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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명군이 되다-116화 (116/380)

인조, 명군이 되다 116화

석조바닥 사이로 다듬은 돌기둥이 비죽비죽 솟아나 있다.

한때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 서북쪽의 누각 터였다.

영건사업에 매몰되었던 광해군이 어째서 다른 궁궐은 지어대면서 경복궁은 내버려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자신에게 상흔만 남겨두고 떠난 못난 부친이 떠올라서일까?

간만에 경회루를 방문한 건 곯려줄 신하가 있어서나, 비공식 업무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얼마 전 궁인들이 금천禁川의 물길을 막았다.

금천은 경복궁 내부를 관통하는 인공 하천으로 경회지의 주요 수원이다.

수원이 있다면 출수구도 있게 마련.

경회지는 그저 고여있기만 한 연못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관리부실로 시궁창이 되어 날벌레와 모기의 온상이 되었다. 물길을 막은 이유였다.

궁인들은 저들 키보다 깊은 경회지 바닥으로 내려가 축축한 뻘과 조류를 걷어냈다.

그동안 물 아래 잠긴 오물이 얼마나 많았는지 궁인들이 진땀을 빼고도 작업이 이어졌다.

“이러면 내년부터는 말썽을 일으키지 않겠지. 하지만 갈 길이 멀구나.”

실없이 흘린 혼잣말이 아니었다.

“……재건에 마음이 있으시옵니까?”

세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어보았다.

최근 명나라의 책봉이 아닌, 이전의 진짜 책봉 때 세자에게 한 당부가 있었다.

경복궁은 재건하지 말라고.

경회지를 청소하며 갈 길이 멀다고 했으니 오해할법 했다.

“이 아비가 말한 길이란 위생을 말하는 것이다.”

“……?”

이 시기의 위생衛生이란, 말 그대로 생명生을 위衛한다는 뜻뿐이다.

청결을 통한 질병의 예방을 의미하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까마득한 미래의 일.

더욱이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오늘날에는 청결과 건강이 결부되지 않았다. 다만 호사로 여길 따름이다. 질병의 원인을 중세 서구와 마찬가지로 여기癘氣, 즉 나쁜 기운에서 발생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걸 다 어떻게 설명할지 가늠이 안 잡히네.’

미래에서는 지식으로도 치지 못할 소소한 상식이 오늘날에는 불가해의 염불에 가까웠다. 그냥 그렇다, 이상의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수 세기 축적된 지식을 풀어내야 하는 탓이다.

‘끙.’

최대한 뭉뚱그려 설명할 수밖에.

“고이고 썩은 물이 강강康强(건강)을 해친다는 건 세자도 알고 있을 것이다.”

“예!”

“마찬가지로 고이고 썩은 물에서 살다가 우화하는 모기도 성질이 다르지 않다. 그래서 연못을 바닥까지 드러내고 쌓인 것을 치워내는 것이다.”

“아아. 위생衛生이라 하교하신 바를 알겠사옵니다.”

위생이 미래에서 가지는 의미 역시 궁극적으로는 생명生을 위衛하는 것이니, 그런대로 의미가 통했다.

“그런데 한양에는 경회루의 연못처럼 비가 내리지 않으면 고이고 썩어 악취를 풍겨대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개천開川을 이르시옵니까?”

“그래.”

미래에는 청계천이라 불리게 되는 개천이다. 그러나 청계천과 오늘날의 개천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개천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금세 말라버리는 건천乾川이다.

문제는, 수도에서 발생하는 모든 오수가 이 개천으로 모여든다는 점이다.

비가 온다면 오수와 오물이 물줄기를 타고 흘러가겠지만 반대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당연히 오수와 오물은 말라버린 강바닥에 그대로 고이게 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모든 악의란 악의는 다 뭉쳐놓은 것 같은 존재감을 내뿜지…….’

더욱 끔찍한 것은, 오수와 오물이 계속해서 퇴적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악취 등 평소에 끼치는 해악이 나날이 심해지고, 한 번씩 큰 비가 내린다면 높아진 강바닥 탓에 오염된 강물이 온 한양에 번지게 된다.

