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명군이 되다 117화
“크흠.”
이상의는 한 차례 헛기침으로 초피갖옷 자랑에 일그러진 시선들을 집중시키고서 말했다.
“영묘조의 대왕께서는 기존에 시행되던 답험손실踏驗損實을 파하고 공법貢法을 시행하시기 이전 여염의 백성들에게까지 가부의 여론을 구하셨소이다.”
당대의 신하들은 비현실적으로 여겼을 지시다.
나라의 근간이 될 세법을 논하는데 어째서 무지몽매한 백성들의 여론을 굳이 구하고자 하는가?
실무자들의 여론이 그래서야 전교가 제대로 이루어질리 없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진심으로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고, 무려 17만 가구의 의견을 취합했다.
‘그것도 15세기의 전제국이 말이지.’
세종대왕이 성군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전례와 마찬가지로 한양의 백성들에게 개천 정비의 필요성을 물어보자는 것이외다. 그리고 시행한다면 백성들이 어찌 노역으로 치부하겠소이까?”
여론 조사에서 반대가 많으리라곤 상정조차 않는 이상의였다.
당연한 것이, 개천이 문제가 된 지도 지극히 오래되어 정비의 필요성을 부정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탓이다.
“과연.”
영의정 이원익이 수긍했다.
“백성들이 원하여 시행하는 일이라면, 수고로움을 겪더라도 노역이라 치부하지 않겠소이다.”
노역이 고된 이유는 원치 않는 일에 강제로 동원되기 때문이다.
추앙하지 않는 군주의 거처를 중건하고 지켜주지 않는 자들을 지키는 것이 즐거운 사람은 없다. 원한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본인이 원하는 일이라면 다르다.
‘미래에서는 자기 돈을 들여서라도 고생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
헬창이라고, 신체 단련을 위해서 맛 없는 식사를 하고 자신의 근육과 관절을 매일처럼 혹사하는 별종들이다.
누가 보아도 사서 고생하는 꼴이지만, 본인들은 그게 즐겁단다.
‘같은 고생일지라도 자신이 원하느냐, 원치 않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산 증인들이지.’
마찬가지다.
모두가 공감하는 개천 정비의 필요성을 공론화하고 다수의 찬성을 받아낸다면 그것이 곧 명분이자 이유가 된다.
“어떻소이까?”
이상의가 제신을 돌아보며 물었다.
방법이 꽤나 그럴싸했으므로, 일단 걸고 넘어졌던 병조참판 이귀도 짧게 헛기침하고 말 따름이었다.
덕분에 고생하게 된 공조판서 김류는 내심 승복했는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의정이 묘안을 내주셨습니다.”
빙긋 웃어주니, 이상의가 몸을 돌리면서 씨익 웃었다.
“망극하옵나이다.”
* * *
이상의의 제안으로 한성부에서는 곧장 여론조사가 시작됐다.
한양은 인구가 많지만, 경외와 달리 대부분이 성내에서 밀집하여 살아가는지라 진척이 매우 빨랐다.
결과가 나온 건 고작 보름 뒤였다.
‘쾌속한데.’
속으로 촌평하니 판윤 구굉이 보고를 축약했다.
“성외인 숭신방과 창인방, 예성방과 성신방은 일부가 반대하였으나 성중은 여염의 8할 이상이 찬성하여 여론이 개천 정비에 매우 긍정하는 것으로 드러났사옵니다.”
이에 좌의정 박홍구가 투덜거렸다.
“성외의 무지몽매한 세인細民들은 개천이 자기네 일이 아니라고 반대했겠군!”
마치 못난 놈들 질타한다는 투에 영의정 이원익이 말했다.
“그야, 성외에서는 수혜를 입지 못하는데 한양의 백성으로 한 데 묶여 일손을 거들게 되었으니 당연한 반응 아닌가.”
“전하께서 원하시고 많은 사람을 위한 공공의 사업이거늘, 세인 따위가 농한기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반대란 말이외까!”
박홍구가 괘씸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흥, 하고 콧방귀 뀌었다.
