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15화
“동번東藩은 대대로 예를 지키고 의를 준수한 바, 왕은 이어진 것을 공손하게 잘 간직해야 할 것이다.”
“…….”
“또한, 근래 나라에 일이 많아 미리 대비해야 하므로 이에 세자를 책봉하니 왕은 훈계를 분명하게 알려주어 세자로 하여금 국가를 잘 보전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에 유시한다.”
세자책봉을 공인하는 황제의 칙서였다.
그동안 사신들이 책봉을 두고 어떤 강짜를 부릴지 몰라 경계해왔다.
하지만 칙서의 전달은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의무여서인지, 혹은 남이공에게 잔뜩 시달렸기 때문인지 별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왕민정이 말했다.
“소관들은 사신들로서 역할을 다 하였으니, 이만 귀국하고자 하옵니다.”
“어렵게 찾아주셨는데 너무 서두르시는 건 아닐는지요? 아쉬운 마음이 큰데 마지막으로 예를 다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사신이 오래 머문다면 귀방에 폐가 될 것입니다.”
“전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청하는 마지막 부탁이니 부디 두 대인께서는 응해주세요.”
왕민정은 짐짓 고민하는 듯하더니, 마지못해서라는 듯 손을 모으고서 응했다.
“전하께서 청하시니 부득불 사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잠시만 더 머무르다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로 권하고 사양하며 아옹다옹하였으나 이것도 상마연을 앞두고 행해지는 의례적인 절차다.
하지만, 이제부터 벌어질 일은 아니다.
“두 분의 발걸음을 이역만리 폐방에 묶어두었으니 염치상 사과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보상이라기엔 많이 미진하지만, 부디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왕민정이 다소 당황한 낯으로 사양했다.
“보상이라니요? 아닙니다.”
왕민정은 마치 선물을 사양하는 친구가 넣어두라며 하는 것처럼 손사래치더니, 막상 관리들이 무언가를 가져오자 시선이 슬쩍 옆으로 향했다.
“이건…….”
왕민정의 마음에도 없던 사양이 그치고, 때마침 관리가 선물을 펼쳤다.
경쾌한 금속음과 함께 은백색으로 빛나는 갑주였다.
명나라에서는 물론 조선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양식이었다. 왕민정도 대강은 짐작한 기색이었다.
“이패륵 아민이 착용했던 갑주입니다.”
“……오오.”
왕민정이 옅게 감탄했다.
명나라에서 사신까지 보내 조선이 노적의 자식들을 그냥 풀어준 연유를 캐물은 건 그만큼 명나라가 그들을 심대한 위협이자 고가치 표적으로 여기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면 아민은 후금에서만이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 아민이, 전장에서 실제로 착용한 갑주라면 가치가 낮다고 할 수 없었다.
‘하물며 이건 아민을 직접 사로잡은 조선의 왕이 진품을 보장하는 물건이지.’
왕민정은 예상치 못한 선물에 마음이 잔뜩 달아올랐는지 연신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당장이라도 낚아채서 직접 만져보고 싶다는 기색이었다.
“정녕 사양하시겠습니까?”
농을 던지니 왕민정이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극히 민망하지만, 이런 선물이라면 감히 사양할 수가 없습니다.”
본래 탐욕이라면 차고 넘쳤던 왕민정이다.
그러나 (딴에는) 조선의 땅을 밟은 이래 대접이 워낙 부실하여서, 보름 굶을 사람이 허기를 잊듯이 잊고 있었겠지.
그러나 갑자기 천금을 들여도 구하지 못할 진귀한 선물을 받으니 보름 굶주린 자가 음식 앞에서 갑자기 허기지듯이 물욕이 마구 샘솟았으리라.
어찌 빈말로도 사양할 수 있을까.
“전장에서 함께 거두어들인 무기도 있습니다. 갑주걸이에 구색을 맞춰 함께 갖춰놓는다면 꽤 볼만한 장식이 될 겁니다.”