따지자면 개천은 집구석의 반쯤 막힌 변기라 할 수 있었다.

물도 거의 내려가지 않으면서, 한 번씩 역류하여 온 집안에 오수를 깔아놓는 변기.

“아비가 갈 길이 멀다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개천은 한양을 관통하는 강이니, 정비하는 데 들어가는 수고로움이 연못을 청소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지 않겠느냐?”

집구석의 변기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기술자를 불러 맡기면 된다.

그러나 개천이라는 사고뭉치는 그리 단순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거대한 자연물이기 때문이다. 방대한 영역에서 실시간으로 상태가 달라진다. 기계가 없는 오늘날에는 오롯이 인력으로만 맞서야 하는데 보통 일이 아니었다.

“괜히 제순帝舜이 황하를 다스린 우禹에게 제위를 넘긴 게 아닐 것이다.”

실제로 당대에 어떤 역사가 펼쳐졌느냐와는 별개로, 이러한 신화가 말해주는 건 치수가 황위의 정당성이 될 정도로 대단한 일이라는 점이다.

“개천이 어떻게 황하에 비견되겠느냐마는…….”

“대천이나 건천이나 까다롭기는 매한가지 아니겠사옵니까!”

세자가 밝게 말했다. 부왕의 치수도 중원 황제의 치수처럼 대단하다고 추켜세워주는 거다. 여간 가상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머리를 쓸어주니 세자는 아비가 제 마음을 훤히 들여본 것이 민망했던지 얼굴을 붉혔다.

“세자라면 개천을 어떻게 다스리겠느냐?”

세자는 바닥을 드러낸 경회루 연못을 보곤 답했다.

“날이 가물어 강이 말랐을 때 사람을 시켜 쌓인 것을 치우고 제방을 손보게 하겠사옵니다.”

“날이 계속 가물지는 않을 텐데, 비라도 온다면 공사가 크게 지연되겠다.”

“많은 사람을 일시에 동원하면 단숨에 공사를 진척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냐?”

“……5천 명 정도라면 충분하지 않겠사옵니까?”

확신은 없는지 조심스러운 투였다.

“개천을 개천開川이라 한 이유는, 원래 있던 물줄기기 아니라 풍수지리에 걸맞게 강川을 파냈기開 때문이다.”

치수한 전례가 있다는 뜻이다.

“그때 동원된 백성이 5만 3천여 명이다.”

“……!”

세자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5천 명으로는 택도 없었다.

강을 파내는 데 5만 명이니 정비에는 5천 명으로도 충분치 않겠느냐만, 그렇지 않다.

조선이 한참 치수에 힘쓰지 못한지라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개천의 상황도 극도로 악화하여 대대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게 됐다.

이때 동원된 사람이 품팔이와 병사, 일대 주민과 상인 등을 포함해 총 21만 5천여 명이 준천사업에 동원됐다.

소요된 기간은 개천공사와 비슷한 2달가량이었다.

‘지금 개천이라면 영조 때보다야 상태가 덜 나쁠 테니 21만 명이나 부릴 필요는 없겠지만, 5천 명은 너무 부족하지.’

나는 세자에게 다시 물었다.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일시에 정비를 마치는 게 좋겠느냐, 혹은 시간이 오래 소요되더라도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게 옳겠느냐?”

“시급한 일이라면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서둘러 마치는 곳이 옳겠지만, 아니라면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는 것이 옳을 것이옵니다.”

“음, 정론이다. 그러나 다시 물어보마. 5만 명을 동원하면 두 달만에 정비를 마칠 수 있겠지만, 십분지 일인 5천 명을 동원하면 족히 3년은 걸릴 것이다.”

“……어찌하여 스무 달이 아닌 3년이옵니까?”

“공사를 할 수 있는 짧은 건기가 지나면 다시 건기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않겠느냐.”

“아…….”

세자는 아차 싶었다는 얼굴로 탄식했다.

