각서를 작성한 뒤 호양보와 함께 수결을 남겼다.
“이 정도면 안심하시겠습니까?”
왕민정이 먹고 떨어지라는 식으로 각서를 펄럭거리자, 남이공은 두 손 공손히 받아들였다.
“망극하고 또 망극합니다, 대인!”
“그래요……. 안심하셨다니 매우 다행입니다. 저희는 요 며칠간 의아하게도 매우 피로한지라 휴식을 더 취해야 할 듯한데, 부디 자리를 비워주시겠습니까?”
제발 꺼져달라는 왕민정의 간곡한 부탁에 남이공이 손을 모으고서 답했다.
“여부야 있겠습니까. 난처하게 해드렸습니다. 왕 대인, 호 대인. 푹 쉬십시오. 남 모는 서둘러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 남이공은 지극히 높은 윗사람을 대하듯 뒤로 종종걸어 빠져나갔다.
한동안 매우 번거롭게 굴었던 만큼 사죄의 의미로 마지막에는 최대한의 예를 보인 것일까?
그러나 왕민정은 숙소를 나선 남이공이 곧장 정색하고서 각서를 품에 넣는 광경이 빤히 그려졌다.
“간교한 위인입니다.”
호양보가 말을 이었다.
“나중에 귀찮아질 수도 있는데 수결은 왜 남기셨습니까?”
“수결하면 ‘나중에’ 귀찮아질 ‘수도’ 있지만 수결을 아니한다면 당장 확실하게 귀찮아졌겠지.”
“…….”
* * *
남이공에게 비장의 한 수가 정말로 있기는 했다.
판서 체면에 구차한 모습을 보이려니 내키지 않았을 뿐.
그러나 구차해지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해지는지라 남이공은 구차해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진짜 죽이려 들겠느냐마는……, 익사까지는 아니어도 뒤집혀서 입수하는 건 얼마든지 실현될 수 있지.’
그리고 지난 입수 때는 설사로 지독하게 고생한 남이공이었다.
시쳇발로 가죽피리를 분다고 하는데, 남이공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강제로 측간을 오가며 축축한 피리를 불어대야 했다. 덕분에 기력과 미주알이 남아나질 않았다. 그 정도면 살아 있어도 반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좋지 못한 추억을 상기한 남이공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튼 성과를 보았으니 다행이었다. 비록 판서대감 체면이 많이 상하긴 했지만, 곧 떠날 사신들을 제외하면 누가 본 것도 아니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선선히 입궐한 남이공은 왕의 처소 앞에서 청대請對했다.
한 차례 오간 궁인이 왕의 허락을 전했고, 남이공은 각서를 품은 가슴께에 손을 미리 집어놓고서 계단을 올랐다.
왕은 자신의 직무능력을 의심했었다.
무위도식이라니! 그래도 명나라까지 직접 방문하여서 변무만 아니라 책봉까지 해결하고 왔는데 너무 심한 말 아닌가.
그것을 전하께서도 알아야 했다.
“예조판서 남이공 입시이옵니다.”
“들라 하라.”
너머에서 윤허가 떨어지자 미닫이문이 좌우로 열렸다.
안쪽 어좌에는 왕이 자리하였고, 맞은편에는 우의정 이상의가 (작년부터 질리도록 자랑하고 다녔던) 초피갖옷을 걸친 채 부복하고 있었다.
무언가 말이 오가던 중이었을까.
“예판.”
왕이 맞은편 자리를 권하자 남이공은 방석을 끌어다 이상의보다 반 걸음 뒤에 자리했다.
판서대감이라도 의정보다는 품계가 떨어지니.
이상의는 뒤로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짇굳은 얼굴을 하고서 자신이 걸친 초피갖옷을 툭툭 두드렸다.
‘아니, 이 양반이…….’
늦여름이나 진배없던 입추立秋부터 벌써 가을 아니냐며 기를 쓰고 초피갖옷을 걸치고 다녔던 이상의다.
남이공은 애써 그 밉살맞은 몰골에서 눈을 떼고서 어좌를 향해 부복했다.
“신 남이공, 전하께서 친히 내리신 엄명을 완수하였사옵니다.”
“나의 엄명이요?”
“예.”
남이공은 무릎을 꿇은 채로 슬금슬금 나아가 품에서 각서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어 펼친 왕의 시선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갔고, 남이공은 자신감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왕이 말했다.
“와, 이걸 진짜로 받아오셨네.”
“…….”
“예조판서께서 사신들 숙소를 자주 방문하신다는 보고는 들었습니다. 두 태감이 탐욕스러워 말로 설복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로 ‘비장의 한 수’가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예.”
남이공은 그것이 무엇인지, 부디 왕이 물어보지 않기를 속으로 되뇌었다.
“예조판서, 혹 저들에게 무언가를 약조하고서 각서를 받아내신 것은 아니지요?”
“결단코 아니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전하께 일언반구 없이 약조하여 사신을 매수하겠사옵니까?”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었다.
“노골적으로 아조를 비방할 의도를 품었다면 이런 각서는 제 발에 저려서라도 남기지 못했겠지요. 예조판서 덕분에 사신들이 극악하지 않음을 파악했습니다. 덕분에 근심을 덜었어요.”
처음 했던 말은 농에 불과했다는 듯한 왕의 진지한 치하에, 침울했던 남이공의 얼굴이 밝아졌다.
“전하께서 명하신 바를 그대로 수행하였을 뿐이온데 소관에게 공이 있겠사옵니까? 그저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왕은 말 아끼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비장의 수를 장담한 남이공이 사신들의 숙소를 거듭 방문했다. 관심이 붙는 건 당연지사였다. 궁인들을 시켜 내막을 알아오게 했다.
드러난 사실은 예상과 다소 달랐다.
그만큼 예조판서 자리가 소중한가 싶었다. 사신들이 이참에 잘 됐다는 식으로 나섰다면 모르겠으되 순진하게 쩔쩔매었으므로 미래를 짐작했다.
그리고 짐작대로 되었다.
“부담없이 세자책봉례를 거행할 수 있겠습니다.”
사신들이 대놓고 추궁을 연유로 조선을 방문한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