“과연 전하의 말씀대로 상상해 보니,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실로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왕민정은 더욱 반색하여서, 허리를 살짝 숙인 채 맞잡은 손을 연신 비벼댔다.
아마 황제나 위충현 앞에서는 자주 보여주었을 듯한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모습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는, 왕민정과 마찬가지 심정일 호양보가 잔뜩 기대한 눈빛으로 안색을 살펴오고 있었다.
조선이 잡아들인 정람기의 지휘관은 아민만이 아니었으니까.
“호 대인?”
“예, 예!”
호양보는 마치 황제의 부름에 응한다는 듯 소매를 겹친 채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그 역시 물욕에 완전히 빠져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좋아해준다면, 나도 좋지.
“자송합의 갑주입니다.”
“오, 오오…….”
호양보는 아민의 것처럼 은백색으로 반짝이는 갑주를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렸다.
“두 분께 드리겠습니다. 예조판서가 갑자기 수결을 가져오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송구스러운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보상이라는 말에 왕민정이 사람 좋은 낯으로 답했다.
“송구스러운 사정이라니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남 판서가 수결을 청한 건 모범이 될 만한 충성을 위해서이니 응당 응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왕민정은 못 박아두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단지 그 도리에 맞게 처신하였을 뿐인데 이처럼 귀한 선물을 내려주시니 감사한 마음이 한량 없습니다.”
“두 분께서 기쁘게 받아주시니 내가 더 기쁩니다. 괜찮으시다면, 내가 폐하께 진상할 물품이 있는데 전달해주시겠습니까?”
“물론이옵니다. 기탄없이 말씀해주시지요.”
마지막으로 소개된 건 피에 젖은 정람기 군기였다.
아민과 자송합이 실제 사용하였던 무구에 비해서는 희소성에 크게 떨어지는 만큼, 왕민정과 호양보는 딱히 탐하려 들지 않았다.
가치보다는 의미가 더 중요한 선물이었다.
“내가 황상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민생이란 따지고 보면 천하의 도에서 아주 하찮은 것일 수 있는데, 폐하께서는 책망하지 않으시고 먼저 마음을 써주시니 송구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한량없습니다.”
“아아, 군주의 본분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데 있으니 민생을 어찌 하찮게만 여기겠습니까? 치국의 근본이므로 황상께서도 책망하실 일이 아닌 것입니다.”
왕민정은 손을 모은 채 빙긋 웃고서 덧붙였다.
“또한 성상의 충심이 이토록 변치 않았거늘 어찌 황상께서도 먼저 마음을 써주시는 데 꺼림이 있겠습니까? 예물은 잘 포장하여서 전달하겠습니다.”
“두 분께 재차 감사드립니다.”
허리를 숙이니 왕민정과 호양보도 희희낙락한 낯빛으로 맞절했다.
“상마연의 일정은 사람을 시켜 차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예, 예. 그간 존체 강녕하십시오.”
나는 뜻밖의 수확에 크게 기뻐하는 사신들을 뒤로 하고서 발을 돌렸다.
* * *
“우상의 계락이 아주 잘 먹혀들어갔어요.”
아민과 자송합의 갑주로 두 사신의 환심을 사자는 꾀는 우의정 이상의가 낸 것이었다.
따지자면 뇌물로 마음을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겠으나 효율에 있어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해당 갑주들은 적장에게서 취한 전리품인 만큼 조선에서도 가치가 낮지는 않으나, 의미 때문에 바다 건너에서는 더욱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반대로 의미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기 어려운 백성들 사이에서는 한낱 거추장스러운 쇠옷에 불과할 따름이다.
효용이라봐야 녹여서 농기구나 만드는 것이 전부겠지.
‘아민과 자송합의 무구를 적재적소에 이용한 셈이지…….’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성상께서 늙고 병든 신하에게 과분한 자리를 맡겨주셨는데, 어찌 성심을 다하여 보답하지 않겠사옵니까?”