“5만 명을 두 달 부리는 것과, 5천 명을 삼 년 부리는 것. 어느 쪽이 백성의 부담이 더 적다고 생각하느냐?”

“…….”

세자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관점에 따라서 정답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태종과 영조는 개천과 준천을 시급하게 여겼으므로 전자를 선택했을 뿐이다.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따로 있다.”

“무엇이옵니까? 하교해주시옵소서.”

“해마다 오백 명을 선발해 개천을 정비하는 것이다. 지금은 개천이 너무 오래 방치되어서 불가능하지만, 아비가 한 번 공들여서 정비해두면 세자의 치세에서는 능히 가능한 방법이지.”

그리고 그렇게 해야 했다.

기껏 공을 들여 정비해두었는데, 덕분에 한동안은 말썽일으키지 않겠다고 방치하면 후대에서 또다시 대사업을 일으켜야 하니까.

아비의 당부에 세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올려다보았다.

이제야 자신을 불러다 놓고 개천을 정비할 방법을 물어본 이유를 깨달은 듯했다.

* * *

백관들 앞에서 개천 정비의 필요성을 거론했다.

그 필요성을 부정하는 신하는 없었다.

그러나 나서서 찬동하는 이도 없었는데, 사업이 시행되면 고생할 사람은 따로 있어서인 듯했다.

“공조에서는 이미 충청도에서 세미를 운반할 육로와 수로를 확보하는 업무가 있는데, 개천의 정비까지 맡는다면 너무 과중하지 않겠사옵니까?”

최근 공조의 판서로 영전한 김류였다.

“길의 확보는 분명 중요하지만, 시급한 업무는 아닙니다. 시급할 수도 없지요.”

강원도에서는 자연물의 득을 크게 봤다면 충청도에서는 반대로 자연물이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충청도의 강은 한양이 아닌 바다로 향한다. 그래서 바닷가까지는 세미를 쉽게 운송할 수 있지만 대신 해로로 위험천만한 태안반도를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태안반도의 물길인 안흥량安興梁은 이름이 가진 의미와 달리 고려 때부터 악명이 높았다.

태조 왕건이 수도를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삼남의 세곡을 조운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7세기 동안 안흥량이 잡아먹은 배와 인명이 수 천은 될 테니까.

이 문제는 고려에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여 여러 왕이 대대로 안흥량을 우회하는 운하를 개척하고자 힘썼으나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이는 조선이 개국한 직후인 태조 이성계의 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 운하 개척은 완전히 손에서 놓아버렸지. 만약 미리 운하가 개척되었다면 공납의 폐단도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거야.’

공납의 가장 큰 효용이 세금 운송 부담을 획기적으로 절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금이 가장 많이 나오는 하삼도의 조운선 길목을 태안반도가 수문장처럼 가로막고 있으니, 공납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충청도에서 선혜법 시행을 위한 육로와 수로의 개척 및 보강 사업의 정점에는 7세기 동안이나 한반도 국가들을 괴롭힌 안흥량의 공략이 있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는 건 이 고질병의 해결이 절대로 쉽지 않다는 점이다. 시급할 수 없다고 한 건 이 때문이었다.

“그러니 차선을 시행하면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최선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데, 그때까지 공조가 충청도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오나 안흥량의 문제는…….”

“판서께서 안흥량을 일생의 숙원으로 여기고서 여생을 안흥량 공략에 힘써주시겠다면, 도감을 세워 제조로 임명하겠습니다.”

“…….”

안흥량을 들먹이던 김류가 일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졌다.

“물론, 시급하지 않고 시급해서도 안 되는 건 개천의 정비 역시 마찬가지지요. 오랜 시간 많은 정성을 들이게 될 겁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두 가지 어려운 일을 함께 맡기고자 하십니까?”

김류가 투덜거렸다.

“물을 다루는 경험을 미리 쌓아둘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안흥량의 우회를 나의 대에서 완수할지는 미지수다.