그러나 박홍구의 말이 곧 그의 불평에 대한 대답이었다. 세인이니까, 대단힌 일의 여부와 별개로 득 없이는 고생하기 싫은 거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을까.
두 의정이 짧게 의견을 교환한 뒤, 구굉이 짧게 덧붙였다.
“노복을 거느린 반가의 다수가 개천 정비에 일손을 보탤 의사를 피력하였사옵니다.”
“선비들이 타의 모범이 되고자 하니 참으로 반가운 소식입니다.”
어전의 여러 사람이 그게 저들이라는 듯 흠흠 헛기침을 흘렸다.
아주 괘씸한 늙은이들이다.
오수 썩어가는 냄새에 코는 비뚤어질 지경이지만 직접 나서서 한 팔 거들기에는 사대부 체면이 살지 않으니 노복을 대신 내보내겠다는 거다.
그런데 저들 칭찬하는 한 마디에 이때다 싶어 은근슬쩍 내색들 하기 바쁘니, 조금 더 모범이 되어보지 않겠느냐며 강바닥에 삽과 함께 던져버리고 싶었다.
‘아무튼 이 양반님네란 것들은.’
마음 같아서는 신분제도 손보고 싶었다.
사실, 양반이란 피를 타고 이어지는 영속적 신분이 아니다.
본래 양반兩班은 그 이름에 걸맞게 문무文武 양兩과에 급제한 사람을 총칭하는 단어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면세와 면역의 특권은 식자가 잠재적인 관리가 될 후학을 양성하는 데 지원하는 의미였다.
그래서 삼대를 이어서도 급제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특권을 회수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강상의 제도가 작폐했다. 임란과 호란도 한몫 거들었다. 조상의 부와 인맥을 승계한 원칙적 양민들이 수령 등과 결탁하여 양반행세를 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관료의 숫자라곤 손에 꼽을 정도인 조선에 양반이란 종자들이 하나의 신분층이 되어 발에 채이게 된 이유다.
본디 조선에서 신분이란 양민과 천민, 둘밖에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신분제는 세법 이상으로 조선을 정의하는 가장 본질적인 제도이니, 이걸 고친다는 게 쉽지는 않지.’
후금과 국경을 맞댄 지금은 더욱 그렇다.
당장 안흥량마저 어쩌지 못하는 판국인데 하물며 신분제랴.
‘하지만 당장 신분제를 무너뜨리진 못해도 균열은 낼 수 있다.’
이번 여론조사도 그런 의미가 있다. 정책에 한 마디 하는 건 배운 식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일반의 백성들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필요에 의했을지라도, 변화는 사소한 곳에서 시작한다.
“공조판서?”
“예.”
호명과 함께 김류가 나섰다.
“백성들이 개천 정비에 적극 찬동하고, 절기는 이미 겨울이 되어 비가 멎은 지 오래이므로 더는 지체할 수 없겠습니다.”
“하명하시옵소서.”
“경을 준천도감 제조로 제수하니, 즉각 사업에 착수하세요.”
김류가 손을 모았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 * *
김류도 여론조사의 결과는 예상했는지, 준천도감은 빠르게 구성되어 곧바로 공사에 착수했다.
처음으로 삽을 뜬 곳은 미래의 종로구 청운동 일대인 장의동藏義洞이었다.
이곳부터 종묘동宗廟洞까지는 물길에 석축을 쌓았기 때문에 정비의 난이도가 낮았다. 처음으로 삽을 뜰 장소로 적절했다.
다르게 말하면, 나머지 구간은 석축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임란 때 전소된 문소전文昭殿의 터부터 창덕궁까지 일부 구간도 석축으로 둑을 쌓아놓기는 했다.
그러나 이들 경복궁과 창덕궁 주변의 지류를 제외한 나머지는, 개천 본류조차 예외없이 제방이 갖춰지지 않았다.
이러니 큰비가 내리면 지대가 낮은 한성부 남부는 매양 잠길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래서 개천의 준설이 거론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당상대신들이 기거하는 북촌은 고지대에 있고, 지류마저 석축을 갖춰놓아 침수란 남일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이제 한성부 주민들에게 남일이란 없었다.