이상의가 대답과 함께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이상의의 등판에서 반지르르한 털가죽이 윤기를 과시했다. 이상의가 작년 늦봄까지도 무리해서 걸치다가, 근자에 들어 다시 걸치기 시작한 초피갖옷이었다.
갑주를 하사하여 환심을 사자는 이상의의 꾀가 어디에서 나왔을지 뻔했다.
‘유경험자라서 잘 안다는 거지.’
* * *
상마연을 마치고 사신들을 환송했다.
왕민정과 호양보는 올 때와는 다르게 희희낙락하여 손까지 흔들어주었고, 함께 배웅 나온 신하들은 한숨 돌렸다며 안도했다.
한산해진 궐문 아래에서.
영접도감迎接都監의 제조를 돌아보았다.
영접도감이란 사신이 내방했을 때 응대에 필요한 관물을 확보하는 임시 관청이다. 역할이 호조의 업무와 매우 밀접하여 전통적으로 영접도감의 제조는 호조판서가 겸했다.
나의 시선에 김신국이 공손하게 말했다.
“하문하시옵소서.”
“이번 사신 내방에 비용이 얼마나 발생했습니까?”
“온전히 성상께서 발휘하신 지모와 용단의 덕으로, 은자로 치환한다면 대략 오천 냥의 비용이 발생한 것으로 사료하옵니다.”
“……최대한 아낀다고 했는데 그만큼이나 썼다는 말입니까?”
“기존에 사신이 방문한 경우를 상고해본다면 지극히 괄목할 만한 성취인 줄로 아뢰옵니다. 폐조 때 내방한 유용劉用 및 염등冉登은 각기 대접하는 데 사용한 은자가 4만 냥이고, 유홍훈과 양도인은 합쳐서 약 7만 냥을 사용했습니다.”
이러니 조선이 맛집으로 소문날 수밖에 없지…….
여기에 영의정 이원익이 덧붙였다.
“도감에서 사용한 오천 냥은 온전히 조례를 수행하기 위함으로, 불필요하게 허비한 것이 아니옵니다. 사신들 역시 아민과 자송합의 갑주 외에는 별도의 예단이 없지 않았사옵니까?”
그건 그랬다.
이미 맛집으로 전락한 조선의 사신 접대 상례에 따르면, 황제의 조서를 개봉하고 낭독하는 개독례開讀禮 때만 사신에게 일만 냥과 인삼 삼백 근을 지급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통틀어서 은자 오천 냥만을 사용했다는 건, 진짜 최소한의 경비만 들었다고 봐도 됐다.
‘……쓴 게 아니라, 아꼈다고 봐야 하나?’
사실 왕민정과 호양보는 원 역사에서도 조선을 방문했던 자들이다.
특히 호양보는 패악이 심해서 예단(뇌물)이 충분하지 않다며 기물을 파손하거나 고의적으로 행사를 지연시키는 등 행패를 저질러댔다.
그런 난동에도 인조는 매양 빌빌대면서 비위를 맞춰주느라, 두 사신을 접대하는 데 사용한 비용이 총 은자 10만 냥에 달했다.
내가 작정하고서 허리띠를 졸라맨 게 그 때문이다.
풀어주면 얼마든지 막 나갈 놈들이니까.
그런데 나는 고작 5천 냥만을 사용했으니, 오리지널 인조와 비교하면 9만 5천냥의 은자를 아낀 셈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을 올바른 데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원익이 말했다.
“그동안 사신 접대에 허비되는 비용이 극대로 많아 내방이 있을 때마다 제도諸道에서 결마다 베를 거두느라 백성들이 매우 괴롭게 되었사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법도를 바로 세우시고 폐단을 엄금하시니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추켜세우는 게 은근히 필사적이었다.
당장 위로하지 않으면 다음 사신 내방 때는 허리를 더 졸라맬 수도 있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염려는 다른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다들 일제히 입을 맞추어 찬동했다.
‘대강 만족하고 있던 참이었지만, 오해를 풀어줄 필요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