정람기가 분쇄되며 후금의 기세가 꺾이고 조선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지만, 내치에 과도한 역량을 투자하느라 내실이 취약해지면 얼마든지 반전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하삼도 전체에 선혜법을 시행하고, 또 선혜법 시행의 실익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서는 안흥량 우회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시행할 사업을 위해 미리 경험을 쌓아두자는 것이다.

“또한, 개천 정비 역시 필요한 일이지요.”

임진왜란 이후 한양의 인구가 많이 늘어났고, 그 여파로 개천 변의 불법 경작과 일대 산의 도벌盜伐까지 남행하면서 오물 및 토사의 퇴적이 가속되었기 때문이다.

“마침 겨울이 머지않았으니 개천을 정비하겠다면 지금이 준비하게 좋은 때입니다.”

앞으로 비가 한동안 내리지 않을 테니까.

눈이 되어 내리더라도, 쉽게 녹지 않으므로 건천인 개천은 바닥을 여실히 드러낼 거다.

영의정 이원익은 개천의 정비가 확정됐다고 여겼는지, 찬반을 떠나 다음 단계에서 지적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한양의 백성들은 폐조 때 자주 노역에 동원되어, 역사役事(공사)라면 근심부터 품고서 이탈할 잔꾀부터 품기에 이르렀사옵니다.”

“음.”

“안흥량은 훗날 경외의 일이나 개천은 경중 당장의 일인데 백성들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과연 차질 없이 인력을 도원할 수 있을지 우려스럽사옵니다.”

이원익이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니, 김류도 좋다고 거들었다.

“영상의 말이 옳습니다. 광해군이 공사를 남발한 탓에 인심이 오늘날에도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재차 역사를 일으킨다면 반드시 불만을 품은 자가 생길 것입니다.”

한 마디 하려던 차였다.

“폐주가 남발하였던 궁궐의 공사와 개천의 정비는 가진 바 의의가 판이하거늘, 어찌하여 함부로 같은 선에서 놓고 비교하는가?”

좌의정 박홍구였다.

이에 맞서고 나선 건 김류도, 이원익도 아닌 병조참판 이귀였다.

“두 공사가 가진 의의가 판이하여도 백성들이 노역에 동원된다는 건 동일한데, 응당 백성의 눈에서 봐야지요.”

예전 같았으면 여전한 북인 혐오로 치부했겠지만 이귀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높으신 분들의 의도야 무엇이건 간에, 백성들이 고생한다는 건 동일하다. 그 점을 간과하고서 너 좋은 일이라는 식으로 노역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이때 우의정 이상의가 참신한 의견을 내놓았다.

“백성들이 노역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사리에 맞는 언행을 취하시지요.”

한때 이상의와 합을 맞췄던 이귀가 신랄하게 공격했지만, 이상의는 그런 날선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개의치 않고서 답했다.

“개천 정비의 필요성이 오늘날 거론되는 이유는, 손을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해악이 극에 달했기 때문인데 과연 그 해악을 전하께서만 느끼고 계시겠소?”

임금은 구중궁궐에 기거하는 몸이다. 청계천의 해악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여름에 덥고 습한데 한동안 비는 내리지 않아 강바닥에서 오물과 오수 썩어가는 냄새가 온 한양에 진동할 때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상의가 느긋하게 말했다.

“영묘조英廟朝 대왕께서는 참고하실만한 전례를 남기셨으니, 그에 따라 사업을 일으킨다면 응당 백성들 또한 저들이 필요로하여 시행된 것으로 여기지 않겠소이까.”

나 역시 생각해두었던 바였다. 이상의에게 선수를 빼앗길 줄이야.

그러나 그의 발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영묘조는 까마득한 과거의 일.

그때의 사례를 거론하였으니 평소 역사를 참고하지 않는다면 모를 수밖에 없다.

“우의정,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많으니 보다 친절하게 알려주셔야겠습니다.”

이상의는 이쪽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다시 제신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예를 표하느라 비뚤어진 초피갖옷을 까마득한 세월 고치더니 여러 사람의 눈살이 찌푸려질 즈음에야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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