공조판서 김류는 간교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력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한성의 부와 권력을 왕 다음으로 독점하는 북촌에 소문을 퍼뜨렸다.
-왕부터 재상, 사대부와 세민에 이르기까지 한양의 모두가 의기투합하여 공공의 사업을 일으켰는데 한 자락 보태지 않는다면 선비가 아니다!
제 노복들을 풀어서라도 거들기로 한 사람이 많았던지라, 일부 소극적인 사람들을 소인배로 몰아가기란 매우 쉬웠다.
그렇게 적극적인 참가를 부추기는 여론이 만들어지자 그냥저냥 일손만 보태려던 반가 중 일부가 미력하게나마 재산을 쾌척했다.
화룡점정은 세자가 첫 번째로 삽을 뜬 것이다.
그리고 곧장 물러나지 않고 (엄중한 호위를 받으면서) 함께 노역하니, 백성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되었다.
왕가란 양민들에게 범접불가로 여겨지는 시대다. 경천동지한 일대 사대부들의 만류에도 세자가 구슬땀 흘리기를 마다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크게 고무됐다. 그동안 구경거리라도 났다는 듯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선비들도 삽을 들었다.
들지 않으면 박석 대신 강바닥에 깔릴 수 있는 분위기였다.
* * *
“당초 징발하였던 인원보다 스무 배나 많은 사람이 자원한 탓에 도감의 업무가 도리어 마비될 지경이옵니다.”
김류가 보고했다.
예로부터 과유불급이라 했다. 넘치는 건 모자르니만 못하다는 뜻이었다. 벌어진 상황을 보니 과연 그러했다.
당초 징발인원은 5천으로 제한했다. 이번 겨울만으로 공사를 끝낼 생각이 아닌 탓이다.
여론이 달아오른 틈을 타 쇠뿔을 단김에 빼는 것도 좋았겠으나 폐조 때 역사役事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동원하면 여론이 식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전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러나 벌어진 일은 정반대였다.
‘오 천의 스무 배라면 십 만이지. 한성 인구를 생각하면 모이지 못할 숫자는 아니지만, 열의가 대단하다.’
도감 업무가 마비될 수밖에 없다. 관리들의 출입이 가능할지나 의문이었다.
“세자가 보인 모범에 백성들이 이렇게 호응해주니 크게 기쁘면서도, 또 난처한 상황이 벌어졌다니 당혹스럽군요. 판서의 노고가 매우 큽니다.”
김류는 꾸벅 허리 숙여 치하에 답하면서도 말했다.
“도감 정원의 확충을 윤허해주신다면 매우 감읍하겠사옵니다.”
“호조와 한성부에서 참상관을 두 명씩 차출하세요.”
그편이 인원들 관리에도 도움될 테고, 두 관청과의 연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다.
“망극하옵니다.”
단숨에 실무진 네 명이 늘어난 김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반대로 호조판서 김신국은 조용히 질색했다. 사업이 진행되면 바빠지는 건 추진하는 관청만이 아니다. 그간 공조에서 요구하는 기물과 예산 확보로 함께 바빴던 호조다.
‘그래도 양보를 안 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 사람이 십만 명이나 모였는데.’
모래가 손에 한 움큼 들어왔어도 쥘 손가락이 없다면 모두 흘러내리고 만다.
“자원한 이들이 아무리 뛰어난 열기를 가졌다고 해도 서둘러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열기도 빠르게 식어버리겠지요. 각사各司의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하옵니다.”
기껍게 찬동하는 김류였다.
그가 마냥 좋아할 단계는 아직 아니거늘.
“자원자를 거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력의 편성 역시 못지않게 중요한데 판서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개천의 구획을 나눠두고서 차례대로 정비할 계획을 미리 세워두었으니, 인력을 각 구획마다 적절하게 분배한다면 그대로 편성이 될 듯하옵니다.”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주먹구구로 하지는 않는다는 건가.
김류가 여전히 기꺼운 투로 말했다.
“새해가 오기 전에 사업을 완수하게 될 것이옵니다.”